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의 배경

김성진20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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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배경

 

일본은 프랑스와 영국군대를 이끌어내어 마침내 ´여유사냥´이란 미명 아래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이로써 조선 불운의 왕비가 되었다.

 

조선말기 방년 16세로 고종의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백성들과 원성을 사자, 최익현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자 대원군은 일본과 수교. 임오군란 이후는 대원군 재섭정 하기에 이르자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의 외국 세력을 끌여들여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종황제가 갑오개혁을 원천 무효화 발표로 훈련대 해산시키자 조선의 정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의 미우라 공사 등의 주도하에 경복궁으로 자격을 보내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 과정

 

경복궁에서 1895년 8월 20일 새벽 5시경, 안경수 구부대신은 궁궐 피습의 급보를 받고 시위대를 즉각 소집하라고 지시를 한 후 입궐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 무렵 경복궁 동남쪽 망루인 동십자각이 이미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장악돼 있었으며, 괴한들이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에 고함을 치며 저지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경찰들이 총을 쐈으며, 그 자리에서 훈련대장 홍계훈이 사망했다. 군부대신은 급히 자리를 피하고 시위대 병사들도 모두 후퇴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압력으로 친일파 세력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고 통탄하자, 곳곳에서 민초들의 붕기인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조약은 애초 4개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5번째 항이 추가되었습니다.

 

을사 조약 5개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함.

 

이 말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서 일본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2.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 정부의 중개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함.

 

1항과 같은 내용입니다.

한국은 일본의 허락이 없으면 외국 정부와 아무런 약속도 못한다 는 것입니다.

3.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들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를 알현하는 권리가 있음.

 

일본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설치하는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였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

 

한국의 행정권을 빼앗는 내용 입니다.

일본 정부에서 임명한 통감과 관리가 우리 정부의 모든 것을 감독한다는 것이지요.

 

4. 일본과 한국 간에 현존하고 있는 조약과 약속은 본협약 조관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3항과 연계되는 내용입니다.

앞서 맺은 어떤 조약보다 을사 조약이 가장 상위에 있다 는 것입니다.

5.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도록 보호함.

 

이것은 한국 측에서 요구하여 삽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주권을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겨우 황실 가족을 보호해준다는 것 이거든요. 큰 의미가 없습니다.

 

→ 1904년 2월 5일, 일본은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 1904년 5월,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결정하여 미국, 영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승인 및 묵인을 받아냈다.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황제에게 강제로 조약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덕수궁에서 열린 회의에 일본 헌병 수십명을 데리고 들어가 대신들에게 조약 승인을 찬성하도록 강요하였다.

 

당시 조약에 찬성한 사람은 박지은 이지용 이원익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들이다.

 

탁리대신 민영환은 유서를 쓴 후 자결해 순국했다. 끝내 충신으로 남고 싶었던 민영환의 자결이 이후 조선 의병활동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은 고종황제의 친서를 갖고, 헤이그 민국평화회의에 참석키 위해 특사로 갔으나, 일본의 출입저지로 분노한 이준 열사가 할복 자살하는 사태로 빚어졌다.

 

(할복한 게 아니라 '화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긴 한데, 역사 문헌에는 '할복' 했다고 기록돼 있다)

 

민영환의 유서 [전문]

嗚呼라. 國恥民辱이 乃至於此하니 我人民은 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리라.
夫要生者는 必死하고 期死者는 得生이니, 諸公은 豈不諒只아.
泳煥은 徒以一死로 仰報皇恩하고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하노라.

泳煥은 死而不死하고 期助諸君於九泉之下하리니, 幸我同胞兄弟는 益加奮勵하고
堅乃志氣하여 勉其學問하며, 決心戮力하여 復我自主獨立이면 則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리라.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하는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 하여 힘쓰기를 더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병인양요-연도;1866년

배경;조선의 프랑스 선교사 살해에 대한 보복과 프랑스의 조선 개항 및 이권 획득 목적

시대;조선 고종3년, 실권자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원인;병인박해-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및 탄압 때 프랑스인 선교사 9명 사망


결과;프랑스 군의 강화도 상륙과 전투, 문화재 약탈

 

신미양요-연도;1871년

 


배경;미국의 팽창정책


시대;조선 고종 8년, 실권자 흥선대원군


원인;미국이 파견한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조선의 포격

결과;미국 군의 강화도 상륙, 미국 군 철수 후 척화비 설립

 

강화도조약-년도;1876년

 


배경;일본의 식민지 개척


시대;조선 고종 13년,흥선대원군 하야 후 명성황후 일파가 강세

원인;일본이 운요호를 보내어 조선 자극, 조선의 포격으로 전쟁. 일본의 승리로 조선의 개항

결과;일본과 조약 이후 다른 서양열강과도 불평등 조약 체결

 

임오군란-연도;1882년

배경;신식군대에 비해 부당 대우를 받던 구식군대의 불만

시대;조선 고종 19년, 실권자는 명성황후


원인;13개월간 군료(봉급)을 받지 못한 구식군대에게 군료가 도착하지만 쌀에 모래와 겨들이 썩여있자, 구식군대가 군료담당자 폭행, 이에 세도가인 민경호가 구식군대 일부를 투옥, 이에 구식군대가 반발

결과;구식군대가 대원군과 결합, 대원군이 잠시 실권자가 되지만 청군이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 일본과 피해보상을 위한 제물포 조약 체결, 청이 조선에 대한 기득권 획득

 

갑오개혁-1894년

 


배경;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수탈 및 침략을 위한 개혁을 실시


시대;조선 고종 31년,친일내각 수립


결과;개혁으로 구제도 타파(반상 타파, 과부의 재혼 가능 등), 일본에 의해 기득권을 친일내각에 빼앗긴 명성황후 측이 삼국간섭을 보고 러시아에 접근, 이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 발생

 

을미사변-1895년

 


배경;청일전쟁 이후 삼국(러시아,프랑스,독일)간섭으로 일본이 청에 요동을 반납하자, 명성황후 일파가 친일에서 친러로 노선 변경,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이 명성황후를 제거.

시대;조선 고종 32년, 실권자는 친일내각에서 친러내각으로 교체

원인;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획득한 뒤, 친일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실시, 이에 불만을 느낀 명성황후 측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친일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으로 일본과 마찰

결과;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자 위기를 느낀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 단발령과 함께 을미의병의 주요 이유

 

러·일전쟁 시발이 된 사건


“1904년 2월 8일, 한국(Korea)의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던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 바략 호와 코리츠 호가 일본 함대의 총공격을 받았다. 양국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러 시간의 피나는 전투―특히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가 끝난 후, 러시아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배를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러일전쟁의 포연은 한국 땅을 비켜갈 리 없었다.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한 일본은 같은 날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 역시 기습작전이었다. 위 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문 ‘이그재미너(Examiner)’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크게 활약했던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의 종군기 첫머리다.

 

당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황야의 부름’이나 ‘강철 군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러일전쟁 첫날의 모습을 그렇게 그렸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여순·대련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제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두려워했던 일본은 군함을 인천항으로 향했다. 일본 육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육로로 북진했다.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 밖에서 러시아 군함 바략호와 코리츠호가 침몰하고 있다. 일본 함

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뺨에 붉은 점을 친 자들은 선두의 선발부대를 따라랏!”

 

“너처럼 보라색 점은 공병대 소속이다! 혼동하지 마랏!”

 

일본군은 군수품의 소속을 쉽게 식별하려고 짐을 진 한국인들의 뺨에 부대별로 다른 색깔의 점을 칠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길 연변의 마을들은 매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산속으로 피란을 떠났다. 마을이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정부와 우왕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

 

집을 몽땅 비우고 멀리 피란하는 것 외엔 대응책이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의 무력한 모습을 잭 런던은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구경하려고 마을로 내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기에 약간의 위험만 느끼면 서둘러 도망친다.  …한국의 북쪽 지방은 일본군이 통과할 때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고 파종하지도 않았기에 들에는 녹색 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은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대사건이었다. 저 먼 동쪽 끝, 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제국이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인가.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언제나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던 러시아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또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성장을 어디까지 지켜보고 지원할 것인가.

 

러일전쟁에 대해 유럽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언론들이 한국과 청에 보낸 종군 기자들의 활약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진 전송이 불가능하던 당시, 숱한 언론들이 생생한 현장 묘사도(일러스트레이션)로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지금 우리도 볼 수 있는 그 그림들을 보면 노회한 러시아와 팔팔한 일본의 한판 겨룸, 그리고 그 발밑에 깔린 한반도와 백성들 모습이 강렬하게 묘사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 제물포항에 정박중인 운요크호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기 전에 일본이 조작한 사건이다. 일본은 조선의 문호를 열기 위해 먼저 운요호라는 무장한 배를 일부러 강화도 주변으로 보내서 도발. 조선에서는 무장한 적선을 보고 먼저 발포를 하자, 일본에서는 이를 구실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게 된다.

 

출처: 네이버 하리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