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dus(영화 엑소더스의 주제곡)

정철200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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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더스에 얽힌 역사

 

이스라엘이 현대국가로 건국되기 100여년 전에 이미 저명한 기독교 정치인과 카톨릭 성직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시오니즘 운동의 미래 결과물에 대한 도덕적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들의 투쟁정신을 새삼 고취시키는데 기여한 영국 고위장교 3총사들을 굳이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존 헨리 패터손, 리차드 마이너츠하겐, 찰스 오더 윙게이트 등 3명의 대령들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목사가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길을 여는 기초가 되었던 1947년 11월 29일 유엔의 ‘팔레스타인 지역내 유대인국가와 아랍국가 분할수립에 관한 결의안 채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결의안 6개월 후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된다.

 

1947년 2월 유엔은 11개의 회원국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과제는 비현실적인 영국의 팔레스타인위탁안을 조사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해 여름 위원회는 조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그곳에서 유대인들의 정착 진전상황과 발전에 커다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유럽 난민수용소에 수감된 25만명의 비참한 유대난민처지는 위원회에 무거운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이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영국의 친아랍 성향의 정치인들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1947년 7월의 무더운 여름날, 4500여명의 남녀노소가 거의 반나체 상태로 여객선 하가나(Haganah)호에 가득 탔다. 이들은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로써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부푼 희망을 안고 배의 이름을 “EXODUS 1947”로 바꾸고 5각형의 다윗깃발을 국기로 달고 출항하였다. 그러나 운명의 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위원회의 마중이 아니라 영국군의 총알이었다. 새로운 유랑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엑소더스호에 유일하게 비유대인으로써 자유의지로 탑승한 승객이 있었다. 그는 시오니즘 운동을 동조했던 개신교 목사인 존 그라우엘(Rev. John Grauel)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항구인 하이파(Haifa) 해안 앞에서 엑소더스호가 영국군에 공격받는 것을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

 

그라우엘 목사는 배에서 급히 내려 예루살렘에 있는 위원회로 달려가서 엑소더스호가 어떻게 일곱 번이나 충돌된 뒤 무장한 영국군이 갑판에 올라와 힘없는 젊은이를 총으로 쏘고 무차별 구타를 하였는지를 다급하게 보고하였다.

 

그라우엘 목사는 1947년 7월 17-18일 사이에 벌어진 영군군의 만행에 확실하게 증언하였다. "엑소더스호에는 어떤 무기도 없다. 가지고 싸울 수 있는 것이라곤 감자, 통조림 깡통, 그리고 두 주먹뿐이었다"

 

엑소더스호의 유대인난민들은 영군의 하선명령을 거부하고 단식 농성으로 저항하였지만 결국 독일로 되돌려 보내졌다. 엑소더스의 비극은 수 개월 동안 전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여론을 들끓게 하였다. 이것은 위원회로 하여금 그들의 인도주의적 사명에 책임지는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윌리암 헐(Rev.William Hull) 목사 역시 그 해 여름 위원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위원회의 한 멤버였던 캐나다 위원인 이반 랭드 판사에게. 캐나다 출신인 헐 목사는 1935년부터 예루살렘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가 영국과 아랍 양측으로부터 불공평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확실한 사실과 내막을 알고 있었다. 헐목사와 랭드판사가 한번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이 때 랭드판사는 헐목사로부터 이곳의 갈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게 되었고 특히 시오니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를 하게 되었다. 이 만남 이후에도 헐목사는 전체 위원회 앞으로 간곡한 서한을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었다.

          

캐나다는 영연방(Commonwealth)에 가입되어 있었기에 랭드 판사의 안티영국 입장이 관철되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위원회의 양심"이 되었다.

 

랭드판사의 영도하에 위원회의 다수가 '유대국가-아랍국가 분할안'을 받아들였다. 분할안(181 UN 결의안: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아랍인과 유대인이 분리하여 독립하는 안건 결의)은 유엔총회에서 찬성 33대 반대 13으로 통과되었다.

 

유대인 대표부는 이 결의안을 수용하였지만 아랍지도자들은 거부하고 즉각적으로 공격을 하였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1948년 5월 14일에 끝나던 날 아랍-유대 전쟁이 반발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아랍국가-유대국가 분할'로 이끌었다. 아랍의 공격은 유대인들으로 하여금 옛 유대민족이 새로운 국가로 탄생한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