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처럼 자신의 성에 당당하라!

차은진2008.07.12
조회310

 

어쩌다 '이효리 섹시에 집착하지 말고 퀸으로써의 포스를 보여라.'

라는 제목의 포스트 글을 읽다가 비교대상으로 거론 된

마돈나의 후배들을 압도한다는 동영상을 보면서

이 사람은 어찌 이리도 섹시할까? 어찌도 저렇게 당당하지?

라는 호기심에 검색을 시작 하게 되었다.

 

http://blog.daum.net/dolshe/14385235?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dolshe%2F14385235

 

블로그 저자는 마돈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마돈나는 'boy toy'라고 적혀진, 즉 남자 장난감 (남자로 된 장난감)

이라는 의미의 벨트를 데뷔 초기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녀가 그 이후로 만들어 낸 문화 코드.

여자는 남자의 성적 노리개, 성적 대상으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처음으로 당당하게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춤과 노래로 보여 주었다.

어떤 영향을 주었나는 이 포스트 참조,

또한 양면적 의미에 대해서도->

http://blog.naver.com/artt10/10024516074

 

그녀들의 섹시함은.. 

 

단지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남자들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한 종속의 의미로써만 존재하는 것인가?

자신이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또는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써 볼 순 없는 걸까?

성적 아름다움, 섹시함.. 성적 아름다움, 섹시함..

남자들의 판타지? 여자들의 본연의 당당함..?

 

마돈나는 2003년 시상식에서 

공개적으로 브리트니와 딥키스를 했었는데...

그건 또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동성애적 의미는 아닌 걸로 알고 있다.(둘 다 남편이 있으니^^;)

하지만 두 사람의 공개적 행동은 

한편으로 어찌 보면 동성애자의 입장에서

더 없이 갑갑했던 사회적 통속의 틀을 깨는

하나의 시도로써 보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그것에서 느끼는 통쾌함도

만만치 않았을 것 이다.

 

마돈나라는 사람은..자신의 노래에 자신의 가치관과 소신을

담아 뮤지션으로써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패리슨 힐튼처럼 대책없는 방종의 의미로써

그런 행위를 한 건 최소한 아니지 않았을까?

 

어떤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고 다니다 성폭행을 당했다면

오히려 되려 마땅히 당할 짓을 했다고 비난 받는..

그리고 또한 여성들이 성적주체로써 당당하지 못하고

상업적 수단으로써만 자신의 성을 전면으로 드러낸 채

남성과 동등하게 성을 즐길 권리를 억압 받고 있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마돈나가 선두적으로 드러낸

자신을 나타내는 적극적인 섹시함의 표현,

그리고 express yourself 라는 노래 제목에서 드러나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추구.

그녀는 모든 여성들이 동경하고 선망하는 '성적 자유로움'

그것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마돈나를 페미니즘 입장에서

반대하는 글은 보지 않아 내 생각이 편향 되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기에

나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ㅎ

 

 

글 제목처럼 자신의 성에 당당하고 싶은 여성들이여!

한 군데 휴식처를 알려 주겠으니 여성만 오라! ㅋㅋ

http://foxylove.net/main.html

 

그리고 여성들이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인정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면

성을 즐기는 데 조금 더 유리하다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 시대의 현실이다. 

 

밑에 글은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팍팍 깨닫게 해주는 글이다

능력은 일단 있고 볼 일이다. 여성들이여 ^^

남자들과 동등한 측면에서 성을 부담없이 즐기기에

이렇게 사회적 제약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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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건달,을 보고 남성이 만든 여성영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부조리한 쿨함 같으니!

마돈나와 조디 포스트가 자발적인 미혼모로 나섰을 때 세상은 놀라워서 한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약속한 듯 거의 동시에 갈채를 보냈다. 먼저 박수를 친 것은 여성이었지만, 곧이어 언론도 ‘시대를 앞서가는 행보’로 맞장구 쳤다. 한국 언론에도 ‘아비없는 호로 새끼’를 낳아 기른다는 논조는 없었다. 아니, 미혼모에 대한 세상의 통념이 어느새 이렇게 바뀌었단 말인가!

서울의 평범한 20대 회사원이 그랬다면 세상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 몸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행여 모르겠다고 생각되면, 내 누나 혹은 여동생이 그런 결단을 고지했을 때 ‘나’의 반응이 어떠할지 상상해보라. 평소에 미국 언론이 평범한 미혼모를 보는 삐딱한 시선도 ‘개인주의’와 ‘인권’이라는 좀더 두터운 거름종이를 거친다는 것뿐 한국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은 왜 마돈나와 조디 포스트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냈을까? 짐작하건대, 이들 여성은 미혼모를 배제하면서 사수하고픈 가부장제의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평생 놀아도 살 수 있는 돈 이미 벌어놓았고, 앞으로도 환금 가능한 명성은 지속될 테고, 미모가 출중해서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연애해줄 남자 줄설 게 뻔한데, 도대체 이들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겁을 준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이데올로기는 총명해서 이런 경우에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칼로 내리쳤다 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숭배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도 가부장제는 손해볼 게 없다. 마돈나에 대한 숭배의 제스처는 미혼모 마돈나에 대한 갈채가 아니라 그걸 가능케 하는 물질적 권능에 대한 경배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미혼모’가 가부장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온전한 삶을 이룬 여성의 상징처럼 유통되지만, 그걸 이룰 수 있는 길이 ‘돈’밖에 없다는 자각은 페미니즘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뼈저린 확인이다. 그래서 진실로 자발적 미혼모를 꿈꾸는 여성에게 마돈나의 이미지는 자신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새삼 환기시켜줄 뿐이다. 마돈나는 긍극적으로 문화적 희망이 아니라 경제적 절망의 환유로 작동한다.

종종 슈퍼맨 흉내내서 다리에서 날아올랐다 제명 못 채운 초등학생 얘기가 신문에 나온다. 마돈나는 보통 여자들이 흉내내기는 아직 너무 멀리 있는 여자 슈퍼맨이다. 나는 마돈나가 페미니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의 탈을 쓴 미국 자본주의의 첨병처럼 보인다.

에서 문소리가 고등학생의 아이를 갖고 미혼모로 독립을 선언하는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변변한 직업도 없는 여자가 돈 잘 버는 변호사 차버리고 나가는 장면, 정말 멋있지 않은가? 그 다음에, 돈 벌러 나가고, 아이 낳고,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숨 막히는 현실이 없다면 말이다. 일찍이 YS가 통찰했듯, ‘겡제’는 중요하다. 경제는 개인의 몸도 변화시킨다. 이 영화의 후일담에 해당할 ‘바람났던 가족’에서 문소리의 육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라. 시간에 쓸리고 노동에 마모되면서 찌그러진 남루한 육체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은 이미 현재 속에 투영돼 있는 미래의 이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버린다. 이 영화는 여성의 몸에 클리토리스가 박혀 있다는 즉물적 사실을 거듭 환기시키지만, 여성의 몸이 경제 속에 포획돼 있다는 유장한 진실은 한 가닥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근과 클리토리스의 ‘쿨’한 교환은 있되, 남녀의 ‘핫’한 소통은 거세하고 출발한다. 이건 일종의 남성 판타지다. 즉, 사회경제적 권력관계의 외곽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평등에 대한 상상이다. 여기서 여성 상위는 여성이 능동적으로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체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자의 성적 노고를 덜어주는 체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침실 밖의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단지 남성의 노고를 덜어주는 도망노예의 주체성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숱한 여성의 성적 도발이 현실에 스며들지 못하고, 등 따스운 여자들을 위한 담론의 재료로 과장되거나, 무심한 남성들의 관음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성이 만드는 여성영화는 어떤 경로든 남성 판타지가 개입하는 것 같다. 혹자는 그걸 위선이라고 한다. 나는 그냥 부조리라고 부르고 싶다. 침묵하기 어색하고 말하면 불순물이 끼어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래도 말하는 게 낫지 않는가. 나는 그 부조리가 발전의 표식이라고 믿고 싶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