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_The Hours,2002

이설이2008.07.07
조회128

디 아워스

The Hours, 2002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니콜키드먼(1923-버지니아 울프)

 

 

 

 

 

 

디 아워스_The Hours,2002


 

 

줄리안 무어(1951-로라 브라운)

 

디 아워스_The Hours,2002

 

 


메릴 스트립(2001-클라리사 본)

 

디 아워스_The Hours,2002


 

 

 

 

 

생전의 오손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제대로 영화화할 수 있는 감독은 자신밖에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건 오손 웰스니까 하는 소리다. 삼류 소설을 훌륭한 영화로 만드는 건 쉽지만 일류 소설을 일류 영화로 뽑아내는 건, 이미 어느 수준 이상에 오른 문학적 질감을 스크린에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물론 영화 역사에는 수많은 예외가 있다. 스티븐 달드리의 는 그 예외적인 작품 목록에 오를 만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초장부터 장면 단위의 교차 편집이 자아내는 효과가 무엇인지 증명하려고 작심한 것처럼 정교한 이미지의 연쇄를 펼쳐 보인다. 영화 내내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그녀의 소설에 심취한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중산층 주부의 삶과 현대 뉴욕에서 출판 편집자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의 삶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을 는 하나로 꿰어찬다. 짧지 않은 상영 시간이지만 ‘꿰어찬다’는 표현밖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1950년대의 미국 중산층 주부의 삶과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어느 여성 출판 편집자의 삶의 모양은 각자 다르지만 긴 비탄과 짧은 환희가 그 여자들의 삶에 묻어 있다. 매우 긴 삶처럼 느껴지는, 영화에 묘사된 그 여자들의 삶은 하루 동안에 벌어진다. 하루가 영원처럼 다가오는 이 구성을 통해 감독 달드리와 각본을 쓴 데이비드 헤어는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우울하게 응시했던 여성의 삶의 비극적 원형을 끌어낸다. 그것은 한 여인의 하루 동안의 삶이 모든 인간의 삶의 원형일 수 있다는, '댈러웨이 부인'에서 울프가 시도한 것의 확대판이다. (실제 버지니아 울프와 흡사하게 분장해서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니콜 키드먼과 줄리앤 무어와 메릴 스트립이 그 확대판의 주인공들이다. 그 여자들의 연기는 징그러울 만큼 생생하다. 감상적으로 질질 늘어질 법한 감정을 연기할 때도 그 여자들의 모습에선 섬뜩한 슬픔 같은 게 배어 나온다. 울프와 커닝햄의 소설에서 사색적으로 묘사된 여성의 우울한 삶이 그 여자들이 연기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 견디기 힘든 히스테리와 비탄과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이 섞여 복합적인 감정의 주름을 지어낸다.

그러나 그 여자들의 감정에 취해 있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왜 그 여자들은 이토록 비탄과 우울에 빠져 있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매일 서재에서 새 작품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데 집중한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 자살하는 결말을 택할 것인지, 아닌지에 온통 골몰해 있다. 울프의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남편은 그런 울프를 보며 노동하고 있는 자신과 예술하고 있는 울프의 처지를 빗대 자조 섞인 말을 내뱉는다. 하녀들은 안주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고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는 울프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한다. 울프는 자신의 일상 삶을 떠나서 작품에만 몰두하고 있는 비범한 예술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예술을 추구한다. 그녀는 비난받을 만하다. 그런데 울프가 남자였더라도 과연 비난받았을까.

평범한 가정 주부 로라는 겉으로는 아무 이상 징후가 없는 가정 주부다. 참전 용사 출신인 남편은 (외모는 별로지만) 다정다감하며 귀여운 아들도 있다. 로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있으며 소설에 묘사된 여성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성찰과 자신의 무의미한 일상의 간극 사이에서 갈등한다.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하는 그녀는 제대로 케이크를 만들지 못해 친구에게 조소를 산다. 그녀는 일상적인 일에 그리 능숙하지 못하다. 그녀는 힘들게 케이크를 만든 후 아들을 이웃에게 맡겨두고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묘사된 것처럼 자살을 꿈꾸며 호텔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이 무의미한 삶을 종식시키고 싶어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들을 선택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이상향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의 대세를 따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택할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배부른 고민이다. 그런데 과연 남자들이 그런 고민을 해도 비슷한 비난을 받았을까.

클라리사는 꽤 성공한 듯이 보이는 출판 편집자다. 그녀는 동성 애인과 함께 동거하고 있으며 남성 소설가 리처드 브라운을 애인으로 두고 있다. 리처드는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고, 클라리사는 그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를 막 열어주려 하고 있다. 리처드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부르는 클라리사는 리처드에게 잃어버린 어머니의 사랑을 대변하는 존재다. (리처드는 로라의 아들이다.) 삶에 지친 리처드는 이제 삶을 포기하려 하고 그런 그를 클라리사는 필사적으로 잡으려 한다. 파티를 준비하며 분망한 하루를 보내던 클라리사에게 비극이 닥친다. 리처드는 자살하고 더불어 그와 함께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도 가루처럼 사라진다.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되는 세 여자의 삶에서 가장 충만하고 행복해 보이는 클라리사의 삶에서도 비극은 피해 가지 않는다. 양성애자인 듯 보이는 클라리사의 삶은 어떤 편견이나 굴레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각자 동성의 애인을 둔 리처드와 클라리사의 사랑은 그만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지극히 관념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적인 이런 이야기를 소재로 는 이미지의 촉각이 무엇인지를 곳곳에서 실감시킨다. 세 여자들이 꽃을 사고 책장을 넘기고 케이크를 만드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위를 할 때, 죽기로 작정하고 사는 듯한 그 여자들의 생의 의지와 감각이 손에 만질 듯 전해져 온다. 그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삶의 열정을 갈구하고 있지만 삶은 그만큼이나 무심하게 그 여자들을 비껴 나간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 예술가로서의 실존적인 고민은 가정 주부 로라의 삶에서, 또 이성애자 애인을 둔 동성애자 여성의 삶에서 형태를 바꾸어 되풀이된다. 모든 이의 삶은 하나로 연결돼 있고 앞선 사람의 고통은 이후로도 되풀이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그 우울한 진술이 화면에 이어지는 동안, 영화 속 그 여자들의 도저한 관념적 고통이 전해주는 것은 하나다. 그 여자들의 삶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기 마련인 여성의 조건에 대해 저항하며 몸부림을 치고, 또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면도날로 베인 것 같은 뜨끔함을 준다.

영화에선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여자들간의 키스 장면이 그렇게 강렬한 것도 같은 이유다. 뜬금없이,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을 찾아온 언니에게 격정적인 키스를 한다. 뜬금없이, 로라는 자궁 이상 유무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려는 옆집 친구에게 키스를 한다. 그럴 때 울프와 로라는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을 경험할 것처럼 환희와 안타까움에 부르르 떤다. 여성들끼리의 동성애적 욕망을 완곡히 암시하면서 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의 열정을 간직한 여자들의 긴 비탄과 짧은 환희를 이런 식으로 요약해낸다. 그게 가능한 것은 감독이 능숙하게 배치한 화면 안에서 배우들이 풍부하게 그려내는 감정의 지도 덕분이다. 민감한 이들에게 는 상처를 준다. 상처는 전염된다. 그 상처는 겪어볼 만하다. 거기서 새로 살이 돋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