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공대생 우여니 은수와 만나 원나잇 스탠드에 이르는 연하의 꽃청년
남유준 | 김영재
31세, 학원강사
남유희 | 문정희
31세, 대기업 대리 -> 뮤지컬 배우
하재인 | 진재영
31세, 주얼리 디자이너 -> 이혼녀
스무살엔, 서른살이 넘으면 모든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 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 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피차의 과거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이는 이래서 위험한가 보다. 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덕대는 건. '잘난 척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안다'는 오만한 자세로 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대 후반을 지나오면서부터 종종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어'라는 탄식을 뱉어내게 되곤 한다.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이미 다 꿰뚫어버린것 같지만, 실상 곰곰이 따져보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겪어 낸 것은 별로 없다.
아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자기는 나를, 왜 사랑해요?"
나를 왜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태오는 나의 사랑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의미인가. 발을 헛디뎌 막막한 우주와 연결된 맨홀 속에 빠진 느낌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태오를 왜 사랑하느냐고. 아니, 태오를 사랑하기는 하느냐고. 아니, 아니, 사랑이 무엇이냐고.
검색창에 '사랑'을 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 '특히 미움의 대립 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원적인 생명원리로는 그러한 것도 포괄한다. 사랑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또 교제 형태에서 여러 양상을 취한다.' 미움까지 포괄하는 사랑이라니. 반복해서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미궁이 더욱 깊어만 진다.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나만은 다를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차고 깊어보인다.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 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문자 메세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 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 때 더 없이 유용하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인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떤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까마득했다.
친밀하지 않은 사이의 이성에게 문자를 보낼때는 일단 자연스럽고 쿨해 보이는게 중요했다.
그리고 자연스런 답장을 유도하기 위해 마지막 문장은 반드시 의문문으로 하는것이 좋다.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그렇다면 바로 저기, 그림자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 서울은 어쩌면 거대한 그림자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내가 이 그림자도시 귀퉁이에 빛 없이 숨어 사는 한 뼘 그림자인 것처럼.
농담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유희도 깃털처럼 가벼운 한숨을 내 쉬었다. 밤의 자유로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차창 밖으로 완벽한 어둠이 뭉텅뭉텅 지나갔다. 우리들의 어깨도 수상하게 따라 흔들렸다. 길들이 흘러가 닿는 곳이 어디인지 꼭 알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채 살아가고 싶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처럼 가슴이 훅훅 타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리속에 엄지손톱만 한 꿀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 멈추지 않고 잉잉거리는 느낌이다. 언젠가 그는 '나를 왜 사랑해요?'라고 물었었지.
이젠 내가 물을 차례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짧은 시간이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여도, 혹은 가로저어도 남는 것은 쓰디쓴 자책뿐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
달콤한 나의 도시
달.콤.시로 매주 금요일이 완전 즐거웠던 ...
오은수 | 최강희
31세, 편집 대행사 대리
어딜 내놔도 튀지 않는 '회색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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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친환경유기농 업체 CEO
영수는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이 지나치게 '평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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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공대생
우여니 은수와 만나 원나잇 스탠드에 이르는 연하의 꽃청년
남유준 | 김영재
31세, 학원강사
남유희 | 문정희
31세, 대기업 대리 -> 뮤지컬 배우
하재인 | 진재영
31세, 주얼리 디자이너 -> 이혼녀
스무살엔, 서른살이 넘으면 모든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 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 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피차의 과거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이는 이래서 위험한가 보다. 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덕대는 건. '잘난 척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안다'는 오만한 자세로 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대 후반을 지나오면서부터 종종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어'라는 탄식을 뱉어내게 되곤 한다.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이미 다 꿰뚫어버린것 같지만, 실상 곰곰이 따져보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겪어 낸 것은 별로 없다.
아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자기는 나를, 왜 사랑해요?"
나를 왜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태오는 나의 사랑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의미인가. 발을 헛디뎌 막막한 우주와 연결된 맨홀 속에 빠진 느낌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태오를 왜 사랑하느냐고. 아니, 태오를 사랑하기는 하느냐고. 아니, 아니, 사랑이 무엇이냐고.
검색창에 '사랑'을 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 '특히 미움의 대립 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원적인 생명원리로는 그러한 것도 포괄한다. 사랑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또 교제 형태에서 여러 양상을 취한다.' 미움까지 포괄하는 사랑이라니. 반복해서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미궁이 더욱 깊어만 진다.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나만은 다를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차고 깊어보인다.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 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문자 메세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 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 때 더 없이 유용하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인간의 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떤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까마득했다.
친밀하지 않은 사이의 이성에게 문자를 보낼때는 일단 자연스럽고 쿨해 보이는게 중요했다.
그리고 자연스런 답장을 유도하기 위해 마지막 문장은 반드시 의문문으로 하는것이 좋다.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그렇다면 바로 저기, 그림자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 서울은 어쩌면 거대한 그림자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내가 이 그림자도시 귀퉁이에 빛 없이 숨어 사는 한 뼘 그림자인 것처럼.
농담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유희도 깃털처럼 가벼운 한숨을 내 쉬었다. 밤의 자유로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차창 밖으로 완벽한 어둠이 뭉텅뭉텅 지나갔다. 우리들의 어깨도 수상하게 따라 흔들렸다. 길들이 흘러가 닿는 곳이 어디인지 꼭 알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채 살아가고 싶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처럼 가슴이 훅훅 타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리속에 엄지손톱만 한 꿀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 멈추지 않고 잉잉거리는 느낌이다. 언젠가 그는 '나를 왜 사랑해요?'라고 물었었지.
이젠 내가 물을 차례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짧은 시간이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여도, 혹은 가로저어도 남는 것은 쓰디쓴 자책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