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천사의 시

김선미2008.08.07
조회195
베를린 천사의 시  
브루노 간츠 감독 빔 벤더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란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머리가 엉망이었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안지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됐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단지 환상이 아닐까?
악이 존재하나?
정말 나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나?
언젠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닐까?         베를린 천사의 시
      이야기의 요정아
세상의 끝을 믿는 사람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얘기해다오
한때 내 얘길 듣던 사람들이
이젠 내 책을 읽게 되어
모이지 않고 따로 앉아
남들을 개의치 않는다
이제 난 늙고
목소리마저 시들어
마음 깊은 곳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얘길 한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
아무도 알지 못할 단어와
문장으로 말하는데
마치 기도처럼 들린다   베를린 천사의 시

 

세상은 황혼으로 접어들지만
난 계속 얘기를 한다
내게 힘을 주던 처음처럼
노래하는 목소리로
흔들리는 현실을 보호해 주고
미래를 위해 얘기한다
더 이상 지난 세월을
슬퍼하지도, 집착하지도 않고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를
생각할 뿐
내 영웅들은 더 이상
왕이나 병사들이 아니라
순수한 평화와 절대적인 선
건조한 양파든
늪지대의 통나무든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 한 사람도
평화의 서사시를
노래하지 못했다
무엇이 우리에게
평화의 영감을 멀리하게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힘들게 하는가?
여기서 포기해 버릴까?
그럼 인류는 그들의 대변인을
잃게 되는데
그리고 일단 대변인을 잃으면
자식들까지 잃게 되지
      베를린 천사의 시

 

 


  끝났다
한 계절도 넘기지 못하고
뭔가 이룰 기회였는데
언제까지나 꿈일 뿐이야
벌써 10년이나 됐는데
오늘 밤이 마지막이군
게다가 보름달 밤이니
목 부러지기 딱 좋지
그만 조용하자     가끔 난 내게 관대해진다
좋지 않은 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세월이 병나면 어쩌지?
먹고 살기 위해
고생해야 한다면...
사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서커스가 그리울 거야
그런데 우습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니
마지막인데도 느낌이 없어    

베를린 천사의 시

  괴로운 건 잊을 수 있지만
내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잊지 못할 거야
최후까지 갈 수 없는 꿈
그러나 진정 아름다웠지
겨우 거리에 나와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언제나 깨어 있어
슬픔 따윈 생각하지 말아야지
누군가 날 사랑해 주길 애타게 원했고
그래서 낯선 곳에 왔다
누군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내 앞에 열리고
기쁨이 내 맘을 채울 텐데    

베를린 천사의 시


어렸을 때 난
무인도에 살고 싶었어
혼자서, 나 혼자서
그래, 허무해
모든 것이 허무해
불안, 불안밖에 없어...
불안   숲속에 버려진 조그만 새 같아
'넌 누구지?' 하면
'더 이상 난
공중 곡예사가 아냐'
그것밖에 대답할 수 없어
울지 말자
울고 싶어하지 말자
자주 있는 일이잖아    

베를린 천사의 시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아
허무해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 말자
베를린도 이젠 낯설지 않아
미아에게 친숙해지지 않는
벽의 거리
3분간 사진을 찍으면
다른 사람 얼굴이 나오는 거리
소설의 시작 같아
얼굴들
난 얼굴들이 보고 싶었어
웨이트리스 자리는 있겠지   오늘밤이 두려워
바보같이...
절반은 걱정이고
절반은 태평이니 한심하군
어떻게 살아가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일 거야
난 무지해
호기심이 많아서 그럴 거야
언제나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돼
감긴 눈 속으로
또 한 번 눈을 감으면
죽은 것도 살아날 것 같아    

베를린 천사의 시


색깥들의 존재
밤 하늘의 달빛
빨강, 노랑 네온사인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날 쳐다봐도 좋아
내가 사랑에 실패하는 건
내게 즐거움이 없어서야
노스텔지어
사랑의 파도 같은 노스텔지어
사랑의 즐거움이 있으면
훨씬 잘 될 거야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베를린 천사의 시      
아직 죽을 순 없어
할 일이 많은데   베를린 천사의 시   산에 올라갔을 때
안개 낀 계곡에 비치던 햇살
초원에 피운 불
그 속에 익어 가는 감자
호수에 떠 있는 보트
남십자성
극동의 땅
북극점
거친 황야
거대한 베른호
트리스탄 쿠나 섬
미시시피의 삼각주
스트롱볼리
샤로텐부르그의 고성
알베르트 카뮈
아침의 서광
어린 아이의 눈길
폭포에서의 수영
빗방울 자국
태양
빵과 포도주
한 발로 뛰기
부활절
투명한 나뭇잎
물결치는 초원
색깔 있는 돌
시냇가의 조약돌
야외의 하얀 식탁보
집에서 꿈꾸는 가정
옆에서 잠든 친한 이웃
행복한 일요일
지평선
빛이 넘치는 정원
야간 비행
두 손 놓고 자전거 타기
미지의 미녀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아이         베를린 천사의 시
포츠담 광장을 찾을 수가 없어
아냐...
여기일 리가 없어
포츠담 광장에 있는
요스트 카페에서
매일 오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는데
길 걷는 사람들을 보거나
잎담배를 피우기도 했지
광장 맞은 편
로제 웰프 상점의 잎담배
바로 이 맞은 편이였는데
여기가 포츠담 광장일리 없어
물어볼만한 사람도 없구나
생기 넘치는 곳이었지
전차와 마차가 다녔고
차도 두 대 있었어
내 차와 초콜릿 가게 차
벨트하임 백화점도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깃발 투성이가 되었지
이곳에...
광장은 온통 깃발 속에
묻혀 버렸어
사람들은 친절을 잃었고
경찰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난 포기하지 않아
포츠담 광장을 찾을 때까진
내 영웅들이여
내 아이들이여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의 인물들
내 얘기 최초의 주인공들은?
신이여
날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불멸의 시인으로 만드소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목소리마저 빼앗긴 나를
이젠 무시당하고 조소받으며
거리의 악사로 전락해 버린 나를      

베를린 천사의 시


오늘 같은 보름달 밤의
공중그네는 불길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절대 안 할 거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이제 서커스는 안녕이야
끝이야
내 안에서 저물어 가는 기분
두려움, 죽음의 공포
죽음이 어때서?
아름다운 것만이
중요할 때도 있어
거울 속 자신을 보는 것
생각을 하는 거야
넌 뭘 생각하지?
난 두려워 할 권리가 있어
말하지 않을 권리도
넌 눈도 보이고
심장도 아직 뛰고 있어
넌 울고 있구나
슬픈 아이처럼 울고 있어
왜 우는 거지?
누굴 위해?
날 위해서 아냐, 누군지 몰라
나도 알고 싶지만 몰라
난 조금 무서워
아냐, 이젠 괜찮아
또 무서워지겠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

 

난 지금 행복하다
내 삶의 이야기가 있고
또 이어 나가야 할
다른 이야기가 있으니까

 

 

베를린 천사의 시


미안하다
내 몸 속에서
누군가 날 잡아 주는 거 같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베를린 천사의 시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 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땐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었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졌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베를린 천사의 시

 

내가 누군지
나도 말할 수가 없어
아는 사람도, 과거도
고향도 없지만 그래도 좋아
난 여기에 있고 자유야
뭐든 상상할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내 세계를 찾는 거야
지금 여기에서 느껴
언제까지나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베를린 천사의 시


하늘의 태양 말고도
다른 태양이 있어
오늘 밤 다시 봄이 올 거야
우리들이 모르는
다른 날개가 자랄 거야
깜짝 놀랄 날개 말이야    

베를린 천사의 시


이젠 진지해져야 돼요
난 항상 혼자였죠
하지만 혼자 살진 않았어요
누군가와 지낼 땐 행복했지만
그때도 우연이라 여겼죠
그들은 부모님이었지만
타인일 수도 있어요
왜 내 동생은 갈색 눈이고
저 녹색 눈동자의
소년이 아닌 것일까요?
택시 기사의 딸과 친구였는데
그녀와 어깨동무를 했지만
그 애는 말을 좋아했죠
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그 사람도 떠나야 했어요
타인으로 만났어야 할
사람이었죠
내 눈을 안 볼 거예요?
손을 안 잡을 거예요?
아니, 손을 잡지 말고
날 보지 말아요
오늘 밤은 초생달이죠?
적막한 밤이에요
누구와 놀아본 적이 없는데도
난 한 번도 눈을 뜨고
'이젠 심각해져야지' 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이제야 심각해지는 거죠
이제 나이가 들어버렸어요
나 혼자 심각하지 않았나요?
가끔은 심각했었죠
혼자서도, 누구와 있을 때도
난 쓸쓸하지 않았어요
쓸쓸함을 느끼고 싶었죠
쓸쓸함이란 자신을
통째로 느끼는 것이니까
이제 그걸 얘기할 수 있고
쓸쓸함을 알게 됐어요
우연은 이제 끝이에요
초생달은 결단의 시간
앞날의 운명은 몰라도
결단을 내릴 때예요
결단을 내려요
이제 우리의 시간이에요
우리 둘의 결단은
이제 세계의 결단이에요
우리 둘만이 아니라
뭔가를 형상화하고 있어요
사람이 모인 광장에 있고
우리가 결정을 하는 거예요
모두의 운명을요
저는 준비됐어요
이제 당신 차례예요
당신 손에 달렸어요
지금 결단을 내려요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날 필요로 할 거예요
두 사람이 만드는 역사는
위대할 거예요
남녀의 사랑
큰 사랑의 이야기예요
보이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새로운 조상들의 이야기
봐요, 내 눈을 봐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미래가
내 눈 속에 비치고 있죠?
어젯밤 꿈 속에
낯선 사람이 나타났어요
나의 사람
그로 인해서
난 고독할 수 있었죠
난 처음으로
내 전부로 받아들였어요
그를 기쁘게 받아들였어요
서로 행복을 나누며
안길 수 있는 유일한 남자
그건...
당신이에요  
   

베를린 천사의 시


뭔가가 일어났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놀라움이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인데
낮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누가 누구인가?
난 그녀 안에 있었고
그녀는 날 둘러쌌다
타인과 같이 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하겠는가?
난 지금 함께 있다
유한적인 생명의 아이가 아닌
영원한 이미지를 잉태했다
지난밤 난 놀라운 걸 배웠다
그녀의 집에 갔었는데
마치 내 집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이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영원이었다
그날 밤의 일은
죽을 때까지 남을 것이다
난 그 속에서 살 것이다
둘이라고 하는 것의 놀라움
남과 여에 대한 놀라움
그것이 날 인간으로 만들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


난 이제 안다
어떤 천사도
모르던 사실을       베를린 천사의 시
언젠가 나를 찾을
남녀 아이들의 이름을
이야기꾼이며 노래하는 사람인
나에게 고하라
사람들에겐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베를린 천사의 시
모든 전직 천사들에게 바침
특히 야스지로, 프랑소와, 안드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