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저항시인으로서 전세계아랍인들의 존경을 받던 시인 마흐무드 다윗시가 67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국 휴스톤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던중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와 좌절을 탁월한 시적서정으로 발표 팔레스타인뿐만아니라 아랍 그리고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시인이었다. 아랍세계에서 노벨문학상후보 제1순위로 꼽히기도했다.
그의 시집은 2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 2백여만부가 팔렸다.이스라엘에서도 지난 2000년 그의 시를 고등학교 교과목에 넣자는 교육장관의 제안을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그의 시집이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2007. 도서출판 아시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시의 스타일은 내가 학창시절 한동안 매료되었던 김수영시인(`시여 침을 뱉어라`)의 모더니즘의 이미지가 크게 느껴지는것이었다.
그는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의해 오랜기간 투옥되기도 했고 파리및 모스크바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아라파트의장이 이끌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핵심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라파트PLO의장의 유명한 1974년 유엔총회연설(그는 총회연설시 권총을 찬모습으로 나타나 더욱 유명해졌다) `한손에는 올리브, 한손에는 총`도 그가 쓴것이었다.그는 문학의 힘을 빌어 팔레스타인의 아이덴티티를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2007년 11월중순 그와 만나 함께 저녁을 하며 팔레스타인이야기며 유태교,기독교, 이슬람교간의 종교간 화해문제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다.
그가 2007년11월초 한국의 전주에서 열렸던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심포지움에 참석한후 돌아와 요르단 암만에 머물고 있을때였다. (팔레스타인에는 국제공항이 없어 팔레스타인사람들은 외국여행시 보통 육로로 2시간거리인 인접 요르단 암만의 공항을 이용한다.)
사실 이시인을 지인의 소개로 관저만찬에 초대할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분의 명성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요르단의 보통사람들도 이시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놀라운일이었다.
한국을 다녀온 동료문인들이 함께 초대된 관저만찬에서 마후무드 다윗시는 매우 세련된 지식인 지성인의모습이었다.옷차림이며 행동거지에서 국제인으로서의 모습이 보였다.
틈틈이 그의 말에서 분노와 좌절감이 담겨져 나왔다.팔레스타인의 운명을 분단의 고통을 겪고있는 한국의 역사와 운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서구에서 테러리스트로 규탄받던 아라파트 PLO의장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뚜렸이 부각시킨 인물`로 평가하였다.갑자기 사망한 아라파트의장이 이스라엘에 의해 독살되었을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동지역에서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이유에 대해 그는 ` 선지자 (prophets)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런것 같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또 `신(GOD)은 인간들의 구체적질문에 대해 너무 추상적으로 답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신에게 조차 좌절감을 느끼는듯했다.
하여튼 나는 이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단히 세련된 스타일이면서도 무언가 좌절과 분노 반항이 배여있는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주말에 나는 이스라엘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요르단의 인접국인 이스라엘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고 또 그기회에 기독교성지들도 둘러볼 요량이었다.
나의 여행계획을 들은 마흐무드 다윗시는 이스라엘 여행시 꼭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도인 라말라(Ramallah)도 들러볼것을 권했다.자기가 현재 거주하는곳도 라말라라고 했다.이스라엘사람들은 라말라가 치안이 위험한곳이니 가지말라고 하겠지만 절대 위험하지 않은곳이니 꼭 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주말 2박3일의 이스라엘여행을 하면서( 차를몰고 킹후세인 부릿지를 넘어 이스라엘땅으로 넘어갔다.) 예루살렘과 접한 팔레스타인의 서안(West Bank)지역으로 용감히(?)들어갔다.이지역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여있었고 이스라엘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해야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역은 짐작했던데로 이스라엘지역과 비교할수없을정도로 낙후되고 어수선했다.나는 가족과 함께 라말라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산등성이 곳곳에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지어져있었고 좁은 길들로 겨우 연결되어 있었다.
라말라시내 어느쯤에서 우연히 PLO의장이었던 아라파트의 무덤과 기념관을 만났다. 갖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 묘역에 들어가 무덤을 참배하였다.무덤뒤에는 팔레스타인군인 2명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아마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갑자기 마흐무드 다윗시의 타계(2008.8.9.)소식을 들었다.요르단의 신문들이 그의 사망을 크게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가 발행하는 Int`l herald tribune도 그의 사망과 생애에 대해 크게 다루고 있었다.
그의 유해는 미국에서 비행기로 요르단땅에 도착했다. 2008.8.13.유해가 경유한 요르단공항에서 영결식이 있었다.아랍국가의 대사들이 여러명 보였다. 아시아국가의 대사로는 내가 유일했다.
그의 유해는 이어 팔레스타인의 임시수도 라말라로 옮겨져 팔레스타인국민들의 깊은 애도속에 안장되었다.미국의 CNN방송도 거의 중계하다시피 이시인의 장례광경을 보도하고 있었다.팔레스타인정부는 3일동안을 공식애도 기간으로 정했다.
혹시 다시 기회가 생겨 팔레스타인땅을 밟게되면 꼭 마후무드 다윗시의 무덤에 참배할 생각이다.이글은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는 팔레스타인의 한지성에게 보내는 나의 조사다.
팔레스타인 저항시인 마흐무드 다윗시(Mahmoud Darwish)의 죽음을 애도함.
팔레스타인 저항시인으로서 전세계아랍인들의 존경을 받던 시인 마흐무드 다윗시가 67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국 휴스톤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던중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와 좌절을 탁월한 시적서정으로 발표 팔레스타인뿐만아니라 아랍 그리고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시인이었다. 아랍세계에서 노벨문학상후보 제1순위로 꼽히기도했다.
그의 시집은 2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 2백여만부가 팔렸다.이스라엘에서도 지난 2000년 그의 시를 고등학교 교과목에 넣자는 교육장관의 제안을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그의 시집이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2007. 도서출판 아시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시의 스타일은 내가 학창시절 한동안 매료되었던 김수영시인(`시여 침을 뱉어라`)의 모더니즘의 이미지가 크게 느껴지는것이었다.
그는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의해 오랜기간 투옥되기도 했고 파리및 모스크바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아라파트의장이 이끌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핵심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라파트PLO의장의 유명한 1974년 유엔총회연설(그는 총회연설시 권총을 찬모습으로 나타나 더욱 유명해졌다) `한손에는 올리브, 한손에는 총`도 그가 쓴것이었다.그는 문학의 힘을 빌어 팔레스타인의 아이덴티티를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2007년 11월중순 그와 만나 함께 저녁을 하며 팔레스타인이야기며 유태교,기독교, 이슬람교간의 종교간 화해문제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다.
그가 2007년11월초 한국의 전주에서 열렸던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심포지움에 참석한후 돌아와 요르단 암만에 머물고 있을때였다. (팔레스타인에는 국제공항이 없어 팔레스타인사람들은 외국여행시 보통 육로로 2시간거리인 인접 요르단 암만의 공항을 이용한다.)
사실 이시인을 지인의 소개로 관저만찬에 초대할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분의 명성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요르단의 보통사람들도 이시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놀라운일이었다.
한국을 다녀온 동료문인들이 함께 초대된 관저만찬에서 마후무드 다윗시는 매우 세련된 지식인 지성인의모습이었다.옷차림이며 행동거지에서 국제인으로서의 모습이 보였다.
틈틈이 그의 말에서 분노와 좌절감이 담겨져 나왔다.팔레스타인의 운명을 분단의 고통을 겪고있는 한국의 역사와 운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서구에서 테러리스트로 규탄받던 아라파트 PLO의장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뚜렸이 부각시킨 인물`로 평가하였다.갑자기 사망한 아라파트의장이 이스라엘에 의해 독살되었을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동지역에서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이유에 대해 그는 ` 선지자 (prophets)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런것 같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또 `신(GOD)은 인간들의 구체적질문에 대해 너무 추상적으로 답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신에게 조차 좌절감을 느끼는듯했다.
하여튼 나는 이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단히 세련된 스타일이면서도 무언가 좌절과 분노 반항이 배여있는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주말에 나는 이스라엘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요르단의 인접국인 이스라엘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고 또 그기회에 기독교성지들도 둘러볼 요량이었다.
나의 여행계획을 들은 마흐무드 다윗시는 이스라엘 여행시 꼭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도인 라말라(Ramallah)도 들러볼것을 권했다.자기가 현재 거주하는곳도 라말라라고 했다.이스라엘사람들은 라말라가 치안이 위험한곳이니 가지말라고 하겠지만 절대 위험하지 않은곳이니 꼭 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주말 2박3일의 이스라엘여행을 하면서( 차를몰고 킹후세인 부릿지를 넘어 이스라엘땅으로 넘어갔다.) 예루살렘과 접한 팔레스타인의 서안(West Bank)지역으로 용감히(?)들어갔다.이지역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여있었고 이스라엘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해야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역은 짐작했던데로 이스라엘지역과 비교할수없을정도로 낙후되고 어수선했다.나는 가족과 함께 라말라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산등성이 곳곳에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지어져있었고 좁은 길들로 겨우 연결되어 있었다.
라말라시내 어느쯤에서 우연히 PLO의장이었던 아라파트의 무덤과 기념관을 만났다. 갖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 묘역에 들어가 무덤을 참배하였다.무덤뒤에는 팔레스타인군인 2명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아마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갑자기 마흐무드 다윗시의 타계(2008.8.9.)소식을 들었다.요르단의 신문들이 그의 사망을 크게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가 발행하는 Int`l herald tribune도 그의 사망과 생애에 대해 크게 다루고 있었다.
그의 유해는 미국에서 비행기로 요르단땅에 도착했다. 2008.8.13.유해가 경유한 요르단공항에서 영결식이 있었다.아랍국가의 대사들이 여러명 보였다. 아시아국가의 대사로는 내가 유일했다.
그의 유해는 이어 팔레스타인의 임시수도 라말라로 옮겨져 팔레스타인국민들의 깊은 애도속에 안장되었다.미국의 CNN방송도 거의 중계하다시피 이시인의 장례광경을 보도하고 있었다.팔레스타인정부는 3일동안을 공식애도 기간으로 정했다.
혹시 다시 기회가 생겨 팔레스타인땅을 밟게되면 꼭 마후무드 다윗시의 무덤에 참배할 생각이다.이글은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는 팔레스타인의 한지성에게 보내는 나의 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