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일이었다. 꽤 추운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할아버지 제사가 있었기에 천안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큰집이 있는 서울을 가기 위해서 고속버스를 탔다. 피곤한 탓인지 버스에서 깊게 잠을 잤던 나는 터미널에 내려서 시간이 많이 지체됨을 느끼고는, 급히 서둘러 큰집을 향하는 시내버스를 탔다. 여러 생각에 잠겨 이 거리 저 거리를 지나치는 동안 문득 낯선 공간을 달리고 있는 날 인지하게 되었다. 역시 생각대로 버스는 목적지를 향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 날 내리고는 서둘러 떠나는 버스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버스 같으니..서울이 다 그렇지..’ 작디작은 서울에 이곳이 그 어디이긴 하겠으나,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저녁의 풍경은 휑했고, 인적조차 드물었다. 건물의 환한 불빛과 거리의 네온사인은 내 눈을 영롱하게 비추는데도,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그곳을 그렇게 몇 분간 해매였다. 추운 겨울날 난 왜 이런 곳에 홀로 떨어진 건가. 이곳은 어디인가. 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당시의 오묘한 느낌을 기억한다. 겁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몇 분간 거리를 걸으며 낯선 곳이 주는 극도의 이질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다른 버스를 타기까지 단 몇 분이었지만, 난 내가 낯선 곳을 떠도는 방랑자가 된 느낌이었다. ‘이것이 여유구나.’ 그 당시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과 유달리 힘들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힘겨웠던 나는 그 순간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조각난 여유를 그리워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의도하지 않은 공간에서 내 의지와는 다른 흥겨움 이었다.
황석영 원작 '삼포 가는 길'을 원작으로 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의 소설에는 유달리 낯선 곳을 헤매는 방랑자가 많다. 특히 <삼포 가는 길>이라는 중편 소설에는 떠도는 이들의 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정서가 존재한다. 정처 없이 떠돌며 공사판을 찾는 막벌이 노동꾼 ‘정씨’와 젊은 노동자 ‘영달’, 그리고 접대부 ‘백화’가 눈 덮인 황량한 벌판을 지나 정씨의 고향 삼포로 가면서 겪는 인생의 애환을 그린다. 방랑자란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에게 고향은 저고리 안쪽 주머니의 쌈짓돈처럼 나락에 몰렸을 때를 위한 보루와 같다. 낯선 곳에 정을 뿌리고, 돈을 뿌리고, 사람을 향해 떠돌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기에 정착할 곳은 없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들이 떠돌며 사는 이유는 이질감이 주는 기대감에 있다. 그건 내가 느꼈던 그날의 흥겨움처럼 아득한 매력을 가진다.
낯선 곳에서 방랑자는 방관자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안식을 훔쳐 달아난다. 이 소설 속 세 사람은 기나긴 여정 속에 자신이 버렸던 것과 현재 어깨에 짊어진 것에 대한 대화를 한다. 지나온 세월이 주는 의미를 애써 태연히 버리려 한다. 사랑했던 여인과 멋진 풍경의 마을도 모두 저 멀리 한 숨의 입김으로 날려 버린다. 소설의 구수한 대화들은 고향을 잃은 방랑자들의 고독을 잘 그리고 있다. 내가 있을 뿐 다른 이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사고는 가슴이 시리다. 더 이상의 여정은 마치고, 인생의 체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 세 사람은 고향을 찾아 삼포로 가고 있다. 삼포는 그들이 정착해야 할 유일한 공간이다. <삼포 가는 길>에는 그렇게 여정의 마지막이 있다. 이질감을 뒤로 한 인생의 후반부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삼포가 결국엔 개발에 의한 변질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또 다른 절망을 한다. 내가 느껴던 신선한 이질감과는 반대로 낯선 곳의 생활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향을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원한 떠돌이가 된 세사람은 이제 영원한 안식을 갈망한다.
작가 황석영.
안식을 하는 자에겐 일탈에 대한 갈망이 가득하고, 떠도는 자에겐 안식을 위한 모든 것을 갈망한다. 세상은 그렇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람이 안식을 찾는 이유는 소설 속 그들처럼 방랑을 하기 위한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공무원의 철밥통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이 광고카피는 우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절묘하다. 우리 내 사람들이 힘든 일을 하며 안식처를 찾기 위한 이유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있어야 우리는 저 먼 바다로 떠날 수 있다. 그것이 단 며칠일 지라도 매년 그것을 그리워한다. 내 집을 마련해야 진정한 일탈의 용기를 가지며, 지금도 살기 뻑뻑한데 굳이 적금을 부어야 노후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삶의 태도에 혹자는 용기 없는 패배자들의 선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본능이라 말하고 싶다.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려는 본능 말이다. 모든 생물이 씨를 뿌리고, 살기 위한 환경을 갈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삼포 가는 길>의 세 사람은 고향이 있기에 먼 길을 떠날 수 있었고, 결국 고향이 사라져버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복잡한 삶 속의 우리들이 느끼는 현실의 개혁에 대한 무서움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들에게 고향은 삶의 안정의 유일한 도구였다. 집도 절도 없어도 기댈 수 있는 안식이었다. 그것이 사라진 순간 느껴지는 이 시대의 공허함에 대해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죽음에 가깝게 가고 있다는 삶의 불안과 현대 사회의 개혁과 개발에 대란 허무함에 대한 시대의 짊까지. 정치적 개혁과 사상의 절단이 주는 두려움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으슬으슬대는 오한이다. 작가 ‘황석영’은 안정이 사라진 이 시대의 개혁정신에 대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생각을 깊게 해보면 그것이 정답일 수 있다. 시대를 위한 진보란 일상에 매스를 들이미는 개혁이 아닌 삶의 여유 속에 나오는 흥쾌히 꺼내 줄 수 있는 쌈짓돈이어야 한다.
영화 오래된 정원.
황석영의 다른 소설 <오래된 정원>은 젊음을 바쳐 추구하려 했던 자신의 사상이 절단되어진 세상을 마주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서 확인한 것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세상의 이질감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죽고, 자신 없이 큰 딸은 자신이 거부했던 세상 속에서 존재한다. 그 이질감이란 낯선 곳에 떨어져버린 방랑자의 상징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매력적인 이질감의 뒷편이다. 의도하지 않은 공간에 홀로 떨어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 잡아야 한다. 그저 미디어와 보이지 않는 손이 주는 정보에 의지한 구속된 자유라 할지라도 삶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어떤 이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 말하겠지. 랭보의 아름다운 시도 애초부터 속박된 검열 속에 나왔다나? 랭보에게 훗날의 죽음을 가져온 단초가 그 자유였기에,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자신을 안식하기위해 오늘도 정해진 루트에 묶인 삶에 만족할 뿐이다.
진정한 자유란 검열과 속박 속에 나오는 조그마한 이질감일 뿐이다. 의도하지 않은 여유시간에 맛보는 맛있는 공기의 상쾌함이다. 시청 앞을 가득 매운 진보와 보수의 물결 속에는 안식과 일탈의 욕구가 함께 존재한다. 그와 반대로 높은 건물에는 올 여름 휴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여러 개의 관념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니까 답답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인정해 버리면 우리가 언제나 부러워하는 일탈의 짜릿함은 더욱 고조된다. 현실에 찌든 나를 탓하기보단, 그저 일상 속에 자그맣게 자리잡은 자투리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 방랑자의 고향은 없어진지 오래다. 삼포 가는 길은 허구다.
할아버지의 기일에 난 평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전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날의 낯선 공간 속 이질감은 손자를 어여삐 여긴 할아버지의 선물이었을까? 나를 사랑한 사람과의 헤어짐과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그 날의 익숙함까지.. 오늘도 전화기를 열고 마음이 적적하지 않도록 외로움과 싸움을 한다. 그 누구는 십자가를 지고, 그 누구는 술을 마신다. 책을 읽고, 깊게 생각할수록 한 가지 분명해진다. 난 떠나고 싶다는 것.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 낯선 곳이 주는 이질감과 사라져버린 내 모든 것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나 삶의 안정을 위해 애쓴 나를 위한 휴가를 그린다. 서정시를 쓰기 못하는 시대의 서정시를 위하여.
삼포 가는 길
삼포 가는 길
- 황석영 작.
낯선 곳의 이질감이 주는 생각.
여러 해 전 일이었다. 꽤 추운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할아버지 제사가 있었기에 천안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큰집이 있는 서울을 가기 위해서 고속버스를 탔다. 피곤한 탓인지 버스에서 깊게 잠을 잤던 나는 터미널에 내려서 시간이 많이 지체됨을 느끼고는, 급히 서둘러 큰집을 향하는 시내버스를 탔다. 여러 생각에 잠겨 이 거리 저 거리를 지나치는 동안 문득 낯선 공간을 달리고 있는 날 인지하게 되었다. 역시 생각대로 버스는 목적지를 향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 날 내리고는 서둘러 떠나는 버스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버스 같으니..서울이 다 그렇지..’ 작디작은 서울에 이곳이 그 어디이긴 하겠으나,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저녁의 풍경은 휑했고, 인적조차 드물었다. 건물의 환한 불빛과 거리의 네온사인은 내 눈을 영롱하게 비추는데도,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그곳을 그렇게 몇 분간 해매였다. 추운 겨울날 난 왜 이런 곳에 홀로 떨어진 건가. 이곳은 어디인가. 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당시의 오묘한 느낌을 기억한다. 겁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몇 분간 거리를 걸으며 낯선 곳이 주는 극도의 이질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다른 버스를 타기까지 단 몇 분이었지만, 난 내가 낯선 곳을 떠도는 방랑자가 된 느낌이었다. ‘이것이 여유구나.’ 그 당시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과 유달리 힘들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힘겨웠던 나는 그 순간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조각난 여유를 그리워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의도하지 않은 공간에서 내 의지와는 다른 흥겨움 이었다.
황석영 원작 '삼포 가는 길'을 원작으로 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의 소설에는 유달리 낯선 곳을 헤매는 방랑자가 많다. 특히 <삼포 가는 길>이라는 중편 소설에는 떠도는 이들의 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정서가 존재한다. 정처 없이 떠돌며 공사판을 찾는 막벌이 노동꾼 ‘정씨’와 젊은 노동자 ‘영달’, 그리고 접대부 ‘백화’가 눈 덮인 황량한 벌판을 지나 정씨의 고향 삼포로 가면서 겪는 인생의 애환을 그린다. 방랑자란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에게 고향은 저고리 안쪽 주머니의 쌈짓돈처럼 나락에 몰렸을 때를 위한 보루와 같다. 낯선 곳에 정을 뿌리고, 돈을 뿌리고, 사람을 향해 떠돌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기에 정착할 곳은 없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들이 떠돌며 사는 이유는 이질감이 주는 기대감에 있다. 그건 내가 느꼈던 그날의 흥겨움처럼 아득한 매력을 가진다.
낯선 곳에서 방랑자는 방관자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안식을 훔쳐 달아난다. 이 소설 속 세 사람은 기나긴 여정 속에 자신이 버렸던 것과 현재 어깨에 짊어진 것에 대한 대화를 한다. 지나온 세월이 주는 의미를 애써 태연히 버리려 한다. 사랑했던 여인과 멋진 풍경의 마을도 모두 저 멀리 한 숨의 입김으로 날려 버린다. 소설의 구수한 대화들은 고향을 잃은 방랑자들의 고독을 잘 그리고 있다. 내가 있을 뿐 다른 이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사고는 가슴이 시리다. 더 이상의 여정은 마치고, 인생의 체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 세 사람은 고향을 찾아 삼포로 가고 있다. 삼포는 그들이 정착해야 할 유일한 공간이다. <삼포 가는 길>에는 그렇게 여정의 마지막이 있다. 이질감을 뒤로 한 인생의 후반부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삼포가 결국엔 개발에 의한 변질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또 다른 절망을 한다. 내가 느껴던 신선한 이질감과는 반대로 낯선 곳의 생활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향을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원한 떠돌이가 된 세사람은 이제 영원한 안식을 갈망한다.
작가 황석영.
안식을 하는 자에겐 일탈에 대한 갈망이 가득하고, 떠도는 자에겐 안식을 위한 모든 것을 갈망한다. 세상은 그렇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람이 안식을 찾는 이유는 소설 속 그들처럼 방랑을 하기 위한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공무원의 철밥통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이 광고카피는 우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절묘하다. 우리 내 사람들이 힘든 일을 하며 안식처를 찾기 위한 이유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있어야 우리는 저 먼 바다로 떠날 수 있다. 그것이 단 며칠일 지라도 매년 그것을 그리워한다. 내 집을 마련해야 진정한 일탈의 용기를 가지며, 지금도 살기 뻑뻑한데 굳이 적금을 부어야 노후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삶의 태도에 혹자는 용기 없는 패배자들의 선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본능이라 말하고 싶다.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려는 본능 말이다. 모든 생물이 씨를 뿌리고, 살기 위한 환경을 갈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삼포 가는 길>의 세 사람은 고향이 있기에 먼 길을 떠날 수 있었고, 결국 고향이 사라져버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복잡한 삶 속의 우리들이 느끼는 현실의 개혁에 대한 무서움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들에게 고향은 삶의 안정의 유일한 도구였다. 집도 절도 없어도 기댈 수 있는 안식이었다. 그것이 사라진 순간 느껴지는 이 시대의 공허함에 대해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죽음에 가깝게 가고 있다는 삶의 불안과 현대 사회의 개혁과 개발에 대란 허무함에 대한 시대의 짊까지. 정치적 개혁과 사상의 절단이 주는 두려움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으슬으슬대는 오한이다. 작가 ‘황석영’은 안정이 사라진 이 시대의 개혁정신에 대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생각을 깊게 해보면 그것이 정답일 수 있다. 시대를 위한 진보란 일상에 매스를 들이미는 개혁이 아닌 삶의 여유 속에 나오는 흥쾌히 꺼내 줄 수 있는 쌈짓돈이어야 한다.
영화 오래된 정원.
황석영의 다른 소설 <오래된 정원>은 젊음을 바쳐 추구하려 했던 자신의 사상이 절단되어진 세상을 마주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서 확인한 것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세상의 이질감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죽고, 자신 없이 큰 딸은 자신이 거부했던 세상 속에서 존재한다. 그 이질감이란 낯선 곳에 떨어져버린 방랑자의 상징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매력적인 이질감의 뒷편이다. 의도하지 않은 공간에 홀로 떨어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 잡아야 한다. 그저 미디어와 보이지 않는 손이 주는 정보에 의지한 구속된 자유라 할지라도 삶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어떤 이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 말하겠지. 랭보의 아름다운 시도 애초부터 속박된 검열 속에 나왔다나? 랭보에게 훗날의 죽음을 가져온 단초가 그 자유였기에,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자신을 안식하기위해 오늘도 정해진 루트에 묶인 삶에 만족할 뿐이다.
진정한 자유란 검열과 속박 속에 나오는 조그마한 이질감일 뿐이다. 의도하지 않은 여유시간에 맛보는 맛있는 공기의 상쾌함이다. 시청 앞을 가득 매운 진보와 보수의 물결 속에는 안식과 일탈의 욕구가 함께 존재한다. 그와 반대로 높은 건물에는 올 여름 휴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여러 개의 관념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니까 답답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인정해 버리면 우리가 언제나 부러워하는 일탈의 짜릿함은 더욱 고조된다. 현실에 찌든 나를 탓하기보단, 그저 일상 속에 자그맣게 자리잡은 자투리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 방랑자의 고향은 없어진지 오래다. 삼포 가는 길은 허구다.
할아버지의 기일에 난 평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전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날의 낯선 공간 속 이질감은 손자를 어여삐 여긴 할아버지의 선물이었을까? 나를 사랑한 사람과의 헤어짐과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그 날의 익숙함까지.. 오늘도 전화기를 열고 마음이 적적하지 않도록 외로움과 싸움을 한다. 그 누구는 십자가를 지고, 그 누구는 술을 마신다. 책을 읽고, 깊게 생각할수록 한 가지 분명해진다. 난 떠나고 싶다는 것.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 낯선 곳이 주는 이질감과 사라져버린 내 모든 것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나 삶의 안정을 위해 애쓴 나를 위한 휴가를 그린다. 서정시를 쓰기 못하는 시대의 서정시를 위하여.
좋은 여행을 해야겠어.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곳으로 떠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