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 , 렘브란트 반 레인 <책을 읽는 티투스>로 보는 서양미술사

전혜림200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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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

 

 

 

 

렘브란트 반 레인 <책을 읽는 티투스>

 

 

  몇 달 전 오르세 미술관전과 비슷한 시기에 열린 또 하나의 대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전에 갔을 때,

벽 모서리를 끼고 두 그림이 나란이 수직으로 대립된 채 전시돼 있었다.

 

  이 두 작품 모두 위대한 작품임은 틀림없지만, 이 두 그림이 수백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회자된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서양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서양미술사는 어떻게 보면 이 두 그림의 평가가 역전돼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너의 늙은 여인을 본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놀랄것이다. " 세상에 이게 그림이야? 완전 사진이네 사진" 사실 사진을 찍는 다고 해도 삶의 고뇌가 새겨진 주름과 캔버스를 뚫을 기세로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쉽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저 환상적인 명암....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심장을 멎게 할 법한 명작이다.

 

  사진이 없었던 시대,

그림이 사진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능력이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였을 당시 데너는 최고의 화가 중 한명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위대한 화가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데너의 작품과 명확히 대조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꾸며지고 가공돼 창조된 그야 말로 "그림"이다.

방금 말한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훌륭한 작품은 아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말년의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파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이 그림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서

당시에 외면받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를 그것도 몇 세기가 앞섰기 때문에 외면받았다.

 

  렘브란트의 작품의 명암을 볼 때 흔히 세 가지 빛을 봐야 한다고 한다.

두 가지는 다른 화가들이 다 쓰는 것처럼 순광과 역광,

그리고 제 3의 빛 바로 공기의 빛이다.

이 그림파일에는 잘 나오지 않는데 그림을 직접보면 티투스(램브란트의 아들)의 

왼팔 주변으로 빛이 둘러쌓여 있다.

그 빛을 자세히 보다보면 마치 마술에 걸린 듯 당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렘브란트의 내면 그리고 이 방의 분위기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영어 단어 air에 왜 분위기라는 뜻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득한 상념에 잠기면서

렘브란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들에 대한 사랑...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자신이 본 것이 아닌 자신이 느낀 것을 그렸다.

물론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도 느낌이 있지만,

이 그림에는 그 느낌이 주연이다.

 

 느낌.... 감정...

이 두 단어와 서양미술사를 연결하면 우리는 또 한 명의 화가를

의식 속에 소환할 수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

그렇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2세기 하고도 반이 넘는 시간을 넘어 고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극 사실주의 그림은 많이 그려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현실주의 그림들은 또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림에서 개인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

그런 것들을 통해서 감상하는 이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어느 새 현대예술의 중요한 대세가 됐다.

 

 그것은 전체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신비로운 것으로 보기 보다는

이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철학에서는 계몽주의가 탄생났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관심사는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자신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어떤 존재

특별한 성격이 있고 특별한 꿈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에서 자아와 개인이라는 관념이 탄생했다.

 

 이 관념의 등장은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예컨데 사진술의 등장과 튜브물감의 발명)과

결합에 미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고

그리고 전에 그려진 작품에 대한 평가도 바꾸어 놓았다.

 

  처음 밝혓듯

현대의 관점에서도 이 두 그림은 모두 위대한 그림이다.

하지만 확실히 두 그림의 우위는 처음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는

정반대로 역전됐다.

 

 두 그림의 가치가 역전된 역사...

그것은 4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의 작은 서양미술사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