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보기에, 이것은 논쟁거리가 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개고기를 먹겠다는 사람들은,인육을 먹겠다고 하지 않았고,멸종위기의 동물을 먹겠다고 하지도 않았으며,타인의 애완견을 잡아다 먹겠다고 하지도 않았다.(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개고기 합법화에 동의하는 사람들은,우선 그 전원이 개고기를 먹는 사람인 것이 아니고,개를 특별히 열등한 동물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며,타인의 애완견을 잡아다 먹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개고기 합법화란, 결국 그 위생조건과 도축과정에마땅히 있어야 할 개선을 가져옴을 목적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개고기 소비자의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건강보건의 보장을 꾀하는 것이다. 개고기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것은,개고기의 섭취 자체를 죄악시하거나,혹은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은 건강도 아니라고 판단한다는의미일 것이다. 단순히 세계화적 조류, 혹은 국외의 시선을 이유로 한합법화 반대론자를 제외하고,애견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자들의 경우,타인의 섭취까지도 금지함을 희망할 정도로 개를 사랑하는자들이므로, 개조차 그토록 사랑함에 비추어 볼 때심지어 같은 인류의 일원의 건강을 그토록 사소히 생각한다는 것은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적어도 애견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자들의 경우에 한정지어 볼 때,그들은 개고기의 섭취 자체를 죄악시하는 인식에 기반하여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다른 맥락에서 반대론적 입장을 취하는 애견인 분, 혹은 여타 이견이 있는 분께서는 이의 제기 바란다.) 위에서,나는 개고기 소비를 반대함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는또 하나의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일단 배제한 바 있다.채식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이 그것이다.채식주의 역시 단순 취향, 혹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맥락에서이를 택할 수 있을 것이고,동물의 생존권 혹은 그 존엄성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이를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후자와 같은 맥락에서 채식주의를 채택한 사람이개고기 소비를 반대하고 그 합법화에 반대한다면,나는 그 사람의 일관성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이나기타 국제적 이목으로 인한 합법화 반대론에는나는 단순히 동의하지 않음을 넘어서서,그것을 반인격적 담론의 가능성마저 가진 성격의 것이라고규정하고자 한다.(물론 나의 규정이 그다지 영향력이 있지 않음은 주지하고 있다.)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은,결국 수없이 많은 종의 동물 가운데에개만을 특별한 존재로 부상시키는 성질의 것이다.또한 심지어는 인간과 동위의 존재로 바라보는 성향에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반인격적, 혹은 반생태적이며이 둘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인간과 동위에 개를 놓지는 않더라도,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 가운데에서 상위에 위치한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개인에 따라 가능한 일이다.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다.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자유에 의해서 보장되는 성질의 것이다.개를 인간과 동위의 존재로 보거나, 혹은 인간보다 상위에 위치한 존재로 본다 하여도그것이 개인의 판단으로만 존재하는 한, 그 판단은 자유이다.강요의 수준에 이르지 않은 주장으로 머무르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다만 그것을 타인의 권리 침해를 수반하면서현실적으로 발효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이다.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 특히 소, 돼지로 대표되는 가축에 대하여서는그 식육 행위를 비판하지 아니하면서 개고기 섭취만을 비판함은동물에 대한 엄연한 차별이다.물론 개인적으로는 동물에 대한 차별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는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최소한 개에 대하여 존엄성을 부여하는 수준의 동물 애호적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이는 마땅히 죄악시되어야만 그 일관성을 보장받는다고 판단된다.일관성이 결여된 판단을 하는 것 역시,개인의 판단으로만 존재한다면 이것은 자유이나, 이를현실적으로 발효하고자 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함에서문제성이 도출된다. 채식주의에 기반한 개고기 합법화 반대론에 대하여서는나는 그 일관성을 인정한다고 평한 바 있다.(물론 나의 인정이 그다지 영향력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다만 그것은 합법화에 대하여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 수준의정당성을 가져온다고 하겠다.개고기 합법화로 보장될,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과더 나아가 보다 나아질 식용견의 도축 환경이라는 그 개선점까지억제하거나 불능화할 권리는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채식주의에 기반한 반대론과 외형상 유사하나그 논리성과 정당성을 대단히 결여하고 있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먹을 것이 많은데, 굳이 개고기마저 먹으려 하는 탐욕"에 대한비판적 논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형성되었으리라 본다.첫째로는, '일반적인 탐욕에 대한 경계'의 자세에서 그리하였거나,아니라면 '생태순환적 지구환경에 대한 애착'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전자일 경우, 이는 역시 개고기와 다른 가축의 고기 간에도덕적인 차별의 선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차별적이다.(이것이 개인의 판단 내에 존재하거나, 혹은 타인에 대한 강요가 아닌 수준에서의 주장으로 존재할 경우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위에서 이미 하였다.)다만 위에서 논한 유사한 논변과 맥락을 같이하여,이것을 개고기 합법화 반대 및 이의 강요, 혹은 개고기 소비자에 대한모욕적 언사 등의 실제적 표현의 정당성을 담보할 논거로삼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겠다. 후자일 경우, 이는 의도적인 악의성이라기보다는약간의 논리성 결여와 함께, 관심사에 대한 심층적 탐구의 부족에기인한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나 역시 생태주의적 입장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역시 심층적 탐구를 충분히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사실관계에 합치하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할 뿐이다.) 개고기의 생산과 소비는, 쇠고기의 생산과 소비에 비하여생태순환적 지구환경에 오히려 친화적이라 할 것이다.취향상 개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나로서도, 그 생태주의적입장에의 긍정적 태도로 인하여, 개고기 소비의 '생태적 장점'은인정하고 있다.(물론 좀 더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로써,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결정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 현재까지는 이것은 옳은 주장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특히 쇠고기의 생산 실태를 볼 때 그러하다.)쇠고기 생산을 위하여, 전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상당분과엄청난 양의 물이 소비된다. 이는 지구 생태계의 순환에의 악영향 못지않게제 3세계를 중심으로 한 빈곤과 기아 현황에 있어서자연스럽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한 맥락에서,혹 생태주의적 맥락에서 개고기 합법화를 반대하는 분들은나와 같이 육식에 있어서 그 양과 빈도의 절감을 지향하시거나,아니면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보다 엄격한 길을 걸으시면 될 일이다. 또한, 개고기 합법화 반대에 대한 반대론자 혹은 합법화 찬성론자가즐겨 사용하는 반론의 논거로서"소, 돼지 역시 불쌍하지 아니한가" 는 식의반-동물차별론적 논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물론, 단순히 취향상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이자신의 합리화를 위하여 내세우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실제로 그런 맥락에서 저러한 논리를 내세우는 합법화 찬성론자가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상당히 논리성을 결여한 이 개고기 논란의 맥락에 있어서,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찬성론자의 반론은 그 논리성 결여, 혹은아전인수적 태도의 의혹으로 인하여 비판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선 합법화 찬성론자 중, 개고기를 섭취하는 소비자의 경우적어도 식용으로 사육하는 개에 한해서는개와 여타 가축은 완전히, 혹은 거의 동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그것이 그들의 인식 내에 엄연한 사실이므로, 이것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부정될 수 있다거나, 아니면 타인에게 이에 대한 동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등의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은 그러한 인식은 전혀 문제성이 없다.또한 그러한 인식은, 모든 동물에 대한 그 권익에의 인식을최소한 차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음에서, 그 일관성 역시담보하고 있다. 또한 개고기를 섭취하지는 않으나, 개고기 소비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혹은 건강권을 현실적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입장에서,혹은 최소한 식용견에 한해서는 여타 가축과 개를 차별하지 않는인식에 기반하여 개고기 합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경우,그들은 그 논리성에 대하여 합법화 반대론자들에게비판받을 타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우선 그들은 실제로 식용견과 여타 가축 간의 차별을일관성을 결여한 감성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따라서 개인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자유이되이를 강제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야만시하는 것은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인식하고 있으므로이러한 논변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여타 비-인간 동물에 대한 개의 우월성 혹은 우위성을 주장하는일부 애견주의적 합법화 반대론자들의 비논리성에 비하면그들이 설령 실수 혹은 의도적으로 범할 수 있는 논리성의 결여,혹은 아전인수적 논변은 그 부당성을 조각받기에 충분하다.(본인은 취향상 개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개고기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 중 1인인데, 본인은 실제로 개와 여타 가축을 굳이 차별함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애완견의 경우, 적어도 이를 기르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양자는 엄연히 다른 위치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식용견에 있어서까지, 또한 설령 애완견으로 주로 사육되는 견종에 있어서라고 하여도 절도 등의 방식이 아닌 정당한 방식으로 획득하여 도축하는 개고기 소비자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이제까지의 검토의 결과에 한하여서는,개고기 합법화는 정당하다고 나는 판단한다.우선 수많은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을 위함이요,둘째로 반대론적 논변에는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음에 인함이요,마지막으로 이것이 오히려 개라는 생명체의권익 보호에 소극적이게나마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개고기 합법화는 결국 개고기 도축과 유통 과정의 양지로의 포섭을 의미한다. 이는 불필요하게 잔혹한 도축을 감소시킬 수 있다.) 물론 개의 권익을 위함이라는 취지는 첫 번째 취지에 비하여그 중요성이 크지 않다고 할 것이다.(이러한 나의 판단에 대하여, 인간우월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개와 인간의 차별"만을 문제삼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개와 여타 동물을 차별하는 자가, 인간과 개의 차별을 비판할 자격은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합법화 반대론의 언뜻 뵈기에 강력한 논거가 아직 남아 있다.그것은 '국제 사회의 시선' 혹은 세계 기준에의 적응 논변이 그것이다.개인적으로는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지만,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 그러한 인식이 꽤 존재한다 한다.(개인적으로 달팽이를 한때 애완용으로 기르던 나로서는, 실소를 금치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논변에 근거하는 합법화 반대론자에게 묻고 싶은 바는,우선 문화의 상대성이란, 인육이 아닌 개고기 섭취를 금지하여야할 만큼 그 포섭 범위가 협소한 것일런지,또한 '외국인의 부정적 시선'이 과연 식용견을 주로 한 개고기섭취라는 현행 개고기 소비 관행을 제대로 인식한 외국인이이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인지,(실제로 상당수의, 개고기 섭취를 비판하는 외국인의 경우 한국인이 애완견을 무차별적으로 식용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고 그런 경우가 존재한다.)또 그것이 합법화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만큼 그 정도와분포 면에서 강력한 것인지,또한 한국이 꼭 그것을 따라야만 세계화 시대의 비-불량 국가로존재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가 그것이다. 과연 이러한 제 질문에 임하여,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개고기 합법화 반대를 주장할 수 있을 사람이 다수일지는나는 잘 알지 못한다.다만 그들의 반대론이나의 옛 친구 달팽이들을 삶아 포크로 찍어 먹는,거위의 부리에 호스를 밀어넣고 사료를 부어넣어 생산한푸아그라를 진미라고 먹는 그 선진국의 자가당착적 논변에그대로 동조한 것이 아닌, 그 분들의 주체적인 주장이었음을 기원할 뿐이다.("나의 옛 친구 달팽이"에 대한 언급은, 풍자를 위한 약간의 과장을 제외하고는 사실임을 밝혀 둔다. 또한, 혹여나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자께서 나에게 "달팽이 따위를 친구라고 논하며 달팽이 식용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망발이 아니냐" 식의 반론을 펼치실 리는 절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나의 졸렬하고 의미 없는 글은 이 정도로 해 두어야겠다.졸렬하다 함은 우선 나의 글이 실제로 졸렬하기 때문이요,의미 없다 함은 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가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사실 이것이 글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졸렬하기는 하다.) 그렇다. 사실 이 사안이, 글 첫머리에 논했듯이,최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려 노력한 결과로서의 논변을 바탕으로 한 논의를 글로써 다룰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고보지는 않는다. 인육도 아니요, 멸종위기 동물의 고기도 아니요,애견인의 애완견을 절도하여 도축한 고기도 아닌 개고기를,(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위생적이고 덜 잔혹한 방식으로 소비하게끔 하겠다는 것을,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논의해야 하는 현실 자체가 웃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글 같지 않은 글을 쓰느라플라톤을 놓고 키보드를 두드린 나라는 인간도썩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것 같다. A.D. 2008. 7. 16. 법파니 [덧붙이는 말]그리고 또한, 이번 계기를 통하여마치 내가 개고기 애호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은 것 역시색다른 경험인 것 같다.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취향상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이 사실이, "결국 당신도 감정적으로 개고기 섭취에 반대하지 않는가?" 라는 식의 개고기 합법화 반대론자를 위한 논거로 혹 사용될까 하는 노파심에 덧붙이는 말인데, 나는 인생의 반려자 혹은 여타 가축보다 우월한 동물로서의 개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감정'이 아닌, 단순히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뜻하는 '취향'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설령 내가 그러한 '감정적 편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개인의 감정적 편향으로 두는 것과,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을 부정하거나 그들을 야만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2
개고기 찬반따위가 논의대상인가?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것은 논쟁거리가 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개고기를 먹겠다는 사람들은,
인육을 먹겠다고 하지 않았고,
멸종위기의 동물을 먹겠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타인의 애완견을 잡아다 먹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개고기 합법화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 전원이 개고기를 먹는 사람인 것이 아니고,
개를 특별히 열등한 동물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며,
타인의 애완견을 잡아다 먹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개고기 합법화란, 결국 그 위생조건과 도축과정에
마땅히 있어야 할 개선을 가져옴을 목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개고기 소비자의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건강보건의 보장을 꾀하는 것이다.
개고기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것은,
개고기의 섭취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혹은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은 건강도 아니라고 판단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순히 세계화적 조류, 혹은 국외의 시선을 이유로 한
합법화 반대론자를 제외하고,
애견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자들의 경우,
타인의 섭취까지도 금지함을 희망할 정도로 개를 사랑하는
자들이므로, 개조차 그토록 사랑함에 비추어 볼 때
심지어 같은 인류의 일원의 건강을 그토록 사소히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애견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자들의 경우에 한정지어 볼 때,
그들은 개고기의 섭취 자체를 죄악시하는 인식에 기반하여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맥락에서 반대론적 입장을 취하는 애견인 분,
혹은 여타 이견이 있는 분께서는 이의 제기 바란다.)
위에서,
나는 개고기 소비를 반대함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일단 배제한 바 있다.
채식주의에 기반한 반대론이 그것이다.
채식주의 역시 단순 취향, 혹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맥락에서
이를 택할 수 있을 것이고,
동물의 생존권 혹은 그 존엄성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이를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후자와 같은 맥락에서 채식주의를 채택한 사람이
개고기 소비를 반대하고 그 합법화에 반대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일관성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이나
기타 국제적 이목으로 인한 합법화 반대론에는
나는 단순히 동의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그것을 반인격적 담론의 가능성마저 가진 성격의 것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물론 나의 규정이 그다지 영향력이 있지 않음은 주지하고 있다.)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은,
결국 수없이 많은 종의 동물 가운데에
개만을 특별한 존재로 부상시키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심지어는 인간과 동위의 존재로 바라보는 성향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반인격적, 혹은 반생태적이며
이 둘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인간과 동위에 개를 놓지는 않더라도,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 가운데에서 상위에 위치한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개인에 따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자유에 의해서 보장되는 성질의 것이다.
개를 인간과 동위의 존재로 보거나,
혹은 인간보다 상위에 위치한 존재로 본다 하여도
그것이 개인의 판단으로만 존재하는 한, 그 판단은 자유이다.
강요의 수준에 이르지 않은 주장으로 머무르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다만 그것을 타인의 권리 침해를 수반하면서
현실적으로 발효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이다.
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
특히 소, 돼지로 대표되는 가축에 대하여서는
그 식육 행위를 비판하지 아니하면서 개고기 섭취만을 비판함은
동물에 대한 엄연한 차별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동물에 대한 차별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개에 대하여 존엄성을 부여하는 수준의
동물 애호적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는 마땅히 죄악시되어야만 그 일관성을 보장받는다고 판단된다.
일관성이 결여된 판단을 하는 것 역시,
개인의 판단으로만 존재한다면 이것은 자유이나, 이를
현실적으로 발효하고자 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함에서
문제성이 도출된다.
채식주의에 기반한 개고기 합법화 반대론에 대하여서는
나는 그 일관성을 인정한다고 평한 바 있다.
(물론 나의 인정이 그다지 영향력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합법화에 대하여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 수준의
정당성을 가져온다고 하겠다.
개고기 합법화로 보장될,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과
더 나아가 보다 나아질 식용견의 도축 환경이라는 그 개선점까지
억제하거나 불능화할 권리는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채식주의에 기반한 반대론과 외형상 유사하나
그 논리성과 정당성을 대단히 결여하고 있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먹을 것이 많은데, 굳이 개고기마저 먹으려 하는 탐욕"에 대한
비판적 논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첫째로는, '일반적인 탐욕에 대한 경계'의 자세에서 그리하였거나,
아니라면 '생태순환적 지구환경에 대한 애착'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전자일 경우, 이는 역시 개고기와 다른 가축의 고기 간에
도덕적인 차별의 선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차별적이다.
(이것이 개인의 판단 내에 존재하거나, 혹은 타인에 대한
강요가 아닌 수준에서의 주장으로 존재할 경우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위에서 이미 하였다.)
다만 위에서 논한 유사한 논변과 맥락을 같이하여,
이것을 개고기 합법화 반대 및 이의 강요, 혹은 개고기 소비자에 대한
모욕적 언사 등의 실제적 표현의 정당성을 담보할 논거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겠다.
후자일 경우, 이는 의도적인 악의성이라기보다는
약간의 논리성 결여와 함께, 관심사에 대한 심층적 탐구의 부족에
기인한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나 역시 생태주의적 입장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역시
심층적 탐구를 충분히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사실관계에 합치하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할 뿐이다.)
개고기의 생산과 소비는, 쇠고기의 생산과 소비에 비하여
생태순환적 지구환경에 오히려 친화적이라 할 것이다.
취향상 개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나로서도, 그 생태주의적
입장에의 긍정적 태도로 인하여, 개고기 소비의 '생태적 장점'은
인정하고 있다.
(물론 좀 더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로써,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결정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 현재까지는
이것은 옳은 주장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특히 쇠고기의
생산 실태를 볼 때 그러하다.)
쇠고기 생산을 위하여, 전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상당분과
엄청난 양의 물이 소비된다.
이는 지구 생태계의 순환에의 악영향 못지않게
제 3세계를 중심으로 한 빈곤과 기아 현황에 있어서
자연스럽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한 맥락에서,
혹 생태주의적 맥락에서 개고기 합법화를 반대하는 분들은
나와 같이 육식에 있어서 그 양과 빈도의 절감을 지향하시거나,
아니면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보다 엄격한 길을 걸으시면 될 일이다.
또한, 개고기 합법화 반대에 대한 반대론자 혹은 합법화 찬성론자가
즐겨 사용하는 반론의 논거로서
"소, 돼지 역시 불쌍하지 아니한가" 는 식의
반-동물차별론적 논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물론, 단순히 취향상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이
자신의 합리화를 위하여 내세우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맥락에서 저러한 논리를 내세우는 합법화 찬성론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상당히 논리성을 결여한 이 개고기 논란의 맥락에 있어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찬성론자의 반론은 그 논리성 결여, 혹은
아전인수적 태도의 의혹으로 인하여 비판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선 합법화 찬성론자 중, 개고기를 섭취하는 소비자의 경우
적어도 식용으로 사육하는 개에 한해서는
개와 여타 가축은 완전히, 혹은 거의 동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인식 내에 엄연한 사실이므로,
이것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부정될 수 있다거나,
아니면 타인에게 이에 대한 동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등의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은 그러한 인식은 전혀 문제성이 없다.
또한 그러한 인식은, 모든 동물에 대한 그 권익에의 인식을
최소한 차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음에서, 그 일관성 역시
담보하고 있다.
또한 개고기를 섭취하지는 않으나,
개고기 소비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혹은 건강권을 현실적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혹은 최소한 식용견에 한해서는 여타 가축과 개를 차별하지 않는
인식에 기반하여 개고기 합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그 논리성에 대하여 합법화 반대론자들에게
비판받을 타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선 그들은 실제로 식용견과 여타 가축 간의 차별을
일관성을 결여한 감성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자유이되
이를 강제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야만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인식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논변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여타 비-인간 동물에 대한 개의 우월성 혹은 우위성을 주장하는
일부 애견주의적 합법화 반대론자들의 비논리성에 비하면
그들이 설령 실수 혹은 의도적으로 범할 수 있는 논리성의 결여,
혹은 아전인수적 논변은 그 부당성을 조각받기에 충분하다.
(본인은 취향상 개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개고기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 중 1인인데, 본인은 실제로 개와 여타 가축을 굳이 차별함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애완견의 경우, 적어도 이를 기르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양자는 엄연히 다른 위치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식용견에 있어서까지, 또한 설령 애완견으로 주로
사육되는 견종에 있어서라고 하여도 절도 등의 방식이 아닌
정당한 방식으로 획득하여 도축하는 개고기 소비자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이제까지의 검토의 결과에 한하여서는,
개고기 합법화는 정당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우선 수많은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을 위함이요,
둘째로 반대론적 논변에는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음에 인함이요,
마지막으로 이것이 오히려 개라는 생명체의
권익 보호에 소극적이게나마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개고기 합법화는 결국 개고기 도축과 유통 과정의
양지로의 포섭을 의미한다. 이는 불필요하게 잔혹한
도축을 감소시킬 수 있다.)
물론 개의 권익을 위함이라는 취지는 첫 번째 취지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크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판단에 대하여,
인간우월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개와 인간의 차별"만을 문제삼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개와 여타 동물을 차별하는 자가,
인간과 개의 차별을 비판할 자격은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합법화 반대론의 언뜻 뵈기에 강력한 논거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국제 사회의 시선' 혹은 세계 기준에의 적응 논변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 그러한 인식이 꽤 존재한다 한다.
(개인적으로 달팽이를 한때 애완용으로 기르던 나로서는,
실소를 금치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논변에 근거하는 합법화 반대론자에게 묻고 싶은 바는,
우선 문화의 상대성이란, 인육이 아닌 개고기 섭취를 금지하여야
할 만큼 그 포섭 범위가 협소한 것일런지,
또한 '외국인의 부정적 시선'이 과연 식용견을 주로 한 개고기
섭취라는 현행 개고기 소비 관행을 제대로 인식한 외국인이
이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인지,
(실제로 상당수의, 개고기 섭취를 비판하는 외국인의 경우
한국인이 애완견을 무차별적으로 식용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고
그런 경우가 존재한다.)
또 그것이 합법화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만큼 그 정도와
분포 면에서 강력한 것인지,
또한 한국이 꼭 그것을 따라야만 세계화 시대의 비-불량 국가로
존재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가 그것이다.
과연 이러한 제 질문에 임하여,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개고기 합법화 반대를 주장할 수 있을 사람이 다수일지는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반대론이
나의 옛 친구 달팽이들을 삶아 포크로 찍어 먹는,
거위의 부리에 호스를 밀어넣고 사료를 부어넣어 생산한
푸아그라를 진미라고 먹는 그 선진국의 자가당착적 논변에
그대로 동조한 것이 아닌,
그 분들의 주체적인 주장이었음을 기원할 뿐이다.
("나의 옛 친구 달팽이"에 대한 언급은,
풍자를 위한 약간의 과장을 제외하고는 사실임을 밝혀 둔다.
또한,
혹여나 애견주의에 입각한 합법화 반대론자께서
나에게 "달팽이 따위를 친구라고 논하며 달팽이 식용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망발이 아니냐"
식의 반론을 펼치실 리는 절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나의 졸렬하고 의미 없는 글은 이 정도로 해 두어야겠다.
졸렬하다 함은 우선 나의 글이 실제로 졸렬하기 때문이요,
의미 없다 함은 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글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졸렬하기는 하다.)
그렇다. 사실 이 사안이, 글 첫머리에 논했듯이,
최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려 노력한 결과로서의 논변을
바탕으로 한 논의를 글로써 다룰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인육도 아니요, 멸종위기 동물의 고기도 아니요,
애견인의 애완견을 절도하여 도축한 고기도 아닌 개고기를,
(일부 예외적 인물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위생적이고 덜 잔혹한 방식으로 소비하게끔 하겠다는 것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논의해야 하는 현실 자체가 웃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글 같지 않은 글을 쓰느라
플라톤을 놓고 키보드를 두드린 나라는 인간도
썩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것 같다.
A.D. 2008. 7. 16. 법파니
[덧붙이는 말]
그리고 또한, 이번 계기를 통하여
마치 내가 개고기 애호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은 것 역시
색다른 경험인 것 같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취향상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사실이,
"결국 당신도 감정적으로 개고기 섭취에 반대하지 않는가?"
라는 식의 개고기 합법화 반대론자를 위한 논거로 혹 사용될까 하는
노파심에 덧붙이는 말인데,
나는 인생의 반려자 혹은 여타 가축보다 우월한 동물로서의
개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감정'이 아닌,
단순히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뜻하는 '취향'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설령 내가 그러한 '감정적 편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개인의 감정적 편향으로 두는 것과, 개고기 소비자의
건강권을 부정하거나 그들을 야만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