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숙주

김명일200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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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숙주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중 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온 레베카. 희귀질환 전문 진단의인 닥터 하우스는 뇌혈관염으로 의심하고 치료를 하는데, 증상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한다. 레베카의 증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자, 하우스와 그의 휘하 세명의 의사들은 각종 검사들을 통해 레베카의 병명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고, 레베카는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환자의 권리를 서슴없이 침해하는 하우스 박사는 급기야 휘하 의사들에게 레베카의 집에 무단침입하여 원인을 알아오라고 종용하고, 결국 레베카의 집에 들어간 의사들은 그녀의 병인을 밝혀낸다. 그녀의 발작의 원인은 촌충이라는 기생충의 유충이 뇌로 들어가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 그리고 촌충은 덜 익힌 돼지고기 햄을 통해 체내로 유입된 것이었다. 결국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한 증세를 보였던 레베카에게 내려진 치료법은 ‘구충제 두 알’이었다.

- 닥터 하우스, 시즌 1의 에피소드 중에서


기생충에 대한 에피소드를 접하니 대학 시절 동물해부학 실습 시간에 했던 회충 해부가 기억나네요. 해부 접시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던 하얀색 전깃줄같은 회충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대학 이후, 많은 동물들을 해부했지만 유독 회충 해부가 기억에 남는 것은 배를 갈랐을 때, 내부에서 보이는 너무도 단순한 모습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약 30cm 길이의 반질반질한 회충-회충과 같은 기생충들은 소화액에 의해 소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표면이 보호제로 코팅되어 있답니다-의 몸 속에는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한줄로 이어진 소화관을 제외하고는 온통 꼬불꼬불한 실 같은 조직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 것이 바로 생식기관이었습니다. 즉, 회충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에너지를 오로지 생식에만 쏟아붓는, 그야말로 ‘존속하라, 그리고 번성하라’는 유전자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생물이었던 것입니다.

생물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에너지를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들과 엽록체를 가진 미생물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햇빛을 연료로 사용하여 주변 환경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와 주변의 물을 가지고 포도당을 합성해서 살아갑니다.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 과정을 광합성(光合成)이라고 하는데, 식물들은 광합성 과정 중에 덤으로 우리가 숨쉬는데 필요한 산소까지 만들어내는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는 생물들이 다른 생물들을 섭취하여 이를 ‘소화’라는 과정을 통해 잘게 쪼개어 에너지원으로 이용합니다. 모든 동물들과 많은 미생물, 심지어는 일부 식물도 이에 속하죠.

여기 메뚜기가 있습니다. 이 녀석은 하루종일 풀밭에서 풀잎을 갉아먹는 것이 일입니다. 메뚜기가 풀잎 다섯 장을 갉아먹는다는 것은, 풀잎 다섯장 분의 광합성 저장 에너지를 먹어치우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이 메뚜기 다섯 마리를 개구리 한 마리가 잡아먹으면 개구리는 (풀잎 다섯 장 X 메뚜기 다섯 마리), 즉 풀잎 25장 분의 광합성 에너지를 먹어치우는 것이 되지요. 이처럼 초식동물이건 육식동물이건 모든 동물은 그 에너지를 식물에 의존합니다. 생물학 시간에 배웠던 먹이 피라미드에서 식물을 생산자, 동물이 소비자로 표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다른 생물들이 만들어낸 에너지를 말 그대로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입니다. 동물이 다른 동식물을 잡아먹는 것은 그래도 ‘소화’ 과정이라도 거치지만, 이 경우에는 소화 과정도 없이 다른 생물들이 흡수하기 좋게 잘라놓은 영양분들을 말 그대로 ‘손도 안대로 낼름’ 가로채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회충을 비롯해 하우스의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촌충과 십이지장충, 요충, 사상충 등 다양한 기생충들이 대표적인 생물들이죠.


기생충은 말 그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기생 대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생충이 빌붙어 사는 생물을 숙주라고 하는데, 기생충에게 있어 숙주란 에너지 공급원이자 거주 공간이며, 환경 전체랍니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는 매우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숙주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주는 것 없이 찰싹 달라붙어서는 귀중하게 얻은 영양분을 뺏어가기만 하니까요. 따라서 숙주의 입장에서는 기생충을 없애버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생충을 공격하는 면역 세포들을 발달시키기 마련입니다.

반면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숙주가 자기를 구박하건 말건 무조건 숙주에게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의 소화효소에 저항하는 물질로 온몸을 코팅하고, 숙주의 면역세포들의 공격을 피하게끔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는 기술을 발달시켰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방어합니다.

이 경쟁 과정에서 숙주와 기생충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합니다. 매트 리들리는 진화론에 대한 그의 책 『붉은 여왕』을 통해 숙주와 기생충의 끊임없는 경쟁관계가 생물의 진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지목하기도 했답니다.

기생충과 숙주의 경쟁 관계에 대한 설명이 바로 ‘붉은 여왕 이론’입니다. 붉은 여왕 이론(The Red Queen Theory)은 진화의 원동력을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인데, 이 명칭은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 앨리스’에 등장하는 ‘하트의 붉은 여왕’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서는 항상 ‘저 놈의 목을 잘라라!’라고 소리치던 무서운 얼굴의 여왕으로 등장했었지요. 소설 속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땅이 끊임없이 뒤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조차 항상 뛰어야 한답니다.

매트 리들리는 붉은 여왕의 영토의 특성을 기생충과 숙주의 경쟁관계에 빗대어 설명했는데, 기생충과 숙주는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 즉, 생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데, 이렇게 경쟁을 통한 변화 과정을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것이죠.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는 다분히 일방적입니다. 숙주는 기생충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생충은 숙주의 영양분을 뺏어먹으면서도 그 정도를 조절합니다. 다시 말해 기생충은 숙주에게서 ‘빼앗아도 괜찮을 정도의 양’만 가로채는 중용의 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기생충이 숙주의 영양분을 모조리 빼앗아 먹는다면 지금 당장은 배부를지 모르지만, 숙주는 죽어버릴 테고 숙주가 죽으면 그 숙주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 역시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숙주의 영양분을 가로채 영양실조는 일으킬지언정 숙주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 속에 회충이 산다면, 먹는 것의 일부를 회충에게 빼앗기기 때문에 몸이 허약해지기는 해도 이로 인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숙주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기생충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간충의 한 종류는 유충 때는 곤충의 몸 속에서 살지만, 성충이 되기 위해서는 새의 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곤충에게서 새의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곤충의 몸에서 독립해서 새를 찾아갈까요? 하지만 이렇게 독립적이라면 이미 기생충으로서의 본분을 잃은 것이죠.

대신 간충은 아주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유충 시절에는 곤충의 몸 속에서 개미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살던 간충은 성충이 될 시기가 다가오면 곤충의 뇌 속으로 이동하여 곤충의 행동을 제어합니다. 간충에게 뇌를 침범당한 곤충은 이때부터 간충의 좀비가 되는데, 간충은 이 곤충을 풀잎 제일 꼭대기로 기어올라가 ‘날 잡아잡수~’하는 상태로 가만히 있도록 만듭니다. 즉, 새가 사냥하기 쉽도록 지금까지 기대어 살던 곤충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제물로 바친 곤충을 새가 잡아먹으면 다시 새의 몸 속으로 들어가 성충으로 변한답니다. 곤충의 몸에 기생하는 것도 모자라, 결국 곤충을 제물로 삼는 간충. 때로 번식하고자 하는 유전자의 이기심은 섬찟할 정도랍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맨 처음의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기생충은 촌충(寸蟲), 그 중에서도 갈고리촌충입니다. 촌충은 1mm 정도의 작은 것부터 15m 이상의 거대한 것까지 그 종류가 다양한데, 사람을 비롯한 척추동물의 간이나 소화관에 기생하여 살아갑니다.

숙주의 몸 속으로 들어온 촌충은 빨판과 갈고리를 사용해 숙주의 몸에 단단히 달라붙은 뒤, 온몸을 덮고 있는 큐티클층을 통해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즉, 촌충의 경우는 입이나 소화관도 없이 몸 전체가 마치 창자처럼 기능하지요. 갈고리촌충은 돼지의 살 속에 숨어 살다가 인간에게 전파되는데, 돼지고기를 완전히 익히지 않고 먹는 경우, 갈고리촌충에 감염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우스’ 에피소드에서 레베카는 덜 익힌 햄 요리를 통해 갈고리촌충에 감염되었지요.

보통의 촌충은 소화관이나 간에서 영양분만을 뺏어 사는데, 드물게는 촌충의 알이 혈관을 타고 뇌로 들어가 거기서 부화하여 자리를 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낭미충증(촌충의 유충을 낭미충이라고 하거든요)이라고 하는데, 뇌로 들어간 낭미충은 자리잡은 범위에 따라서 경련, 뇌염, 동공이상, 안면마비, 간질, 뇌경색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레베카의 경우에도 낭미충이 뇌 속으로 침범하여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죠. 촌충 외에도 민물고기로 인해 감염되는 디스토마류도 뇌로 들어가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답니다.
낭미충의 치료는 구충제를 복용하거나, 직접 외과적 수술을 통해 하나씩 잡아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머릿속에 기생충이 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돼지고기나 민물고기는 반드시 완전히 익혀 먹으며, 흙을 만진 뒤에는 피부를 깨끗이 씻고, 정기적으로 구충제를 먹는 것만으로도 거의 완벽하게 막을 수 있지요.

요즘 나오는 구충제는 플루벤다졸과 알벤다졸 성분이 많은데, 이들 제품은 한 알만 먹어도 높은 구충 효과를 보여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플루벤다졸이나 알벤다졸은 기생충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당(glucose)의 대사를 억제시켜 기생충을 굶겨 죽이는 방식으로 구충 효과를 보입니다.

원래 살아 있는 기생충은 인간의 소화관 내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큐티클 층으로 덮여 있지만, 죽은 기생충은 큐티클 층을 유지할 수 없어, 기생충의 사체는 소화액이나 효소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지요. 한마디로 구충제를 먹게 되면 기생충을 굶겨 죽인 뒤, 이를 녹여서 다시 인간이 흡수하거나 배설물과 함께 배출시키는 것이죠. 인간의 몸에 붙어서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던 기생충을 죽인 뒤 녹여서 다시 흡수한다니.. 어찌 보면 구충제의 원리는 그동안 기생충에게 당하고 살던 인간들의 소심한(?) 복수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위생상태의 개선과 분변을 그대로 거름으로 쓰던 농업방식이 사라지면서 기생충 감염률은 극적으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기농 혹은 자연주의 농법의 재등장으로 기생충 감염 위험이 다시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정기적으로 구충제를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답니다. 한 알의 구충제가 때로는 삶의 질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