[영화] 봄날은 간다

이주혁2008.06.27
조회139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다가

이제와서 보게 된 영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있자 하니,

내가 그동안 "보고 싶음"을 실천하는데

이다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즐겁고 속도 빠른 영화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여유를 제대로 주는 영화도 참 마음에 든다.

 

긴 머무름 덕분에,

영화에 나오는 모든 대사들,

모든 소품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볼 여유가 있었으니까.

 

사랑의 상처를 겪은 여자 은수,

그리고 그녀에게 깊이 빠져든 남자 상우.

 

 

은수는 어쩐지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스르르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상우는

모래 같은 은수를 더욱 움켜 쥐며

그의 손아귀 속에서 더 빨리 달아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아닐까 싶지만,

이 밖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너무나 많다.

 

 

물론 이 대사도 인상 깊었지만,

이 대사보다도 더욱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은,

 

이별을 고통스럽게 견뎌내며 할머니와 함께 기차역에 갔던 상우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며 소리치던 장면과,

 

아파하는 상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힘들지? 원래 여자와 버스는 지나가고 나면 잡는 게 아니여"라며

우는 상우를 안아 주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상우의 외침은 "은수도 이미 떠난 사람이다"라는 인정과 같고,

할머니의 대사는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잡음"이

그저 부질없는 것임"을 말하는 듯 해서.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이 떠난 할머니나

가두려고 해도 가둘 수 없는 은수와 묘하게 교차되는 듯 했다.

 

그리고 상징적인 단어 "봄날"

그리고 영화 내내 귀를 부드럽게 울렸던 의미있는 음악들.

 

 

 

누구나 인생의 봄날을 기다리곤 한다.

 

돈이건, 사랑이건, 명예건, 성공이건..

누군가에게 한번쯤은 찾아올 봄날.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끼는 순간,

그 봄날은 햇볕을 한껏 받아 스러지는 봄날의 꽃잎들처럼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만다.

 

다음 번에 돌아와도, 결국은 스러질 것을 예고하는 것 마냥.

 

 

 

잡고,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꽃잎은 그렇게 짧고 강렬한 기쁨만 선사한다.

 

그래서 은수와 상우가 헤어졌던 마지막 장면의 긴 여유가

내 마음을 더 복잡하게 했던 것 같다.

 

 

과연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게 가능할 수 있을까?

꽃잎도 피고 지고, 커지고 오므라듦을 반복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 상우의 대사는

"사랑은 원래 변하는 거야"라고 인정하고 마는 대사가 아니었을까.

 

모든 장면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마음에 와 닿았던 여유가 찬 영화.

 

허진호 감독의 연출이 참 마음에 든다.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하나 하나의 소재에 생각을 담았듯.

 

 

여유로운 영화.

 

봄날은 간다.

 

 

 

상우와 은수의 직업은

영화의 내용과 주제에 정말 어울리는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지금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순간의 소리들을 담아내는 녹음 기사.

 

민요 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대나무 소리가 모두 그러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도,

내 곁에 있다고 만족하는 그 순간,

이미 봄날처럼 가버리고 스러질 준비를 하는 것들이기에.

 

 

나의 "보고싶음"의 실천이

오늘따라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영화의 감흥만은,

봄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