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병이 더 심해지더라도 답답하게 집구석에만 박혀 있을 순 없다 생각해서 오랫만에 지하철을 탔다.
8월 한여름 날씨가 그렇듯, 지하철 1호선의 장사꾼들이 그렇듯 어김없이 들리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가만보니 생긴것도 한국사람이 아니거니와 팔꿈치 아래로는 댕강 빈 소매만 펄럭거린다.
'저는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일하다가 팔 짤렸어요. 보험 안되요. 도와주세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아저씨는 산재보험이 안된다는 증명서와 껌 몇통, 뒤집어놓은 벙거지 모자를 들고
주춤주춤 사람들 틈을 누빈다. 절뚝이는 발걸음엔 고달픈 삶의 무게가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차며 마음의 문을 먼저 연다. 아주머니를 보고 나도 열고, 그런 날 보고
맞은편의 다운증후군 딸을 둔 아버지도 연다.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 그 설움 가득찬
커다란 눈에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음을 느낀다.
.
.
.
2004년 나 고3때, 엄마가 깜빡하고 논술학원비를 두번 주신 적이 있다. 일주일 전에 분명 학원비를 받았는데 또 주시는
게 아닌가. 그땐 정말 속으로 '횡재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하나. 설마 걸리진 않겠지' 하고 행복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기쁘기도 하고 또 걸릴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고 벌써 며칠 지났는데 돌려 드릴수도 없고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째. 어느 날,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에 "16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씨플루 이야기" 라는 기사를 보았다.
“방글라데시의 집에 가고 싶지만...”16살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씨플루 이야기 미디어다음 / 글, 사진 김준진 기자 어린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다. 가시덤불을 헤매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까지 입었다. 돌아갈 꿈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물짓지만 그저 꿈일뿐… 방글라데시에서 온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씨플루’. 이제 16세를 갓 넘긴 이 소년의 꿈은 가시덤불 같은 한국을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코리안 드림’에 설레었는데, 이제는 몸과 마음의 상처만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씨플루(사진 왼쪽)가 다친 손을 들어보이는 가운데 그의 삼촌 솜락(30)이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다. 씨플루의 왼손은 검지와 중지가 두 마디, 약지는 한 마디에서 조금 더 잘려나갔다. 중지는 겨우 접합했지만 구부러지지도 않은 채 통증이 계속 느껴지는 상태다. 씨플루는 마석 성생공단으로 이사온 뒤부터 삼촌 가게가 협소해 한달 전부터 이곳에서 같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형'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씨플루(16)는 우리로 치면 중학교 3학년생. 그는 지금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는 한국에 온지 1년여만에 1000만원의 빚을 지고 손가락이 잘려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모진 운명이 어떻게 그에게 찾아들었을까.
장남인 그는 어릴 때부터 돈을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다른 꿈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7살부터 다녔던 학교도 학비를 못내 10살 무렵 그만둬야 했다. 집안일을 돕던 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부모님을 통해 빌린 우리 돈 1000만원을 ‘송출비용’으로 지급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해 8월 무렵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그는 한국에서 돈을 많이 모아 집에 보내고, 자신도 금의환향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코리안 드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한국에 들어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철저히 깨졌다.
두 달만에 무너진 '코리아 드림'처음에 학생비자(Student Visa)로 들어온 씨플루는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덕소의 한 가구공장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서툰 한국말과 모든 것이 낯선 이국생활은 큰 고통이었다. 함께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에게 모르는 것을 배워가며 이를 악물었다. 사장이 두 달 연속 월급을 건너뛰어도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일이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한국에 온지 두 달여만인 지난 해 10월 그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공장에서 합판 자르는 일을 맡았던 씨플루는 사고 당시 동료 한국인 노동자의 지시대로 합판을 밀어넣었다. 그러나 전기톱은 씨플로 왼손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세 손가락의 두 마디씩을 앗아가 버렸다.
마석 성생공단의 한 골목길에서 폐재료 앞을 걷는 씨플루와 통역을 해줬던 이란(30). 불법체류자 신분의 그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외국인노동자는 우리나라의 중소 3D업종에서 모진 일들을 해왔다. 공장 사장은 급히 씨플루를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사장의 배려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병원은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단체인 ‘샬롬의 집’에 연락했다. 이영 보좌사제가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사장은“돈을 구해올 테니 일단 씨플루의 수술에 보증을 서달라”며 이 보좌사제에게 부탁했다.
접합수술을 위해서는 절단된 손가락이 필요했다. 그러나 잘린 손가락과 돈을 구해 오겠다던 사장은 이후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손가락 마디가 달려 있던 가운데 손가락만 접합하고 나머지 두 손가락은 접합수술을 하지 못했다. 가운데 손가락도 구부릴 수 없는 상태다. 치료비는 3년전 한국에 들어와 있던 삼촌의 도움과 샬롬의집이 근로복지공단에 청구해 받은 요양보험급여 280만원 등을 합해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필요한 요양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한 달여만인 12월초 병원에서 퇴원해야 했다.
씨플루가 남양주시 월산리에 있는 삼촌집에서 통원치료를 시작할 무렵까지 사장은 전혀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장은 그에게 연락을 취한 이 보좌사제에게 “그를 고용한 적이 없다. 일도 안 시켰는데 자기가 알아서 왔고, 일을 했다”고 둘러댔다. 이영 보좌사제가 씨플루와 함께 공장까지 찾아가자 사장은 그제서야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했다. 밀린 두 달치 월급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 후 1년동안 씨플루는 치료를 마치고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소개를 받아 간 공장에서도 막상 씨플루의 다친 왼손을 보면 손사래를 치기 일쑤였다. 결국 외국인노동자들을 상대로 식료품가게를 꾸리는 삼촌 솜락에게 생계를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씨플루는 삼촌가게의 구석에 틀어박혀 있거나, 거리를 거니는 것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월 고용허가제 실시로 단속이 심해진 이후로는 거리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마지막 바람, '집으로'언제 쯤이면 씨플루에게 희망의 빛이 화사하게 비춰질 수 있을까. 씨플루는 이제 코리안 드림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한국에 올 때 현지에서 진 빚 1000만원 때문이다. 한국 돈 1000만원은 방글라데시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다. 어떻게든 그 돈만이라도 벌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그를 엄습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다. 일해서 돈을 벌지는 못해도 다친 손가락에 대한 보상금만이라도 꼭 받아서 빚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다.
씨플루가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보상금도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인터뷰 과정에서 통역을 맡은 이란(30)이 그 점을 설명해줘도 씨플루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이 같은 일을 자주 접했던 이 보좌사제도 “기껏해야 300만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저 이 사장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이 ‘강제 산재’로 처리해줘 지급하는 것이다.
이 보좌사제가 옆에서 탄식에 가까운 말을 이어갔다. “자기 동생이 그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다 손을 잘렸다고 생각해보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어린 나이에 먼 길을 떠나온 씨플루가 이국만리에서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어 줘야만 할 것 같다. 집에 가기 전 한 번만이라도 씨플루가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가야 할 텐데…”
씨플루는 집으로 돌아가도 또래 젊은이처럼 일할 수 없다. 다친 왼손은 주먹도 안 쥐어진다. 당연히 힘을 줄 수도 없다. 지난 상처는 통증으로 여전히 아리게 남아있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도와줬던 이종민 부제는 마치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중얼거렸다. “저래서 어째. 뭐하고 살어. 어휴, 나쁜 사람…”
그러나 이정호 사제(샬롬의 집 대표)를 포함한 이 보좌사제, 이종민 부제 모두 이젠 씨플루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은 또 아무리 불법체류자지만 한 청소년의 인생이 손가락과 함께 뭉툭하게 잘려나간 데 대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성을 보이는 방법이 씨플루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장님 아주 나빠요. 잘렸는데 치료도 안 해주고, 돈도 안 주고…하지만 대부분 한국사람들과 한국은 좋아요.” 그는 한국에서 악몽 같은 경험을 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미소를 머금고 집에 돌아가는 날은 언제쯤일까. / 남양주 샬롬의 집(031)594-5821
그 때, 참 무슨 생각이었던지 바로 기자한테 메일을 보냈다. 우연히 갖게 된 돈이 있는데 씨플루에게 주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돈을 전달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 기자는 샬롬의 집 계좌번호를 보내주었고 나는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띵깐 학원비 18만원을 씨플루에게 보내주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용돈도 아닌 어쩌면 훔친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학원비를 보내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는거. 엄마를 속인것에 대한 죄책감은 안중에도 없었다.
만약, 지금 나에게 꽁돈 18만원이 생긴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어제 마주친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가 어쩌면 씨플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깨달음, 지난 4년동안 나는 내 욕심만 부풀리고 마음의 문은 꼭꼭 닫고 있었구나.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다시 열어야지. 당신도 그러기를.
지하철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
한달여간 지속되는 눈병때문에 외출을 삼가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갑자기 악화된 통증에 계획 했던 일은 물론이고 잠자는 것 조차 괴로웠던 며칠 간,
눈병이 더 심해지더라도 답답하게 집구석에만 박혀 있을 순 없다 생각해서 오랫만에 지하철을 탔다.
8월 한여름 날씨가 그렇듯, 지하철 1호선의 장사꾼들이 그렇듯 어김없이 들리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가만보니 생긴것도 한국사람이 아니거니와 팔꿈치 아래로는 댕강 빈 소매만 펄럭거린다.
'저는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일하다가 팔 짤렸어요. 보험 안되요. 도와주세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아저씨는 산재보험이 안된다는 증명서와 껌 몇통, 뒤집어놓은 벙거지 모자를 들고
주춤주춤 사람들 틈을 누빈다. 절뚝이는 발걸음엔 고달픈 삶의 무게가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차며 마음의 문을 먼저 연다. 아주머니를 보고 나도 열고, 그런 날 보고
맞은편의 다운증후군 딸을 둔 아버지도 연다.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 그 설움 가득찬
커다란 눈에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음을 느낀다.
.
.
.
2004년 나 고3때, 엄마가 깜빡하고 논술학원비를 두번 주신 적이 있다. 일주일 전에 분명 학원비를 받았는데 또 주시는
게 아닌가. 그땐 정말 속으로 '횡재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하나. 설마 걸리진 않겠지' 하고 행복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기쁘기도 하고 또 걸릴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고 벌써 며칠 지났는데 돌려 드릴수도 없고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째. 어느 날,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에 "16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씨플루 이야기" 라는 기사를 보았다.
“방글라데시의 집에 가고 싶지만...”16살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씨플루 이야기 미디어다음 / 글, 사진 김준진 기자 어린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다. 가시덤불을 헤매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까지 입었다. 돌아갈 꿈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물짓지만 그저 꿈일뿐…
씨플루(사진 왼쪽)가 다친 손을 들어보이는 가운데 그의 삼촌 솜락(30)이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다. 씨플루의 왼손은 검지와 중지가 두 마디, 약지는 한 마디에서 조금 더 잘려나갔다. 중지는 겨우 접합했지만 구부러지지도 않은 채 통증이 계속 느껴지는 상태다. 씨플루는 마석 성생공단으로 이사온 뒤부터 삼촌 가게가 협소해 한달 전부터 이곳에서 같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형'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마석 성생공단의 한 골목길에서 폐재료 앞을 걷는 씨플루와 통역을 해줬던 이란(30). 불법체류자 신분의 그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외국인노동자는 우리나라의 중소 3D업종에서 모진 일들을 해왔다. 공장 사장은 급히 씨플루를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사장의 배려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병원은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단체인 ‘샬롬의 집’에 연락했다. 이영 보좌사제가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사장은“돈을 구해올 테니 일단 씨플루의 수술에 보증을 서달라”며 이 보좌사제에게 부탁했다.
언제 쯤이면 씨플루에게 희망의 빛이 화사하게 비춰질 수 있을까. 씨플루는 이제 코리안 드림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한국에 올 때 현지에서 진 빚 1000만원 때문이다. 한국 돈 1000만원은 방글라데시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다. 어떻게든 그 돈만이라도 벌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그를 엄습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다. 일해서 돈을 벌지는 못해도 다친 손가락에 대한 보상금만이라도 꼭 받아서 빚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씨플루’. 이제 16세를 갓 넘긴 이 소년의 꿈은 가시덤불 같은 한국을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코리안 드림’에 설레었는데, 이제는 몸과 마음의 상처만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씨플루(16)는 우리로 치면 중학교 3학년생. 그는 지금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는 한국에 온지 1년여만에 1000만원의 빚을 지고 손가락이 잘려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모진 운명이 어떻게 그에게 찾아들었을까.
장남인 그는 어릴 때부터 돈을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다른 꿈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7살부터 다녔던 학교도 학비를 못내 10살 무렵 그만둬야 했다. 집안일을 돕던 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부모님을 통해 빌린 우리 돈 1000만원을 ‘송출비용’으로 지급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해 8월 무렵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그는 한국에서 돈을 많이 모아 집에 보내고, 자신도 금의환향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코리안 드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한국에 들어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철저히 깨졌다.
두 달만에 무너진 '코리아 드림'처음에 학생비자(Student Visa)로 들어온 씨플루는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덕소의 한 가구공장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서툰 한국말과 모든 것이 낯선 이국생활은 큰 고통이었다. 함께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에게 모르는 것을 배워가며 이를 악물었다. 사장이 두 달 연속 월급을 건너뛰어도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일이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한국에 온지 두 달여만인 지난 해 10월 그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공장에서 합판 자르는 일을 맡았던 씨플루는 사고 당시 동료 한국인 노동자의 지시대로 합판을 밀어넣었다. 그러나 전기톱은 씨플로 왼손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세 손가락의 두 마디씩을 앗아가 버렸다.
접합수술을 위해서는 절단된 손가락이 필요했다. 그러나 잘린 손가락과 돈을 구해 오겠다던 사장은 이후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손가락 마디가 달려 있던 가운데 손가락만 접합하고 나머지 두 손가락은 접합수술을 하지 못했다. 가운데 손가락도 구부릴 수 없는 상태다. 치료비는 3년전 한국에 들어와 있던 삼촌의 도움과 샬롬의집이 근로복지공단에 청구해 받은 요양보험급여 280만원 등을 합해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필요한 요양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한 달여만인 12월초 병원에서 퇴원해야 했다.
씨플루가 남양주시 월산리에 있는 삼촌집에서 통원치료를 시작할 무렵까지 사장은 전혀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장은 그에게 연락을 취한 이 보좌사제에게 “그를 고용한 적이 없다. 일도 안 시켰는데 자기가 알아서 왔고, 일을 했다”고 둘러댔다. 이영 보좌사제가 씨플루와 함께 공장까지 찾아가자 사장은 그제서야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했다. 밀린 두 달치 월급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 후 1년동안 씨플루는 치료를 마치고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소개를 받아 간 공장에서도 막상 씨플루의 다친 왼손을 보면 손사래를 치기 일쑤였다. 결국 외국인노동자들을 상대로 식료품가게를 꾸리는 삼촌 솜락에게 생계를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씨플루는 삼촌가게의 구석에 틀어박혀 있거나, 거리를 거니는 것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월 고용허가제 실시로 단속이 심해진 이후로는 거리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마지막 바람, '집으로'
씨플루가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보상금도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인터뷰 과정에서 통역을 맡은 이란(30)이 그 점을 설명해줘도 씨플루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이 같은 일을 자주 접했던 이 보좌사제도 “기껏해야 300만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저 이 사장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이 ‘강제 산재’로 처리해줘 지급하는 것이다.
이 보좌사제가 옆에서 탄식에 가까운 말을 이어갔다. “자기 동생이 그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다 손을 잘렸다고 생각해보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어린 나이에 먼 길을 떠나온 씨플루가 이국만리에서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어 줘야만 할 것 같다. 집에 가기 전 한 번만이라도 씨플루가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가야 할 텐데…”
씨플루는 집으로 돌아가도 또래 젊은이처럼 일할 수 없다. 다친 왼손은 주먹도 안 쥐어진다. 당연히 힘을 줄 수도 없다. 지난 상처는 통증으로 여전히 아리게 남아있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도와줬던 이종민 부제는 마치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중얼거렸다. “저래서 어째. 뭐하고 살어. 어휴, 나쁜 사람…”
그러나 이정호 사제(샬롬의 집 대표)를 포함한 이 보좌사제, 이종민 부제 모두 이젠 씨플루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은 또 아무리 불법체류자지만 한 청소년의 인생이 손가락과 함께 뭉툭하게 잘려나간 데 대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성을 보이는 방법이 씨플루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장님 아주 나빠요. 잘렸는데 치료도 안 해주고, 돈도 안 주고…하지만 대부분 한국사람들과 한국은 좋아요.” 그는 한국에서 악몽 같은 경험을 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미소를 머금고 집에 돌아가는 날은 언제쯤일까. / 남양주 샬롬의 집(031)594-5821
그 때, 참 무슨 생각이었던지 바로 기자한테 메일을 보냈다. 우연히 갖게 된 돈이 있는데 씨플루에게 주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돈을 전달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 기자는 샬롬의 집 계좌번호를 보내주었고 나는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띵깐 학원비 18만원을 씨플루에게 보내주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용돈도 아닌 어쩌면 훔친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학원비를 보내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는거. 엄마를 속인것에 대한 죄책감은 안중에도 없었다.
만약, 지금 나에게 꽁돈 18만원이 생긴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어제 마주친 외국인 노동자 아저씨가 어쩌면 씨플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깨달음, 지난 4년동안 나는 내 욕심만 부풀리고 마음의 문은 꼭꼭 닫고 있었구나.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다시 열어야지. 당신도 그러기를.
시캬
손세실리아
마석가구공단 뒤켠 쪽방촌 어귀엔 무슨무슨
마트라는 한글 상호 하단에 괄호 열고 닫고
siekya라 써넣은 상점이 있다
전자사전은 물론이거니와 네이버 지식iN에도
올라있지 않은 국적불명의 이 영단어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이 배어있다는데
말하긴 뭣하지만 이 새끼 저 새끼 망할 놈의
새끼... 할 때의 영문표기란다 가게 주인의
상투적인 말투를 야, 이봐, Hi쯤으로 지레짐작해
제 딴엔 멋진 한국식 인사라며 고용주와
가게 주인에게 시캬 시캬하다가 혼쭐났다는
일화는 한 편의 빼어난 블랙코미디다
샬롬의 집에 초대받아 시를 낭송했다
손가락 세 개를 공장 마당에 묻고 방글라데시로
추방당한 씨플루에게 폐암말기로 고국에 돌아가
히말라야 끝자락에 묻힌 네팔인 람에게 열세 번의
구조요청을 묵살당한 채 혜화동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 조선족 김원섭 씨에게 사죄하고자
섰다 시인으로서가 아닌 코리안 시캬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