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일 자정부터 5.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아침 8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용 찦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아침 9시, 시위대는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2대의 장갑차를 포함 ,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57대를 탈취하여 시내로 몰고 나왔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로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드디어 무기고 습격이 이어졌다. 대한통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 70정을 탈취했고, 이어서 연초제조창, 호남전기, 전남방직 등의 무기고를 부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고. 이어서 지원동에 있는 탄광용 화약고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탈취했다.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52개가 피탈됐다. 시민군은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사단 규모의 차량 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들 무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난동자들은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12시경, 광주사태 기 간중 가장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
윤흥정은 21일 아침에야 그날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와 도청 방어 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게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응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 “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명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 1명이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그런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자위수단으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국의 분석가들이 칭찬했듯이 끝까지 시민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을 조준하지 않고 차량에 대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16:50분, 이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17:50분에 1,200명의 병력은 겨우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들을 민주화 인사라 하는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말한다.
21일의 특기사항은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된 사실이다.
이에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 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명 철수시켜 충돌을 막고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신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와 계엄사는 사태의 진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선무활동을 전개했다. 5.21일에는 호남출신장교단 62명을 광주로 보내 광주의 지도층 인사들과 대화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윤흥정 계엄분소장과 호남출신 소준열 장군도 5월20,21,23일 3회에 걸쳐 호소문을 발표했고, 총 117만여 장에 이르는 선무전단을 살포하고 수백 회에 이르는 선무방송을 했다.
자위권 발동 대통령 재가
광주지역을 직접 작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은 31시단장 정웅,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이었다. 당시 2군 사령관은 진종채, 그는 이 두 장군을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진종채는 계엄군의 거듭된 증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악화되자 잔전참모 김준봉 장군을 대동하고 광주를 직접 방분하여 현지사정을 주사했다.
오후4시, 그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 광주사태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의 불기피성을 건의했고, 이희성은 즉시 주영복 국방장관에 보고했다.
16:35분, 주영복장관은 즉시 합참의장, 각군총장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진종채 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이어 이희성은 최규하 대통령에 자위권발동을 승인받았다)육군본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동정일지’)
19:30분, 자위권 발동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와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와 관련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한편, “계엄군은 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부득이 자위권 조치를 취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취지의 내용을 KBS를 통하여 방송했다. 이어서 22일에는 계엄훈령 제11호로 전계엄군에게 자위권발동을 지시했다.
518 광주 폭동
-시위대 광주 완전 점령-
<추가된 유언비어>
“신총리 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고교생들이 특공대를 구성하고 있다”
“화염병으로 장갑차를 물리치고 있다”
<상황>
5.20일 자정부터 5.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아침 8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용 찦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아침 9시, 시위대는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2대의 장갑차를 포함 ,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57대를 탈취하여 시내로 몰고 나왔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로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드디어 무기고 습격이 이어졌다. 대한통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 70정을 탈취했고, 이어서 연초제조창, 호남전기, 전남방직 등의 무기고를 부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고. 이어서 지원동에 있는 탄광용 화약고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탈취했다.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52개가 피탈됐다. 시민군은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사단 규모의 차량 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들 무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난동자들은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12시경, 광주사태 기 간중 가장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
윤흥정은 21일 아침에야 그날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와 도청 방어 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게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응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 “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명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 1명이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그런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자위수단으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국의 분석가들이 칭찬했듯이 끝까지 시민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을 조준하지 않고 차량에 대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16:50분, 이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17:50분에 1,200명의 병력은 겨우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들을 민주화 인사라 하는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말한다.
21일의 특기사항은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된 사실이다.
나주경찰서. 나주 삽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오일파출소가 피습되어 칼빈 780정, M-1 235정, 실탄 46,400발, 권충 28정이 피탈당했다.
목포시청이 점령되고 목포경찰서가 전소했다. 화순경찰소와 화순역전파출소를 방화하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460정의 총과 1만여발의 탄약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 순덕지서가 피습당하고 무기를 피탈당했다.
17시경, 계엄군 외곽으로 철수 명령
이에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 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명 철수시켜 충돌을 막고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신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와 계엄사는 사태의 진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선무활동을 전개했다. 5.21일에는 호남출신장교단 62명을 광주로 보내 광주의 지도층 인사들과 대화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윤흥정 계엄분소장과 호남출신 소준열 장군도 5월20,21,23일 3회에 걸쳐 호소문을 발표했고, 총 117만여 장에 이르는 선무전단을 살포하고 수백 회에 이르는 선무방송을 했다.
자위권 발동 대통령 재가
광주지역을 직접 작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은 31시단장 정웅,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이었다. 당시 2군 사령관은 진종채, 그는 이 두 장군을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진종채는 계엄군의 거듭된 증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악화되자 잔전참모 김준봉 장군을 대동하고 광주를 직접 방분하여 현지사정을 주사했다.
오후4시, 그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 광주사태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의 불기피성을 건의했고, 이희성은 즉시 주영복 국방장관에 보고했다.
16:35분, 주영복장관은 즉시 합참의장, 각군총장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진종채 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이어 이희성은 최규하 대통령에 자위권발동을 승인받았다)육군본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동정일지’)
19:30분, 자위권 발동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와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와 관련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한편, “계엄군은 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부득이 자위권 조치를 취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취지의 내용을 KBS를 통하여 방송했다. 이어서 22일에는 계엄훈령 제11호로 전계엄군에게 자위권발동을 지시했다.
이 때는 이미 일부 병사들이 자위차원에서 사격을 가한 다음이었다.
20일, 오후 7시경, 도청 앞에서 지그재그로 공격해오는 차량에 대한 자위사격,
21일 오후 2시경의 전남대에서 사격하며 돌진해오는 시민군에 대한 사격,
21일 낮부터, 광주교도소에서 이튿날 세격까지의 상방 교전
등 등
<투입병력 >
군: 265/1,212
경찰: 163/2,385
<피해>
사망: 54(군인2,학생8,민간44)
부상: 343(중상62, 경상281)
피탈자산: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
소화기 탄약 288,680발,
폭약 2,500여 상자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
수류탄 52개
피탈차량 779대(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