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호세 귀의자 성당의 본당으로, 1882년에 착공. 이듬해 1883년에 초대 건축가인 비야르의 사임과 함께 당시 31세였던 가우디가 그뒤를 이어받았다. 만년을 기독교도로 살던 가우디는 이 성당 건설에 반평생을 바쳤다.
가우디가 완성시킨 것은 동쪽의 '탄생의 정면'과 그 4개의 종루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철저히 입각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조각은 아무리 보아도 돌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내전으로 꽤 많은 손상을 입었지만 최근 복구되었다. 서쪽의 '수난의 정면'은 가우디 사후에 건설된 것이다.
솔직히.. 유럽의 성당이라는 것이 처음 몇번 볼때는 멋있지만 그 생김새가 거의 비슷비슷해서 나중에는 별 감정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내부며 외부며 여느 성당과는 달랐다..
아직도 진행중인 성당.... 다 완공되면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구엘 공원 (Parc Guell)
카사 밀라(Casa Mila)
가우디(Antonio Gaudi)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이야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탈루냐가 낳은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다.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가우디 건축의 매력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퇴색하지 않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1852년에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구리세공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바르셀로나에서 건축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그가 비로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쇼케이스 디자인이었다. 이것을 눈여겨본 실업가 에우세비 구엘은 구엘 저택과 구엘 공원등의 건축을 가우디에게 의뢰하고 구엘 자신은 후원자가 되었다.
19세기 말에 바르셀로나에서는 부유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카탈루냐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세기말 예술로, 프랑스의 아르누보와 같은 '모데르니스모(근대주의)'라는 양식이다. 그 중에서도 독창적인 건축 스타일을 확립한 가우디는 모데르니스모를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그러나 만년의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건설하는 데 전념하여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1926년에 전차에 치어 사망했을 때는 너무나 초라한 복장으로 부랑자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장례에는 그의 재능을 사랑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동냥을 받은 많은 부랑자들도 장례식에 함께했다.
2007. 07. 19 Antonio Gaudi. Barcelona
'탄생의 정면'
내부
'수난의 정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Temple de la Sagrada Familia)
산 호세 귀의자 성당의 본당으로, 1882년에 착공. 이듬해 1883년에 초대 건축가인 비야르의 사임과 함께 당시 31세였던 가우디가 그뒤를 이어받았다. 만년을 기독교도로 살던 가우디는 이 성당 건설에 반평생을 바쳤다.
가우디가 완성시킨 것은 동쪽의 '탄생의 정면'과 그 4개의 종루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철저히 입각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조각은 아무리 보아도 돌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내전으로 꽤 많은 손상을 입었지만 최근 복구되었다. 서쪽의 '수난의 정면'은 가우디 사후에 건설된 것이다.
솔직히.. 유럽의 성당이라는 것이 처음 몇번 볼때는 멋있지만 그 생김새가 거의 비슷비슷해서 나중에는 별 감정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내부며 외부며 여느 성당과는 달랐다..
아직도 진행중인 성당.... 다 완공되면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구엘 공원 (Parc Guell)
카사 밀라(Casa Mila)
가우디(Antonio Gaudi)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이야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탈루냐가 낳은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다.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가우디 건축의 매력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퇴색하지 않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1852년에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구리세공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바르셀로나에서 건축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그가 비로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쇼케이스 디자인이었다. 이것을 눈여겨본 실업가 에우세비 구엘은 구엘 저택과 구엘 공원등의 건축을 가우디에게 의뢰하고 구엘 자신은 후원자가 되었다.
19세기 말에 바르셀로나에서는 부유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카탈루냐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세기말 예술로, 프랑스의 아르누보와 같은 '모데르니스모(근대주의)'라는 양식이다. 그 중에서도 독창적인 건축 스타일을 확립한 가우디는 모데르니스모를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그러나 만년의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건설하는 데 전념하여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1926년에 전차에 치어 사망했을 때는 너무나 초라한 복장으로 부랑자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장례에는 그의 재능을 사랑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동냥을 받은 많은 부랑자들도 장례식에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