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임:본 내용은 지난 8월초 의원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의 자료중 일부 정리 하여 올린것입니다.~
이외에 헌법소원에 관련 및 회의속기록(?)형태의 글도 있으나,상황을 파악해 가며 등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자료출처 :이종걸 의원실 -
대한민국 ‘건국60년’, 그 역사적 모순과 왜곡
한 시 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1. 머 리 말
2. 1919년 ‘임시’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3.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4.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건국60년’
5. 미국은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중요시
6. 맺 음 말
1. 머 리 말
올해가 대한민국 ‘건국60년’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는 올해가 대한민국 ‘건국60년’이 되는 해라며, 정부 주도하에 ‘건국60년기념사업추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건국60년’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계획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그 논리나 근거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건국60년’이라는 주장과 논리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1910년에서 1948년까지 38년에 걸친 민족의 역사가 단절될 우려가 있고, 이 시기에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특히 임시정부의 역사가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건국60년’은 그것이 안고 있는 역사적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축소 왜곡시킬 여지도 많다.
이 글은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모순과 왜곡의 실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부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건국60년’이라는 주장이 독립운동사를 무시하고 그 역사를 단절시키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이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 사례도 소개하려고 한다.
2. 1919년 ‘임시’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민족은 5천년 가까운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다. 오랜 역사를 유지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를 세웠고, 그것이 망하면 또다시 국가를 건립하면서 민족사의 맥을 이어왔다. 이러한 한민족의 역사에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가진 정부를 처음 세운 것은 1919년이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직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를 수립한 것이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속 조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면서, 한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국내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는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포한 것이었다. 독립국임을 선포하였으니, 독립국을 상징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월 17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였고, 4월 11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그리고 4월 23일에는 국내에서 ‘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상해로 모였다. 이들은 독립을 선포한 국내인사들이 ‘정부’를 수립하였을 것이라 여기고, 국내와 연락을 취하며 정부수립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姜大鉉이 국내에서 수립하였다는 임시정부 명단을 가지고 오자, 이를 근거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우선 대표 29명이 모여, 그 명칭을 臨時議政院이라 하였다. 의정원은 국회와 같은 것이다. 무기명투표로 의장(李東寧), 부의장(孫貞道), 서기(李光洙· 白南七)를 선출하여 의정원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國號와 官制를 정하고, 國務員을 선출하고, 憲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이라 칭하자는 申錫雨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대한민국’으로 가결하였다. 관제는 최근우가 국내에서 가지고 온 집정관제를 총리제로 바꾸자고 동의하여 가결되었다. 이어 국무원 선출에 들어가 국무총리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를 비롯한 정부의 각원을 선출하고, 申翼熙· 趙素昻· 李光洙 3명을 심사위원으로 하여 臨時憲章을 심사토록 하였다. 이들의 심사보고를 들은 후 일부 조항을 개정하여 모두 10개조로 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되었다.1)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대한제국에서 ‘帝’를 ‘民’으로 바꾼 것이다. ‘帝’를 ‘民’으로 바꾼 것은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뀐다는 의미였다. 즉 대한제국은 군주주권국가이고, 임시정부는 국민주권국가라는 말이다. 한말 이래 국민주권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뀌는 논리는 1917년 상해에서 朴殷植· 申圭植· 趙素昻 등이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한2) 大同團結宣言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멸망을 군주인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선위한 것이니, 군주가 행사하고 있던 주권을 국민이 계승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대한제국의 ‘帝’를 ‘民’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이라고 국호를 정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는 代議制와 남녀평등을 비롯하여 인민의 자유(언론·출판·집회), 권리(선거권·피선거권), 의무(교육·납세·병역) 등을 규정하였다.3)
이러한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민족의 역사를 뒤바꾼 민족사의 대전환이었다.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가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로 바뀐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럽에서는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변화하는데 수백년이 걸렸고, 수많은 피를 흘렸다. 이에 비하면 한민족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9년만에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사의 발전이 바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로 수립한 정부였다.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영토라는 요건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요건을 갖출 수 없었기에 ‘임시’로 수립한 것이고, 독립을 쟁취한 후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도는 임시헌장 제10조에 “臨時政府난 國土恢復 후 滿1個年內에 國會를 召集함”이라고 한데 나타나 있다.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국토를 회복한 후 1년 안에 국회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새롭게 출범하면서, 민주공화제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기 위한 내용을 더욱 체계화시켰다.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기본으로 하여 前文 및 58개조로 된 大韓民國臨時憲法을 다시 제정한 것이다. 이에 의해 정부의 지도체제도 대통령제로 바꾸었다.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27년여 동안 의정원을 통한 의회정치를 구현하면서, 또 헌법을 제정하여 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정착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수립 당시 임시헌장을 제정한 이래, 헌법은 모두 5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지도체제도 수립 당시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회제, 주석제 등 다양한 제도를 실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민주공화제가 정착 발전되었고, 이것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4)
3.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1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또다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후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국회에서 수립되었다. 5. 10총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로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하고, 5월 31일 국회를 개원하였다. 그리고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한민족은 5천년 가까이 역사를 유지해오면서 여러 번 국가를 수립하였지만, 똑같은 이름을 사용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1919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렇다면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왜 임시정부가 사용하던 국호를 그대로 따랐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다. 제헌헌법 전문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들 大韓國民은 己未三一運動으로 大韓民國을 建立하여 世界에 宣布한 偉大한 獨立精神을 繼承하여 이제 民主獨立國家를 再建함에 있어서 (후략)
이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근거를 밝혀 놓은 것이다. 그 내용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이를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했다.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컫는 것이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은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그것을 재건한 것이라 하겠다.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제헌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강조되었다. 특히 그것을 강조한 것은 李承晩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국회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사회를 보면서 그 첫 마디에 “大韓民國獨立民主國 第1次 會議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후략)”이라 하였고,5) 국회개원식 때 개회사를 통해, 이번 국회에서 건설하는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수립할 것을 강조하였다.
- 우리는 民族의 公選에 依하야 神聖한 使命을 띠고 國會議員 資格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職務와 權位를 行할 것이니 먼저 憲法을 制定하고 大韓獨立民主政府를 再建設하려는 것입니다. (중략) 이 民國은 己未年 三月一日에 우리 十三道代表들이 서울에 모여서 國民大會를 열고 大韓獨立民主國임을 世界에 公布하고 臨時政府를 建設하야 民主主義의 基礎를 세운 것입니다.
- 이 國會에서 建設되는 政府는 卽 己未年에 서울에서 樹立된 民國의 臨時政府의 繼承에서 이날이 二十九年만에 民國의 復活日임으로 우리는 이에 公布하며 民國年號는 己未年에서 起算할 것이요.6)
요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대한독립민주국으로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하면서, 지금 국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자고 하였다. 대한독립민주국으로 건설된 임시정부를 지금 국회에서 재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번 국회에서 건설하는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자 부활하는 것이라며, 연호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기산하고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대한민국’이란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승만은 국회의장 명의로 발행하는 공식 문서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민국’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정부가 공식 출범한 후 《官報》를 발행하면서도 연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7) 국가가 바뀌면 물론이고, 황제만 바뀌어도 연호는 달리 쓴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대한제국이란 같은 나라에서도 고종이 光武란 연호를 쓰다가 순종이 즉위하면서 隆熙라고 하였다.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이를 재건설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이 제헌헌법안 제2독회에서 국회의원들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부탁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憲法劈頭에 前文에 더 써널 것은 「우리들 大韓國民은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民族으로서 己未年 三一革命에 蹶起하여 처음으로 大韓民國政府를 世界에 宣布하였으므로 그 偉大한 獨立精神을 繼承하여 自主獨立의 祖國再建을 하기로 함」 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提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하든지 맨꼭대기에 이런 意味의 文句를 넣어서 우리의 앞길이 이렇다 하는 것을 또 三一革命의 事實을 發布하여 歷史上에 남기도록 하면 民主主義라는 오날에 있어서 우리가 自發的으로 日本에 對하여 싸워가지고 입때 盡力해 오던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와 以後의 우리 同胞들이 알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중략) 이것이 나의 要請이며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8)
이승만은 그 표현을 무엇이라고 하든지,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이를 재건한다’는 문구를 맨앞에 넣자고 하였다. 그 의도는 ‘자발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우리 동포들이 알도록 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수립한 정부라는 뜻도 들어 있다.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새로운 ‘건국’을 한다면, 그 ‘건국’은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닌 외세에 의한 것이 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할 때,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할 때 내건 현수막에도 “大韓民國政府樹立國民祝賀式”이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 임시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李承晩, 부통령 李始榮,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李範奭, 국회의장 申翼熙 등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다.9)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이시영은 수립 당시부터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신익희는 임시정부 수립 때 헌법을 제정한 인물로 내무부장으로 환국하였고, 이범석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의 참모장 출신이었다. 당(국회), 정(정부), 군(국군)의 최고 책임자가 모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건국60년’
나에게 1945년의 광복과 1948년의 제헌,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단연코 후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우리 2000년의 국가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선포했고, 국민 모두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제헌 그것의 거대한 문명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반면 1945년 8월의 광복에 나는 그리 흥분하지 않는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후대에 태어난 사람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복은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미국에 의해 제국이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광복을 맞았다고 하나 어떠한 모양새의 근대국가를 세울지, 그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빛은 1948년 8월 15일의 건국 그날에 찾아왔다. 우리도 그날에 국민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국절을 만들자.10)
이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어떤 이의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글 쓴이는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대학에 들렀다가 우연히 미국의 건국기념일(독립기념일의 착각인 듯) 행사를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도 미국과 같은 건국기념일 행사를 갖자고 하면서, “지난 60년간의 광복절을 미래지향적인 건국절로 바꾸자”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글쓴이는 1948년 광복보다 제헌헌법이 문명사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제헌헌법이 “우리 2000년 국가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선포했고, 국민 모두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데 두고 있다. 또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고 하나 근대국가를 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는 모두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민주권’을 처음 선포한 것은 제헌헌법이 아니다. 1919년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였다. 임시헌장은 10개조로 된 간단한 것이었지만, 남녀평등을 비롯하여 인민의 자유(언론· 출판· 집회), 권리(선거권· 피선거권), 의무(교육· 납세· 병역)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광복을 맞았지만 어떠한 근대국가를 세울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광복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았다.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단체나 정당에서는 그것을 '綱領’이라는 것으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大韓民國建國綱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임시정부가 광복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광복후 국민전체가 균등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정치· 경제· 교육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마련한 계획이 들어 있다.11) ‘신체의 자유’ 뿐만 아니라 ‘거주· 언론· 출판· 저작· 신앙· 집회· 시위· 통신’ 등을 비롯하여, 참정권· 선거권· 피선거권· 면비수학권· 노동권· 휴식권· 피구제권· 피보험권· 남녀평등권 등 국민의 기본권리도 마련해 놓았다.
‘건국60년’을 주장하는 논거는 대체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국민주권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는 데, 또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도 건국기념일과 건국대통령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1919년에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 정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역사가 있고, 임시정부가 1945년 8월 해방때까지 27년여 동안 정부의 조직을 유지 운영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건국대통령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이승만은 이미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분이다.
1948년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것을 정착시키고 발전시켜온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군주제 대신 공화국의 정체를 가지게 된 이유를 설명한 다음의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군주제로부터 공화제로의 전환은 아메리카 사회 내부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한 변화는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대중이 피를 흘린 결과였다. (중략) 전쟁이 끝나자 대중은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였고, 그 때문에 아메리카 사회는 평등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12)
이것이 역사의 상식이다. 역사의 대변화는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주도한 인물들이 독창적으로 하루아침에 국민주권을 채용하고 민주공화국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나 논리로도 합당치 않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건국60년’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순이다. 몇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다. 고려대학교는 2005년에 개교 100주년이라고 하여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치렀다. 고려대가 개교 100주년이라고 한 것은 1905년 李容翊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부터 연원을 따졌기 때문이다. 보성전문학교는 설립 이후 천도교 孫秉熙의 손을 거쳐, 1932년에 金性洙가 인수하였다. 그리고 교명도 보성법률상업학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종합대학 설립인가를 받고, 교명을 고려대학교라고 하였다.13) 이러한 역사를 가진 고려대는 설립자도 다르고, 학교의 이름도 바뀌었지만, 그 연원을 보성전문학교에 두고 있다. 1946년을 건학의 출발로 삼지 않는다.
연세대나 이화여대도 마찬가지다. 연세대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廣惠院에 연원을 두고, 개교기념일을 따진다.14) 광혜원은 濟衆院을 거쳐 세브란스의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도 그 연원으로 포함시켜,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연희대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화여대 역시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으로부터 이화여자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지만, 그 연원을 1886년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부터 따진다.15)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 동아일보는 1920년 3월 5일과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이후 두 신문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여러차례 정간을 당하였고, 1940년 8월 10일에는 강제로 폐간을 당하여 5년 동안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1932년 사주가 방응모로 바뀌는 변화도 있었다. 두 신문은 해방 후 다시 발행되었다. 조선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동아는 12월 1일부터 발행을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동아일보는 해방 후 복간된 날에 연원을 두지 않는다. 1920년을 창간일로 하고 있다.
누구도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그리고 조선· 동아일보가 역사를 과정하거나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역사의식이고 역사의 상식이다. ‘건국60년’은 이러한 역사의식과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더 나아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된 임시정부의 존재와 그 역사를 무시하고, 한민족 역사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5. 미국은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중요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나라다. 미국이 영국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오늘의 미연방정부를 수립하기까지 거친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은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되어 정부를 수립한 과정과 비교하면 유사한 면이 많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부터이다.16) 1763년 ‘7년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전쟁으로 인한 국가채무를 위해 인지세를 비롯하여 각종 세금을 늘려갔다. 이 과정에서 1773년 ‘보스턴차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 영국이 보복해오자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병대를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영국은 1775년 4월 군대를 파견하여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민병대를 공격하였고, 이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이 공격해오자 미국의 13개주 식민지인들은 1775년 5월 제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한 대륙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영국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3만여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진행하면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륙회의에서 독립을 선언키로 하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안을 만들었다. 대륙회의는 일부분을 수정한 후, 독립선언을 가결하고 7월 4일 “연합한 모든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이며 또 마땅히 그러한 국가들이어야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다. 대륙연합군은 증원과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1778년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의용군과 해군을 보내와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러시아· 덴마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동맹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1781년 대륙연합군과 프랑스군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 있던 영국군을 공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83년 미국은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되었다. 전쟁이 어렵게 된 영국이 식민지와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식민지측 대표인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등과 교섭하여 가조약을 맺었다. 이어서 영국은 프랑스와 교섭하여 1783년 9월 3일 파리에서 이 조약을 정식으로 승인함으로써 강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미국 13개주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독립을 승인받은 후, 1787년 5월 제헌회의라 불리는 필라델피아 회의를 개최하였다. 연방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이 이를 통해 마련되었다. 이 회의에서 기초한 헌법안을 토대로 13개주의 대표들이 타협안을 마련해갔고, 9월 17일 전문과 7조 21절로 이루어진 헌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의해 1789년 연방정부가 수립되었다. 1월 행정부 수반이 될 대통령과 입법부를 구성할 상· 하 양원 의원 선거가 각주에서 시행되었고, 4월 1일에 하원이, 4월 6일에 상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대륙연합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을 선출하였고, 그는 4월 30일 뉴욕에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13개주가 연합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되었다.
이와같이 미국인들은 1776년 7월 4일 영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1783년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789년 13개주가 연합하여 독립국가로 미합중국을 탄생시켰다. 독립선언, 독립인정, 정부수립, 이중에서 미국인들은 어떤 것을 중요시하고 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미합중국을 수립한 1789년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776년 7월 4일, 그날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해놓고, 이 날을 “Fourth of July"라 부르며 미국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과정과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815의 글]"왜 건국60년이 왜곡인가.!!
덧붙임:본 내용은 지난 8월초 의원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의 자료중 일부 정리 하여 올린것입니다.~
이외에 헌법소원에 관련 및 회의속기록(?)형태의 글도 있으나,상황을 파악해 가며 등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자료출처 :이종걸 의원실 -
대한민국 ‘건국60년’, 그 역사적 모순과 왜곡
한 시 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1. 머 리 말
2. 1919년 ‘임시’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3.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4.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건국60년’
5. 미국은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중요시
6. 맺 음 말
1. 머 리 말
올해가 대한민국 ‘건국60년’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는 올해가 대한민국 ‘건국60년’이 되는 해라며, 정부 주도하에 ‘건국60년기념사업추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건국60년’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계획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그 논리나 근거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건국60년’이라는 주장과 논리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1910년에서 1948년까지 38년에 걸친 민족의 역사가 단절될 우려가 있고, 이 시기에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특히 임시정부의 역사가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건국60년’은 그것이 안고 있는 역사적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축소 왜곡시킬 여지도 많다.
이 글은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모순과 왜곡의 실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부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건국60년’이라는 주장이 독립운동사를 무시하고 그 역사를 단절시키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이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 사례도 소개하려고 한다.
2. 1919년 ‘임시’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민족은 5천년 가까운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다. 오랜 역사를 유지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를 세웠고, 그것이 망하면 또다시 국가를 건립하면서 민족사의 맥을 이어왔다. 이러한 한민족의 역사에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가진 정부를 처음 세운 것은 1919년이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직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를 수립한 것이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속 조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면서, 한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국내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는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포한 것이었다. 독립국임을 선포하였으니, 독립국을 상징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월 17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였고, 4월 11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그리고 4월 23일에는 국내에서 ‘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상해로 모였다. 이들은 독립을 선포한 국내인사들이 ‘정부’를 수립하였을 것이라 여기고, 국내와 연락을 취하며 정부수립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姜大鉉이 국내에서 수립하였다는 임시정부 명단을 가지고 오자, 이를 근거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우선 대표 29명이 모여, 그 명칭을 臨時議政院이라 하였다. 의정원은 국회와 같은 것이다. 무기명투표로 의장(李東寧), 부의장(孫貞道), 서기(李光洙· 白南七)를 선출하여 의정원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國號와 官制를 정하고, 國務員을 선출하고, 憲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이라 칭하자는 申錫雨의 동의와 이영근의 재청으로, ‘대한민국’으로 가결하였다. 관제는 최근우가 국내에서 가지고 온 집정관제를 총리제로 바꾸자고 동의하여 가결되었다. 이어 국무원 선출에 들어가 국무총리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를 비롯한 정부의 각원을 선출하고, 申翼熙· 趙素昻· 李光洙 3명을 심사위원으로 하여 臨時憲章을 심사토록 하였다. 이들의 심사보고를 들은 후 일부 조항을 개정하여 모두 10개조로 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되었다.1)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대한제국에서 ‘帝’를 ‘民’으로 바꾼 것이다. ‘帝’를 ‘民’으로 바꾼 것은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뀐다는 의미였다. 즉 대한제국은 군주주권국가이고, 임시정부는 국민주권국가라는 말이다. 한말 이래 국민주권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뀌는 논리는 1917년 상해에서 朴殷植· 申圭植· 趙素昻 등이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한2) 大同團結宣言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故로 庚戌年 隆熙皇帝의 主權抛棄난 卽我國民同志에 對한 黙示的 禪位이니 我同志난 當然히 三寶를 繼承하야 統治할 特權이 잇고 또 大統을 相續할 義務가 有하도다. 故로 二千萬의 生靈과 三千里의 舊疆과 四千年의 主權은 吾人同志가 相續하였고 相續하난 中이오 相續할 터이니 吾人同志난 此에 對하야 不可分의 無限責任이 重大하도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멸망을 군주인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선위한 것이니, 군주가 행사하고 있던 주권을 국민이 계승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대한제국의 ‘帝’를 ‘民’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이라고 국호를 정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는 代議制와 남녀평등을 비롯하여 인민의 자유(언론·출판·집회), 권리(선거권·피선거권), 의무(교육·납세·병역) 등을 규정하였다.3)
이러한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민족의 역사를 뒤바꾼 민족사의 대전환이었다.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가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로 바뀐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럽에서는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변화하는데 수백년이 걸렸고, 수많은 피를 흘렸다. 이에 비하면 한민족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9년만에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사의 발전이 바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로 수립한 정부였다.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영토라는 요건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요건을 갖출 수 없었기에 ‘임시’로 수립한 것이고, 독립을 쟁취한 후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도는 임시헌장 제10조에 “臨時政府난 國土恢復 후 滿1個年內에 國會를 召集함”이라고 한데 나타나 있다.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국토를 회복한 후 1년 안에 국회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새롭게 출범하면서, 민주공화제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기 위한 내용을 더욱 체계화시켰다.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기본으로 하여 前文 및 58개조로 된 大韓民國臨時憲法을 다시 제정한 것이다. 이에 의해 정부의 지도체제도 대통령제로 바꾸었다.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27년여 동안 의정원을 통한 의회정치를 구현하면서, 또 헌법을 제정하여 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정착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수립 당시 임시헌장을 제정한 이래, 헌법은 모두 5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지도체제도 수립 당시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회제, 주석제 등 다양한 제도를 실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민주공화제가 정착 발전되었고, 이것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4)
3.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1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또다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후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국회에서 수립되었다. 5. 10총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로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하고, 5월 31일 국회를 개원하였다. 그리고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한민족은 5천년 가까이 역사를 유지해오면서 여러 번 국가를 수립하였지만, 똑같은 이름을 사용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1919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렇다면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왜 임시정부가 사용하던 국호를 그대로 따랐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다. 제헌헌법 전문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들 大韓國民은 己未三一運動으로 大韓民國을 建立하여 世界에 宣布한 偉大한 獨立精神을 繼承하여 이제 民主獨立國家를 再建함에 있어서 (후략)
이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근거를 밝혀 놓은 것이다. 그 내용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이를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했다.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컫는 것이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은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그것을 재건한 것이라 하겠다.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제헌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강조되었다. 특히 그것을 강조한 것은 李承晩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국회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사회를 보면서 그 첫 마디에 “大韓民國獨立民主國 第1次 會議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후략)”이라 하였고,5) 국회개원식 때 개회사를 통해, 이번 국회에서 건설하는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수립할 것을 강조하였다.
- 우리는 民族의 公選에 依하야 神聖한 使命을 띠고 國會議員 資格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職務와 權位를 行할 것이니 먼저 憲法을 制定하고 大韓獨立民主政府를 再建設하려는 것입니다. (중략) 이 民國은 己未年 三月一日에 우리 十三道代表들이 서울에 모여서 國民大會를 열고 大韓獨立民主國임을 世界에 公布하고 臨時政府를 建設하야 民主主義의 基礎를 세운 것입니다.
- 이 國會에서 建設되는 政府는 卽 己未年에 서울에서 樹立된 民國의 臨時政府의 繼承에서 이날이 二十九年만에 民國의 復活日임으로 우리는 이에 公布하며 民國年號는 己未年에서 起算할 것이요.6)
요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대한독립민주국으로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하면서, 지금 국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자고 하였다. 대한독립민주국으로 건설된 임시정부를 지금 국회에서 재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번 국회에서 건설하는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자 부활하는 것이라며, 연호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기산하고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대한민국’이란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승만은 국회의장 명의로 발행하는 공식 문서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민국’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정부가 공식 출범한 후 《官報》를 발행하면서도 연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7) 국가가 바뀌면 물론이고, 황제만 바뀌어도 연호는 달리 쓴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대한제국이란 같은 나라에서도 고종이 光武란 연호를 쓰다가 순종이 즉위하면서 隆熙라고 하였다.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이를 재건설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이 제헌헌법안 제2독회에서 국회의원들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부탁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憲法劈頭에 前文에 더 써널 것은 「우리들 大韓國民은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民族으로서 己未年 三一革命에 蹶起하여 처음으로 大韓民國政府를 世界에 宣布하였으므로 그 偉大한 獨立精神을 繼承하여 自主獨立의 祖國再建을 하기로 함」 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提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하든지 맨꼭대기에 이런 意味의 文句를 넣어서 우리의 앞길이 이렇다 하는 것을 또 三一革命의 事實을 發布하여 歷史上에 남기도록 하면 民主主義라는 오날에 있어서 우리가 自發的으로 日本에 對하여 싸워가지고 입때 盡力해 오던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와 以後의 우리 同胞들이 알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중략) 이것이 나의 要請이며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8)
이승만은 그 표현을 무엇이라고 하든지,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이를 재건한다’는 문구를 맨앞에 넣자고 하였다. 그 의도는 ‘자발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우리 동포들이 알도록 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수립한 정부라는 뜻도 들어 있다.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새로운 ‘건국’을 한다면, 그 ‘건국’은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닌 외세에 의한 것이 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할 때,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할 때 내건 현수막에도 “大韓民國政府樹立國民祝賀式”이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 임시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李承晩, 부통령 李始榮,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李範奭, 국회의장 申翼熙 등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다.9)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이시영은 수립 당시부터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신익희는 임시정부 수립 때 헌법을 제정한 인물로 내무부장으로 환국하였고, 이범석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의 참모장 출신이었다. 당(국회), 정(정부), 군(국군)의 최고 책임자가 모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건국60년’
나에게 1945년의 광복과 1948년의 제헌,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단연코 후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우리 2000년의 국가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선포했고, 국민 모두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제헌 그것의 거대한 문명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반면 1945년 8월의 광복에 나는 그리 흥분하지 않는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후대에 태어난 사람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복은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미국에 의해 제국이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광복을 맞았다고 하나 어떠한 모양새의 근대국가를 세울지, 그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빛은 1948년 8월 15일의 건국 그날에 찾아왔다. 우리도 그날에 국민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국절을 만들자.10)
이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어떤 이의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글 쓴이는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대학에 들렀다가 우연히 미국의 건국기념일(독립기념일의 착각인 듯) 행사를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도 미국과 같은 건국기념일 행사를 갖자고 하면서, “지난 60년간의 광복절을 미래지향적인 건국절로 바꾸자”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글쓴이는 1948년 광복보다 제헌헌법이 문명사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제헌헌법이 “우리 2000년 국가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선포했고, 국민 모두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데 두고 있다. 또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고 하나 근대국가를 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는 모두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민주권’을 처음 선포한 것은 제헌헌법이 아니다. 1919년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였다. 임시헌장은 10개조로 된 간단한 것이었지만, 남녀평등을 비롯하여 인민의 자유(언론· 출판· 집회), 권리(선거권· 피선거권), 의무(교육· 납세· 병역)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광복을 맞았지만 어떠한 근대국가를 세울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광복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았다.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단체나 정당에서는 그것을 '綱領’이라는 것으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大韓民國建國綱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임시정부가 광복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광복후 국민전체가 균등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정치· 경제· 교육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마련한 계획이 들어 있다.11) ‘신체의 자유’ 뿐만 아니라 ‘거주· 언론· 출판· 저작· 신앙· 집회· 시위· 통신’ 등을 비롯하여, 참정권· 선거권· 피선거권· 면비수학권· 노동권· 휴식권· 피구제권· 피보험권· 남녀평등권 등 국민의 기본권리도 마련해 놓았다.
‘건국60년’을 주장하는 논거는 대체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국민주권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는 데, 또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도 건국기념일과 건국대통령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1919년에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 정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역사가 있고, 임시정부가 1945년 8월 해방때까지 27년여 동안 정부의 조직을 유지 운영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건국대통령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이승만은 이미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분이다.
1948년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것을 정착시키고 발전시켜온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군주제 대신 공화국의 정체를 가지게 된 이유를 설명한 다음의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군주제로부터 공화제로의 전환은 아메리카 사회 내부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한 변화는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대중이 피를 흘린 결과였다. (중략) 전쟁이 끝나자 대중은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였고, 그 때문에 아메리카 사회는 평등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12)
이것이 역사의 상식이다. 역사의 대변화는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주도한 인물들이 독창적으로 하루아침에 국민주권을 채용하고 민주공화국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나 논리로도 합당치 않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건국60년’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순이다. 몇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다. 고려대학교는 2005년에 개교 100주년이라고 하여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치렀다. 고려대가 개교 100주년이라고 한 것은 1905년 李容翊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부터 연원을 따졌기 때문이다. 보성전문학교는 설립 이후 천도교 孫秉熙의 손을 거쳐, 1932년에 金性洙가 인수하였다. 그리고 교명도 보성법률상업학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종합대학 설립인가를 받고, 교명을 고려대학교라고 하였다.13) 이러한 역사를 가진 고려대는 설립자도 다르고, 학교의 이름도 바뀌었지만, 그 연원을 보성전문학교에 두고 있다. 1946년을 건학의 출발로 삼지 않는다.
연세대나 이화여대도 마찬가지다. 연세대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廣惠院에 연원을 두고, 개교기념일을 따진다.14) 광혜원은 濟衆院을 거쳐 세브란스의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도 그 연원으로 포함시켜,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연희대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화여대 역시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으로부터 이화여자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지만, 그 연원을 1886년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부터 따진다.15)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 동아일보는 1920년 3월 5일과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이후 두 신문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여러차례 정간을 당하였고, 1940년 8월 10일에는 강제로 폐간을 당하여 5년 동안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1932년 사주가 방응모로 바뀌는 변화도 있었다. 두 신문은 해방 후 다시 발행되었다. 조선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동아는 12월 1일부터 발행을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동아일보는 해방 후 복간된 날에 연원을 두지 않는다. 1920년을 창간일로 하고 있다.
누구도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그리고 조선· 동아일보가 역사를 과정하거나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역사의식이고 역사의 상식이다. ‘건국60년’은 이러한 역사의식과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더 나아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된 임시정부의 존재와 그 역사를 무시하고, 한민족 역사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5. 미국은 정부 수립보다 독립기념일을 중요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나라다. 미국이 영국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오늘의 미연방정부를 수립하기까지 거친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은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되어 정부를 수립한 과정과 비교하면 유사한 면이 많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부터이다.16) 1763년 ‘7년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전쟁으로 인한 국가채무를 위해 인지세를 비롯하여 각종 세금을 늘려갔다. 이 과정에서 1773년 ‘보스턴차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 영국이 보복해오자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병대를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영국은 1775년 4월 군대를 파견하여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민병대를 공격하였고, 이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이 공격해오자 미국의 13개주 식민지인들은 1775년 5월 제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한 대륙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영국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3만여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진행하면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륙회의에서 독립을 선언키로 하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안을 만들었다. 대륙회의는 일부분을 수정한 후, 독립선언을 가결하고 7월 4일 “연합한 모든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이며 또 마땅히 그러한 국가들이어야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다. 대륙연합군은 증원과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1778년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의용군과 해군을 보내와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러시아· 덴마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동맹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1781년 대륙연합군과 프랑스군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 있던 영국군을 공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83년 미국은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되었다. 전쟁이 어렵게 된 영국이 식민지와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식민지측 대표인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등과 교섭하여 가조약을 맺었다. 이어서 영국은 프랑스와 교섭하여 1783년 9월 3일 파리에서 이 조약을 정식으로 승인함으로써 강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미국 13개주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독립을 승인받은 후, 1787년 5월 제헌회의라 불리는 필라델피아 회의를 개최하였다. 연방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이 이를 통해 마련되었다. 이 회의에서 기초한 헌법안을 토대로 13개주의 대표들이 타협안을 마련해갔고, 9월 17일 전문과 7조 21절로 이루어진 헌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의해 1789년 연방정부가 수립되었다. 1월 행정부 수반이 될 대통령과 입법부를 구성할 상· 하 양원 의원 선거가 각주에서 시행되었고, 4월 1일에 하원이, 4월 6일에 상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대륙연합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을 선출하였고, 그는 4월 30일 뉴욕에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13개주가 연합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되었다.
이와같이 미국인들은 1776년 7월 4일 영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과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1783년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789년 13개주가 연합하여 독립국가로 미합중국을 탄생시켰다. 독립선언, 독립인정, 정부수립, 이중에서 미국인들은 어떤 것을 중요시하고 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미합중국을 수립한 1789년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776년 7월 4일, 그날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해놓고, 이 날을 “Fourth of July"라 부르며 미국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과정과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