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deo modigliani

김선미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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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 [Modigliani, Amedeo, 1884.7.12~1920.1.24]

요약
이탈리아의 화가.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이탈리아 리보르노
주요작품 《첼로를 켜는 사람》(1910)

 

 

이탈리아의 화가(1884~1920). 고독한 영혼의 화가로 이름이 났으며, 초기에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초상화와 나부 상(像)이 많다. 작품에 , 따위가 있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kind=korean&docid=13556600

 

 

 

 

35세란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만큼 인생이 미화되고 전설화된 작가도 드물다. 모디(모딜리아니)를 따라 오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만삭의 임신부 잔느 에뷰테른 (Jeanne Hebuterne)의 순애보도 신화적 전설에 기여했겠지만, 화가가 죽고난 다음에야 그의 작품의 진가가 비로소 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모디가 죽기 삼년 전인 1917년, 파리에서 닭 한마리도 10프랑에 팔렸는데 모디의 드로잉은 5프랑에 팔렸다. 밥값 대신 그림을 받은 어느 음식점 주인이 화가 나서 모디 그림에 국수가락을 내던졌다고 할 만큼 그의 그림은 과소평가 되었다.

가난에 쪼들린 그의 말로는 죽기 전에 애인 잔느가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을 만큼 비참했던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그의 그림값은 갑자기 뛰어올라 15년만에 오십만 프랑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그림은 몇 천만 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비극적인 35년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성이 확실한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항간에서는 누드 화가로 구설수에 오를 만큼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참신한 멋의 초상화가로 보는 것이 옳바른 평가이다. 그의 누드가 애호를 받는 것도 탄력있는 여성의 육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개성이 확실한 예쁜 얼굴 표정 때문이다.




외롭고 고단한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

모디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디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제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디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디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그린 [누드공부]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디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모디가 죽자 뒤를 따라 자살할 만큼 그를 사랑한 잔느 에뷰테른을 만난 것은 1917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디는 서른세 살이었다. 그들은 화가나 미술학도가 다니는 미술학교 아카데미 콜라르시에서 알게 되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디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착하고 순정적인 잔느는 술과 마약에 시달리는 모디와는 달리 절제된 생활을 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라로통드로 찾아가 만취한 남편을 찾아오곤 했다. 잔느와 함께 동거하면서도 모디가 다른 여자로부터 애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잔느는 1918년 11월 29일에 후에 커서 [모딜리아니라는 남자의 신화]란 전기를 쓴 딸 지오바니를 낳았는데, 시청에 출생신고를 하거 가던 모디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한 잔 한다는 것이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버려 그 날 결국 딸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내닫고 있었다.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 영양상태는 엉망인데다가 술, 담배와 무절제한 생활은 그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의 방탕함을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재촉했다. 모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잔느는 속수무책인 채 넋나간 사람마냥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를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안에서 환자는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고, 이젤엔 오일이 채 마르지 않은 바르고니의 초상이 미완성인 채 남겨져 있었다. 모디는 의식이 몽롱한 채, "나는 딸이 크는 것조자 보지 못하고 죽는다.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이태리여! 내가 죽으면 잔느는 친구 수탄하고 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생전의 모디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1920년 1월 24일 저녁 8시 50분에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다음날 아침,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러 병원에 간 잔느는 오랫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시체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쳐 영안실을 나왔다. 겁이 난 그녀의 부모는 실신상태에 있는 잔느를 집에 데려다 오층 식모방에 가두어 놓고는 남동생 앙드레로 하여금 밤새 누나 곁은 떠나지 않고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잔느에게는 자살할 각오가 서 있었다. 결단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동생이 잠깐 조는 큼을 타 오층 창밖으로 임신 9개월의 몸을 내던졌다. 허공에서 날린 그녀의 몸은 무참하게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잔느는 순결과 희생, 그리고 생명까지 던져 모디를 사랑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인이었다.

모디의 장례식은 비참한 그의 생애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다. 온통 꽃에 파묻힌 그의 관이 실린 영구차의 뒤에는 파리의 유명한 모든 화가들이 뒤를 따랐다. 피카소, 데리앵, 우틸로, 작크 립시츠, 키슬링, 올티즈, 자라데, 부랑빙 ... 수도 헤아릴 수 없는 화가들이 페르 라쉐즈 묘지로 가는 슬픈 행렬을 이룬 것이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 1920)

1884년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으며,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으니 그의 몸은 허약한 선천성을 부여받은 셈이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했던 모딜리아니는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17살이 되던 해에는 폐병이 재발하여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예술적인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유발하기 시작했다. 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를 얘기할 때면 여러 가지 평들이 거론되곤 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 등장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은 ‘오직 모딜리아니에 의해서만이 표현될 수 있다' 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20세기의 빼어난 화가임에 틀림없다. 모딜리아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화가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람이다. 그는 초상화나 나부화, 그리고 모두 인물이나 인체를 그렸다. 하물며 조각품도 모두 사람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을 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난폭하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비관적인 생활 속에서도 그의 붓끝에서는 따스한 애정과 연민 속에 탄생된 다양한 인물들이 호흡을 이어간다. 에꼴 드 파리는 파리화파라고도 하는데 20세기초에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몰려 든 이방인 화가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공통적인 양식을 추구한 화가들이 아니고 예술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한 화가들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아름다운 사랑얘기와 함께 방랑자적인 예술가 기질로 유명하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전세계 화가들의 발걸음은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술인의 낙원 파리. 모딜리아니는 이 낙원의 도시 파리를 풍미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로 불린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인 잔느 에뷔테른느가 이어서 자살했다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에뷔테른느는 임신 5개월인 채로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날 5층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모딜리아니만의 이 독특한 캐릭터들은 모딜리아니가 원래 조각가를 꿈꿔 왔고 아프리카 원시조각들의 형태들이 회화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또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형태를 왜곡시켰지만 가면 같고 평면적인 양식을 통해서도 절묘하게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모딜리아니의 탁월한 예술성을 입증해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없는 배경을 통해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이처럼 독특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흔한 초상화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만큼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기 때문인데, 그는 작품 속에서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였다.


1.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의 특징은 인체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자신?4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수많은 인물들을 그려냈던 모딜리아니. 그는 모델들을 화폭 속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재탄생 시키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모딜리아니상'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같은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 데는 인물을 그리면서 그가 지닌 몇 가지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 인체 표현

모딜리아니는 단순화된 형태와 부드러운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큰 타원형으로 몸을 그리고 , 작은 타원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리면 기본 형태가 갖춰진다. 즉 모딜리아니는 작품의 기본 윤곽을 단순한 형태로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형태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선의 표현을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미술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가 화가로 입문할 당시 익혔던 고전 미술에 대한 감동이 잠재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3. 목의 표현

모딜리아니가 탄생시킨 인물상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목의 표현이다. 모딜리아니는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렸다. 이는 그가 그린인물들이 갖는 독창적인 이미지였다. 길고 가는 목의 표현은 원시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영향에서 비롯되는데, 그 중에서 인체를 길게 왜곡시켜서 그린 매너리즘 화가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양식의 영향으로 완성된 모딜리아니상은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양식으로 자칫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기 쉽지만,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저마다의 개성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모델을 그리면서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심리적인 상태를 잘 그려냈기 때문이며, 그 심리 상태는 눈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4. 눈의 표현

모딜리아니가 그린 눈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비뚤어져 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심리상태와 모델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눈이나 표정 등에 섬세한 정성을 기울였다.

 



철저한 고독 속에서 36세로 요절한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몽파르나스 시대의 친구인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은 《모딜리아니의 정열적 생애》에서, 모딜리아니를 가리켜 “한 사람의 외톨이”, 또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나이”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젊은 날의 모딜리아니가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주와 기행의 숱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가장 치열한 예술과의 투쟁을 벌인 고독한 내면적 존재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똑같은 유태인이며 몽마르트 시대 이래의 예술적 동지였던 막스 자콥 또한 말년의 모딜리아니에게서는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지만 모딜리아니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에 대해 뜨겁고 깊은 애정을 한없이 기울인 드문 화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줄곧 초상화를 그렸고,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루에 1백 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이 데생과 조각과 유화의 세 부문에 걸쳐 빼어난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초상화 부문에서이다. 등 일련의 나부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남불 니스에서 요양할 때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그의 회화 작업 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과 혼과 손으로 재구성한 초상화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놓기도 하고,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쉼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간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1906년 파리에 왔을 때,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예술 동지였던 시인과 화가들, 키슬링·막스 자콥·수틴·앙드레 살몽·호안 그리즈·피카소·블라맹크·블레즈 상드라르 …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러한 초상화들 가운데 (1917)이 있다. 이 초상화 속에서의 시인은 프록코트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하얀 행커치프를 슬쩍 꼽고 있는 약간 뽐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확실히 콕토라는 시인에게는 이러한 멋부리기의 아니꼬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에서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시인의 나비 넥타이와 행커치프가 아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의 손이다.
왠지 연약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신경과 감각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길다란 손’의 모습. 이른바 보들레르가 데생에 대해 정의하면서 ‘위대한 의지’ 와 ‘섬세성’()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막스 자콥이 데생을 가리켜 하나의 ‘형태의 의지’ 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의지’와 ‘섬세성’이, 모딜리아니가 묘사하고 있는 콕토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에세이를 썼다. 거기에서 콕토는 조셉 바라 거리에 있는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모딜리아니가 “유채로 나의 초상을 그려 주었던 시기에 우리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고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화가를 위해서 3시간이 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화가는 시인의 특징적 인상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려 나갔던 것이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최고의 엘레강스이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귀족이다. 마치 유령의 선(線)처럼 보이는 핏기 없는 그의 선은 결코 서투름에 빠진 적이 없다. 그의 선은 샴 고양이의 부드러움으로 서투름에서 벗어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 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 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 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라 로통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쉼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초상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감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에피소드들은 로맨틱한 전설을 만들어 내고, 애수에 젖게 하는 소설 같은 감동적 이야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허황한 전설을 꾸며 낸 호사스런 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콕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객을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비슷비슷한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그런 화가가 아니고 “객석에 앉아서 손금을 보는 존엄한 집시”로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 따위는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과 혼과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생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한다.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방랑기사들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 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의 색깔 중에서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이 ‘파란 색의 신비’이다. 등,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왠지 청색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특히 (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한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한 친구인 음악가 마리오 바르보리를 그린 데생에서 넘쳐 흐르는 신생(新生)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음을 예감한 인간의 환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_ 월간미술



 

 
모딜리아니 작품 갤러리 www.youth.co.kr/rs/rs03001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