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다. 한적한 교외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데도 불안감은 떨쳐지질 않는다. 매력적인 아내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고양이와 가정을 꾸린 이 남자에게 불안한 기운이 감지될 만한 요인은 없다. 다만 마음이 쓰이는 것이 있다면 창밖의 사내들이다. 자신의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보내는 그들의 웃음에 남자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순간에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내제된 그 무언가가 두렵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샘 페킨파’ 감독을 알아야 한다. '폭력 미학의 거장', '폭력의 피카소', '피 흘리는 샘' 등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폭력과는 뗄 수 없는 모든 영화인들의 영화 스승이며, 현대 영화에 처음으로 폭력을 화두로 끌어들인 작가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부터 폭력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믿음아래 그가 수놓는 핏빛 필름들은 실제로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눈에 불을 키고 그를 추종하게 만들었고, 그의 영화는 아직도 많은 영화학도가 탐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어둠의 표적>은 그가 하고픈 말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 미학의 정점 '샘 페킨파'감독.
한 부부가 복잡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교외의 한적한 2층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비드’(더스틴 호프만 분)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거라는 기대로 한껏 들떠있다. 또한 그의 부인 ‘에이미’는 한적한 교외의 2층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적이고 세련된 외모를 가진 여자다. 못 하나 박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심약한 성격의 수학자 ‘데이비드’는 집안의 일을 거들어 줄 인부들을 고용하게 된다. 건장한 체구의 네 명의 남자들은 그때부터 집 안의 두 부부와 대치를 이루며 불안한 동거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공간은 한적한 교외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곳이라는 설정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깊다. 창밖을 통해 대치된 마을 사내들의 시선은 집 안과 밖의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을 때 과연 지켜줄 그 누군가가 존재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인부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느끼는 집 안 부부의 불안한 심리가 두드러지고, 창 밖과 창 안을 들여다보는 시퀀스 자주 등장한다. 욕정이 가득한 시선에 노출된 아내 ‘에이미’는 그 불안함을 남편에게 경고하지만 갈등을 원치 않는 이성적인 남편 ‘데이비드’는 아내의 경고를 애써 무시한다. 남자는 현재의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상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집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이미의 관능적인 몸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인부들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시작된 본능의 꿈틀거림을 남자는 알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은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린다.
60년대 미국사회는 집이라는 공간을 소유와 안정의 공간으로 굳게 믿었다. 불안한 사회상황 즉 전쟁과 인권문제, 물가폭등, 대통령 암살, 비리, 부정부패와 미디어의 선동에 의해 사람들의 심리는 극도로 뒤틀려 있었다. 그렇기에 퇴근 후의 3시간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은 그들의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어둠의 표적>은 오로지 창밖의 시선만으로 집이라는 공간을 가장 불안한 공간으로 뒤바꿔 버림으로서 이 부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관객이 믿는 안정성을 무너뜨림으로서 극의 발단으로서 충분한 기능을 한다.
두 번째 폭력은 바로 성적인 폭력이다. 시선의 폭력이 포괄되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의 정점은 바로 인부들이 에이미를 강간할 때이다. 남편이 인부들에게 속아 부재한 사이에 벌어지는 성폭력은 집 안에서 행해졌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이 시선을 통해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에이미’와 남자들은 동물적인 섹스를 한다. 강간이 아닌 섹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에이미의 동조에 있다. 감독의 문제 많은 여성편력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이 씬이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추구하려는 마지막 폭력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의 본성이자 동물적인 내제된 폭력성이다.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못했을 때의 마초들의 폭력성과 그에 동조하는 여자의 동물적인 욕정이 집 안을 뒤덮는다.
그가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남기려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 안에 내제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믿음은 강간이 섹스가 되는 아이러니를 감수한다. 남편은 털레털레 인부들에게 속아 사냥을 한 자신의 바보 같음을 탓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부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체 그는 뒤틀려버린 자신의 일상을 점검하기 바쁘다. 부인은 남편에게 강간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녀가 암묵적으로 그 섹스에 동조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보고, 성직자의 말을 듣지만 폭력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제된 두 부부의 폭력성은 벌써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 인부들과 집이라는 공간을 거점으로 남편 데이비드와 인부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폭력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이성적인 데이비드는 점점 자신의 내제된 폭력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지켜야 할 집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본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여자는 그들에게 범해졌음을 모르고,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집이라는 공간에 그는 집착한다. 지키려는 것과 해치려는 상대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영화는 폭력에 물든 이 사회에 홀로 남은 인간의 단상을 그리며 끝을 낸다. 집을 침범하려는 인부들을 모두 죽인 후 데이비드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다 죽이고 말았어.’ 그건 외부의 폭력을 지킨 내부자의 영웅적 멘트가 분명 아니다. 그는 드러내지 말았어야 할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들켜버린 괴수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는 마치 서부극과 같은 마초들의 이미지를 자주 보여준다.
이 영화 전반에 깔린 허무주의와 함께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들은 감독이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목맨 고양이와 미치광이 노인 그리고 짧은 치마의 여인들과 마초적인 느낌을 지닌 사내들까지 모두 의도적인 ‘장치’임을 그는 적절한 플레시 백과 음향효과를 통해 전달한다. 그의 영화에는 케릭터의 구성과 공간의 미학이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짙게 색칠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공간이 주는 효과들도 눈여겨 볼만한다.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은 바(bar)에서의 씬은 남성 권력의 암투와 함께 정치적인 느낌까지 강하게 풍기며 폭력의 내제성이라는 이 영화의 숨겨진 폭력의 이미지를 구성한다.(실제 페킨파 감독은 서부극을 자주 연출했다.) 눈빛과 눈빛이 서로를 경계하며 서로가 서로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폭력들은 권력과 힘의 폭력을 힘의 모든 것이라 믿는 인류의 어리석음을 지탄한다. 날 것의 폭력과는 다른 현 시대의 정치적 폭력까지 이 영화에 끌어들이려는 감독의 의중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수학자인 남편 데이비드의 서재에서는 사랑스런 부인 에이미가 철저히 무시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을 한 낫 오락거리로 격하시키는데 효과를 한다. 공간에 하나의 성격을 지정하고는 그것에 맡는 인물의 변화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인물의 성격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통제된 이 사회의 단면을 제대로 관통하는 것 같아서 훌륭한 구성으로 보이게끔 한다.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가 이 영화를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만연한 폭력이 이제는 면역이 되어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 도래했다. 그런 면에서 ‘샘 페킨파’의 이 오래된 영화는 폭력 미학을 통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을 신날하게 비판하여 마음을 찌른다. 특히 ‘더스틴 호프먼’은 점점 드러나는 자신의 폭력성에도 안경을 다잡으며 침착해지려는 인간 ‘데이비드’를 소름 돋게 연기한다. 젊은 카리스마를 뿜는 그의 싱싱한 모습이 정겹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참으로 구경할 것들이 많다. 매번 볼 때마다 극에 심취해서 잘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여러 가지에서 참 꼼꼼하게 ‘샘 페틴파’는 자신의 폭력 미학을 완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점 자극적인 것이 익숙한 것이 되면서 그의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소중한 부분은 핏빛 유혹도 아니고, 성적인 자극도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인간 본연의 내제된 폭력성을 끄집어내려는 한 영화인의 고뇌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30년도 넘은 영화 <어둠의 표적>의 치밀한 영화적 완성도를 느끼면서 순수한 영화인의 숨결을 느꼈다.
어둠의 표적 ( Straw Dogs, 1971 )
어둠의 표적 ( Straw Dogs, 1971)
감독 : 샘 페킨파
주연 : 더스틴 호프만
통제되지 않는 폭력이 주는 단상.
불안하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다. 한적한 교외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데도 불안감은 떨쳐지질 않는다. 매력적인 아내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고양이와 가정을 꾸린 이 남자에게 불안한 기운이 감지될 만한 요인은 없다. 다만 마음이 쓰이는 것이 있다면 창밖의 사내들이다. 자신의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보내는 그들의 웃음에 남자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순간에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내제된 그 무언가가 두렵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샘 페킨파’ 감독을 알아야 한다. '폭력 미학의 거장', '폭력의 피카소', '피 흘리는 샘' 등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폭력과는 뗄 수 없는 모든 영화인들의 영화 스승이며, 현대 영화에 처음으로 폭력을 화두로 끌어들인 작가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부터 폭력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믿음아래 그가 수놓는 핏빛 필름들은 실제로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눈에 불을 키고 그를 추종하게 만들었고, 그의 영화는 아직도 많은 영화학도가 탐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어둠의 표적>은 그가 하고픈 말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 미학의 정점 '샘 페킨파'감독.
한 부부가 복잡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교외의 한적한 2층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비드’(더스틴 호프만 분)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거라는 기대로 한껏 들떠있다. 또한 그의 부인 ‘에이미’는 한적한 교외의 2층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적이고 세련된 외모를 가진 여자다. 못 하나 박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심약한 성격의 수학자 ‘데이비드’는 집안의 일을 거들어 줄 인부들을 고용하게 된다. 건장한 체구의 네 명의 남자들은 그때부터 집 안의 두 부부와 대치를 이루며 불안한 동거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공간은 한적한 교외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곳이라는 설정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깊다. 창밖을 통해 대치된 마을 사내들의 시선은 집 안과 밖의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을 때 과연 지켜줄 그 누군가가 존재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인부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느끼는 집 안 부부의 불안한 심리가 두드러지고, 창 밖과 창 안을 들여다보는 시퀀스 자주 등장한다. 욕정이 가득한 시선에 노출된 아내 ‘에이미’는 그 불안함을 남편에게 경고하지만 갈등을 원치 않는 이성적인 남편 ‘데이비드’는 아내의 경고를 애써 무시한다. 남자는 현재의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상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집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이미의 관능적인 몸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인부들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시작된 본능의 꿈틀거림을 남자는 알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은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린다.
60년대 미국사회는 집이라는 공간을 소유와 안정의 공간으로 굳게 믿었다. 불안한 사회상황 즉 전쟁과 인권문제, 물가폭등, 대통령 암살, 비리, 부정부패와 미디어의 선동에 의해 사람들의 심리는 극도로 뒤틀려 있었다. 그렇기에 퇴근 후의 3시간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은 그들의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어둠의 표적>은 오로지 창밖의 시선만으로 집이라는 공간을 가장 불안한 공간으로 뒤바꿔 버림으로서 이 부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관객이 믿는 안정성을 무너뜨림으로서 극의 발단으로서 충분한 기능을 한다.
두 번째 폭력은 바로 성적인 폭력이다. 시선의 폭력이 포괄되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의 정점은 바로 인부들이 에이미를 강간할 때이다. 남편이 인부들에게 속아 부재한 사이에 벌어지는 성폭력은 집 안에서 행해졌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이 시선을 통해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에이미’와 남자들은 동물적인 섹스를 한다. 강간이 아닌 섹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에이미의 동조에 있다. 감독의 문제 많은 여성편력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이 씬이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추구하려는 마지막 폭력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의 본성이자 동물적인 내제된 폭력성이다.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못했을 때의 마초들의 폭력성과 그에 동조하는 여자의 동물적인 욕정이 집 안을 뒤덮는다.
그가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남기려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 안에 내제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믿음은 강간이 섹스가 되는 아이러니를 감수한다. 남편은 털레털레 인부들에게 속아 사냥을 한 자신의 바보 같음을 탓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부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체 그는 뒤틀려버린 자신의 일상을 점검하기 바쁘다. 부인은 남편에게 강간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녀가 암묵적으로 그 섹스에 동조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보고, 성직자의 말을 듣지만 폭력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제된 두 부부의 폭력성은 벌써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 인부들과 집이라는 공간을 거점으로 남편 데이비드와 인부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폭력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이성적인 데이비드는 점점 자신의 내제된 폭력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지켜야 할 집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본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여자는 그들에게 범해졌음을 모르고,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집이라는 공간에 그는 집착한다. 지키려는 것과 해치려는 상대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영화는 폭력에 물든 이 사회에 홀로 남은 인간의 단상을 그리며 끝을 낸다. 집을 침범하려는 인부들을 모두 죽인 후 데이비드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다 죽이고 말았어.’ 그건 외부의 폭력을 지킨 내부자의 영웅적 멘트가 분명 아니다. 그는 드러내지 말았어야 할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들켜버린 괴수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는 마치 서부극과 같은 마초들의 이미지를 자주 보여준다.
이 영화 전반에 깔린 허무주의와 함께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들은 감독이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목맨 고양이와 미치광이 노인 그리고 짧은 치마의 여인들과 마초적인 느낌을 지닌 사내들까지 모두 의도적인 ‘장치’임을 그는 적절한 플레시 백과 음향효과를 통해 전달한다. 그의 영화에는 케릭터의 구성과 공간의 미학이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짙게 색칠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공간이 주는 효과들도 눈여겨 볼만한다.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은 바(bar)에서의 씬은 남성 권력의 암투와 함께 정치적인 느낌까지 강하게 풍기며 폭력의 내제성이라는 이 영화의 숨겨진 폭력의 이미지를 구성한다.(실제 페킨파 감독은 서부극을 자주 연출했다.) 눈빛과 눈빛이 서로를 경계하며 서로가 서로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폭력들은 권력과 힘의 폭력을 힘의 모든 것이라 믿는 인류의 어리석음을 지탄한다. 날 것의 폭력과는 다른 현 시대의 정치적 폭력까지 이 영화에 끌어들이려는 감독의 의중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수학자인 남편 데이비드의 서재에서는 사랑스런 부인 에이미가 철저히 무시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을 한 낫 오락거리로 격하시키는데 효과를 한다. 공간에 하나의 성격을 지정하고는 그것에 맡는 인물의 변화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인물의 성격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통제된 이 사회의 단면을 제대로 관통하는 것 같아서 훌륭한 구성으로 보이게끔 한다.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가 이 영화를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만연한 폭력이 이제는 면역이 되어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 도래했다. 그런 면에서 ‘샘 페킨파’의 이 오래된 영화는 폭력 미학을 통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을 신날하게 비판하여 마음을 찌른다. 특히 ‘더스틴 호프먼’은 점점 드러나는 자신의 폭력성에도 안경을 다잡으며 침착해지려는 인간 ‘데이비드’를 소름 돋게 연기한다. 젊은 카리스마를 뿜는 그의 싱싱한 모습이 정겹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참으로 구경할 것들이 많다. 매번 볼 때마다 극에 심취해서 잘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여러 가지에서 참 꼼꼼하게 ‘샘 페틴파’는 자신의 폭력 미학을 완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점 자극적인 것이 익숙한 것이 되면서 그의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소중한 부분은 핏빛 유혹도 아니고, 성적인 자극도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인간 본연의 내제된 폭력성을 끄집어내려는 한 영화인의 고뇌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30년도 넘은 영화 <어둠의 표적>의 치밀한 영화적 완성도를 느끼면서 순수한 영화인의 숨결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