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후로 태어난 이들에게 ‘밥 딜런’은 그저 스쳐 지나간 한 외국인의 이름일 뿐이다. 그가 가수정도라는 것만 아는 나로서는 그의 전기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끌리지 않았다. 다만 이 영화가 ‘벨벳 골드마인’의 ‘토드 헤인즈’의 작품이고,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남기고 간 유작이라는 점이 내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근데 놀랍게도 그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를 홀로 극장에서 찾은 내 자신을 친히 격려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예술가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임 낫 데어>는 미국이 격동의 시절을 보낼 때, 그 시대와 함께 했던 ‘밥 딜런’의 모습을 다양한 인물을 통해 조명한다. ‘밥 딜런’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가 대중에게 준 이미지들이 빼곡하게 영화에 수놓아 있다. 이 영화의 7명의 ‘밥 딜런’은 그의 초상화의 균열된 자아들이다. 모두 그이기도 하고, 모두 그가 아닐 수도 있다. 오로지 확실한 ‘밥 딜런의 영화’라는 점은 그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밥 딜런’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다. 은둔자, 인권운동가, 반전운동가, 시인, 포크가수, 기독교 인 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그 누군가가 그에게 그 어떤 칭호와 그에 맞는 명성을 주려 하면, 굳이 그것을 외면하여 자신을 정의하길 꺼렸다. 그건 그가 살던 시대의 흐름 속에 변화에 따라 자신의 초상화를 계속해서 다르게 그려왔기 때문이다.
“If I wasn't Bob Dylan, I'd probably think that Bob Dylan has a lot of answers myself.”
“만약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밥 딜런 같은 사람이 나한테 해답을 줄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 밥 딜런
6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들은 미국의 부와 권력이 세계 인민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케네디가 ‘뉴 프론티어’의 깃발을 내걸었을 때 그들은 포크음악이 흑인에 대한 차별과 전쟁을 좋아하는 미국의 성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을 참전할 당시 ‘밥 딜런’은 반전 운동가였다. 케네디가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강조할 때는 앞장서서 흑인 인권을 보호하는 인권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포크가수로 자신의 이름을 저항가수로 각인시킨 것이다. 포크음악이 음악 자체의 가치를 넘어서 정부에 저항하고 정치적 힘을 가진 도구로 변질되는 것을 느끼자, 그는 과감하게 전자기타를 들고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대중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그건 마치 프랑스의 전설적인 시인 랭보가 특이한 방법론적 각성을 경험하듯,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장르 비틀기를 통해 또 다른 음악의 변주를 실험하는 음악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 후 1년 후에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 아내와 함께 뉴욕의 ‘우드스턱’에 있는 집에서 은둔자적인 생활을 경험한다. 그 후 전쟁이 종식되고 미국의 극도의 경제발전 속에 놓이면서, 과연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그의 음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에는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시적 은유가 가득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하고, 79년에는 기독교적 성향이 강한 가스펠 앨범을 발표하며 종교에 심취한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헐리웃 부흥기에는 영화배우로 몇 편의 영화에 직접 출현하기도 했고, 은둔자 생활을 할 때는 몇 권의 책을 집필한 문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밥 딜런’을 기억하는 데에는 그 시대의 이미지가 크게 자리 잡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 예술적으로나 격동의 시대를 지나왔던 60년대를 같이 부대껴온 ‘밥 딜런’은 그 시대의 저항성을 대표한다. 굵직한 사건 속에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그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것 보다는 그 시대의 이미지와 깊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방 침대에서 읽었던 위인전이 그렇게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사람의 인생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데 소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동물이라 그 누군가를 기억할 때는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이 내게 미쳤던 영향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힘든 시절에 날 위로해줬던 그분’이라고 그 어떤 이를 기억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술가 ‘밥 딜런’은 우리에게 시대에 저항했던 포크가수로 또는 그 변형시켰던 자신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Chaos is a friend of mine.” 혼돈은 나의 친구다.
-밥 딜런
충격적인 사건들이 수놓는 60년대에서 70년대를 지나온 이들은 ‘밥 딜런’을 혼돈의 시대 속에 흔들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위로해줬던 혹은 배신했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마음에 새겨 넣은 것이다.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미지를 나열하여 그가 결국에는 시대 속에 가려진 잔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영화는 그의 균열된 자아를 그리려 했지만, 정작 추구된 것은 시대의 물음과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일 뿐이다. 그가 존경했던 시인 ‘랭보’와 그가 존경했던 포크음악의 창시자 ‘우디 거스리’의 모습도 결국에는 그를 기억하는 하나의 매개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여자건 남자건 아이건 배우건 파렴치한 놈이건 잘생긴 남자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밥 딜런’이 없더라도 그의 음악이 남아 그 시대를 추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그 몫을 다한 것이다. 예술가의 영혼은 그 모습 자체보다 그가 남긴 작품의 연주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누구는 ‘밥 딜런’을 조롱하며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린 시인’이라 하더라. 옳다. 분명 옳은 말이다. 70년대 이후의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난해해지고, 시대보다는 대중과 종교를 향한 타협의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또 숨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예술가가 특정 시대의 이미지를 짊어지고 있다면, 그가 도피해버린 현실의 무게까지 우리가 다 위로해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예술가에게 영웅적 칭호를 붙일 수는 없다. 물론 그런 예술가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시대에 순응하는 예술가의 정신이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음악이 음악자체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즐길 수 없는 음악을 할 것 같으면 피해버리고, 변화했다.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이미지들이 모여들어 그의 노래를 비추고, 그것이 대중의 정신을 대변한다면 그의 인생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곡예사로 표현한 이유도 자신의 현재 위치에 큰 의미를 부여하길 두려워하는 예술가의 고독이 숨어있다. 비록 그가 여기 없다 하더라도 우린 그의 노래를 귀에 꽂고 즐길 것이다.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정신세계 속에 투영되는 그 시대의 정신에 그 방점을 찍는 작품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시대의 이야기다.
“노래에 나오는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적다 해도, 사람들은 노래로 이야기한다”
-밥 딜런 (자서전 중에서)
인간 ‘밥 딜런’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 그녀, 여기 모두 없다. 그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하겠지. 뜨거운 태양에서 일하는 농부처럼 자유로웠던 자.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곡예사. 다양한 얼굴에서 그의 슬픈 눈매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겠지 아주 관조적인 시선으로. <아임 낫 데어>는 시대에 희석된 한 남자의 인생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근데 아무리 들어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몇곡을 제외하고는 밥 딜런의 음악은 정이 가질 않는다. 몇 장의 사진과 몇 장의 텍스트로 읽어 내려 온 그의 이야기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긴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자가 그 시대의 상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게 아이러니지.
아임 낫 데어
'밥 딜런'을 기억하는 우리의 자세.
80년대 이후로 태어난 이들에게 ‘밥 딜런’은 그저 스쳐 지나간 한 외국인의 이름일 뿐이다. 그가 가수정도라는 것만 아는 나로서는 그의 전기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끌리지 않았다. 다만 이 영화가 ‘벨벳 골드마인’의 ‘토드 헤인즈’의 작품이고,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남기고 간 유작이라는 점이 내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근데 놀랍게도 그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를 홀로 극장에서 찾은 내 자신을 친히 격려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예술가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임 낫 데어>는 미국이 격동의 시절을 보낼 때, 그 시대와 함께 했던 ‘밥 딜런’의 모습을 다양한 인물을 통해 조명한다. ‘밥 딜런’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가 대중에게 준 이미지들이 빼곡하게 영화에 수놓아 있다. 이 영화의 7명의 ‘밥 딜런’은 그의 초상화의 균열된 자아들이다. 모두 그이기도 하고, 모두 그가 아닐 수도 있다. 오로지 확실한 ‘밥 딜런의 영화’라는 점은 그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밥 딜런’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다. 은둔자, 인권운동가, 반전운동가, 시인, 포크가수, 기독교 인 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그 누군가가 그에게 그 어떤 칭호와 그에 맞는 명성을 주려 하면, 굳이 그것을 외면하여 자신을 정의하길 꺼렸다. 그건 그가 살던 시대의 흐름 속에 변화에 따라 자신의 초상화를 계속해서 다르게 그려왔기 때문이다.
“If I wasn't Bob Dylan, I'd probably think that Bob Dylan has a lot of answers myself.”
“만약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밥 딜런 같은 사람이 나한테 해답을 줄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 밥 딜런
6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들은 미국의 부와 권력이 세계 인민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케네디가 ‘뉴 프론티어’의 깃발을 내걸었을 때 그들은 포크음악이 흑인에 대한 차별과 전쟁을 좋아하는 미국의 성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을 참전할 당시 ‘밥 딜런’은 반전 운동가였다. 케네디가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강조할 때는 앞장서서 흑인 인권을 보호하는 인권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포크가수로 자신의 이름을 저항가수로 각인시킨 것이다. 포크음악이 음악 자체의 가치를 넘어서 정부에 저항하고 정치적 힘을 가진 도구로 변질되는 것을 느끼자, 그는 과감하게 전자기타를 들고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대중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그건 마치 프랑스의 전설적인 시인 랭보가 특이한 방법론적 각성을 경험하듯,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장르 비틀기를 통해 또 다른 음악의 변주를 실험하는 음악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 후 1년 후에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 아내와 함께 뉴욕의 ‘우드스턱’에 있는 집에서 은둔자적인 생활을 경험한다. 그 후 전쟁이 종식되고 미국의 극도의 경제발전 속에 놓이면서, 과연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그의 음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에는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시적 은유가 가득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하고, 79년에는 기독교적 성향이 강한 가스펠 앨범을 발표하며 종교에 심취한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헐리웃 부흥기에는 영화배우로 몇 편의 영화에 직접 출현하기도 했고, 은둔자 생활을 할 때는 몇 권의 책을 집필한 문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밥 딜런’을 기억하는 데에는 그 시대의 이미지가 크게 자리 잡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 예술적으로나 격동의 시대를 지나왔던 60년대를 같이 부대껴온 ‘밥 딜런’은 그 시대의 저항성을 대표한다. 굵직한 사건 속에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그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것 보다는 그 시대의 이미지와 깊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방 침대에서 읽었던 위인전이 그렇게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사람의 인생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데 소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동물이라 그 누군가를 기억할 때는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이 내게 미쳤던 영향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힘든 시절에 날 위로해줬던 그분’이라고 그 어떤 이를 기억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술가 ‘밥 딜런’은 우리에게 시대에 저항했던 포크가수로 또는 그 변형시켰던 자신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Chaos is a friend of mine.”
혼돈은 나의 친구다.
-밥 딜런
충격적인 사건들이 수놓는 60년대에서 70년대를 지나온 이들은 ‘밥 딜런’을 혼돈의 시대 속에 흔들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위로해줬던 혹은 배신했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마음에 새겨 넣은 것이다.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미지를 나열하여 그가 결국에는 시대 속에 가려진 잔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영화는 그의 균열된 자아를 그리려 했지만, 정작 추구된 것은 시대의 물음과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일 뿐이다. 그가 존경했던 시인 ‘랭보’와 그가 존경했던 포크음악의 창시자 ‘우디 거스리’의 모습도 결국에는 그를 기억하는 하나의 매개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여자건 남자건 아이건 배우건 파렴치한 놈이건 잘생긴 남자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밥 딜런’이 없더라도 그의 음악이 남아 그 시대를 추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그 몫을 다한 것이다. 예술가의 영혼은 그 모습 자체보다 그가 남긴 작품의 연주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누구는 ‘밥 딜런’을 조롱하며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린 시인’이라 하더라. 옳다. 분명 옳은 말이다. 70년대 이후의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난해해지고, 시대보다는 대중과 종교를 향한 타협의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또 숨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예술가가 특정 시대의 이미지를 짊어지고 있다면, 그가 도피해버린 현실의 무게까지 우리가 다 위로해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예술가에게 영웅적 칭호를 붙일 수는 없다. 물론 그런 예술가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시대에 순응하는 예술가의 정신이야말로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음악이 음악자체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즐길 수 없는 음악을 할 것 같으면 피해버리고, 변화했다.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이미지들이 모여들어 그의 노래를 비추고, 그것이 대중의 정신을 대변한다면 그의 인생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곡예사로 표현한 이유도 자신의 현재 위치에 큰 의미를 부여하길 두려워하는 예술가의 고독이 숨어있다. 비록 그가 여기 없다 하더라도 우린 그의 노래를 귀에 꽂고 즐길 것이다.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정신세계 속에 투영되는 그 시대의 정신에 그 방점을 찍는 작품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시대의 이야기다.
“노래에 나오는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적다 해도, 사람들은 노래로 이야기한다”
-밥 딜런 (자서전 중에서)
인간 ‘밥 딜런’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 그녀, 여기 모두 없다. 그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하겠지. 뜨거운 태양에서 일하는 농부처럼 자유로웠던 자.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곡예사. 다양한 얼굴에서 그의 슬픈 눈매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겠지 아주 관조적인 시선으로. <아임 낫 데어>는 시대에 희석된 한 남자의 인생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근데 아무리 들어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몇곡을 제외하고는 밥 딜런의 음악은 정이 가질 않는다. 몇 장의 사진과 몇 장의 텍스트로 읽어 내려 온 그의 이야기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긴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자가 그 시대의 상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게 아이러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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