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로 실내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그림의 구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았고, 순수하고 개성적인 색채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다양한 형태와 표면에 작용하는 햇빛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에는 자화상인 [회화의 우의](1665경)가 있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시 장터에서 자기 집안이 경영하던 여인숙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그 도시에서 살았다. 델프트에 보관되어 있는 공문서에 따르면 그는 1653년 4월 5일에 결혼했고 같은 해 12월에 화가 길드에 가입했다. 그가 생전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1663년에 그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델프트에 간 바타자르 드 몽코니라는 프랑스인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베르메르는 1662-63, 1670-71년에 화가 길드의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기보다는 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일로 가족을 부양한 것 같다.
이 조용한 남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 빈약한 기록에 따르면 베르메르는 빵집 주인, 식료품가게 주인들과 함께 살았고, 이 상인들은 그의 그림을 외상에 대한 담보로 받았다. 그는 가게 주인들 틈에서 작품을 계속했는데, 이웃에 사는 장사꾼들은 그에게 껍질이 단단하고 윤기 있는 빵과 우유를 비롯한 물질적인 영양을 공급해주었고, 그는 [식모] 같은 그림처럼 물질적인 음식물에 정신적인 차원을 덧붙였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귀족사회와 중상류층 사회도 묘사했는데 이런 그림에서는 세련된 귀부인들이 편지를 읽거나 레이스를 뜨며 신사를 맞이한다. 또한 음악을 듣거나 철학과 문학을 접하며, 객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다.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의 배경은 값비싼 양탄자와 훌륭한 악기, 수놓은 드레스와 화려한 겉옷, 담비 모피와 비단, 진주와 은식기가 있는 호화로운 실내이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상류사회의 인물들을 대체로 진주의 무게를 달고 있거나 시와 천문학, 음악과 지리학에 몰두하는 인물들로 재창조했다. 그들은 닫혀 있는 우주의 영웅들로서 이 소우주에서는 자연광과 반사광의 점진적 색조 변화가 극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다. 현실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현실을 채로 거르는 것을 정제라고 한다면 베르메르는 그림들은 정제된 삶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메르는 인생은 신비에 싸여 있어서 수많은 해석을 낳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그의 인생을 너무 좁게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술사가인 레지널드 H.빌렌스키는 그가 광학 기구와 거울을 이용하여 시야를 넓히려고 애쓴 실험실의 연구가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그를 가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낸 사람으로 보았으며, 그의 그림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에서 그의 아내인 카타리나 베르메르를 찾아냈다. 이 2가지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둘 다 그를 은둔가로 묘사한 점에서는 같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화가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방안에 갇힌 채 그림의 주제로부터 그를 격리시키고 있는 모든 사물들을 자신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려운 계획을 도와주는 지지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대상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한 예술가의 영상이 떠오른다. 베르메르가 그린 유명한 2점의 풍경화는 둘 다 창문을 통해 보고 그렸다는 사실을 여기에 덧붙여두어야겠다. 베르메르는 [회화의 우의]에서 등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렸는데 그가 이런 의자에 붙박인 듯 앉아서 그림을 그린 것이 어떤 신체적 결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가까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기 때문이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의문은 놀랄 만큼 빈틈없고 뛰어난 그의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의 화가들에게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빈틈없이 짜여진 그의 그림의 구조는 다른 화가들이 모방하기에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작한 20세기의 주요화가들조차도 이 거장이 원숙기에 그린 작품은 감히 흉내낼 엄두도 못 냈고, 그가 명성을 얻기 전인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들만을 위작했다. 베르메르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어 널리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43세에 세상을 떠나 델프트의 구교회에 묻힌 뒤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파산할 운명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애를 써서 남편의 그림 가운데 29점을 구해냈다. 베르메르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잦은 전쟁 때문에 파산 상태였다.
베르메르의 예술은 그가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과학적일 만큼 매우 섬세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 각 그림은 물체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과 빛으로 실험한 다양한 분석의 총체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특히 회화적인 연구의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색채를 단순히 형태를 표현하는 수단에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존재와 그 환경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새로운 시각적 수단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으며 대담한 원근법의 탐구는 오늘날의 사진술에서 광학렌즈와 망원렌즈의 사용을 예시하고 있다. 19세기말에 사진술이 발달함에 따라 정제된 지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시기와 베르메르가 재발견된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베르메르가 꾸준히 놀랄 만큼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매우 적다. 서명이 없으나, 그의 작품임이 거의 확실한 [화장하고 있는 디아나](1654),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예수](1654경-55), [여자 뚜쟁이](1656), [잠자는 소녀] 등은 베르메르의 가장 초기작에 속한다. 색채 처리, 원근법, 일부 대상의 분석과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베르메르가 그린 가장 위대한 작품들과 분명 관련되어 있으며, 그 걸작들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통일성과 조화가 뚜렷이 드러난다.
이 위대한 화가는 다음 단계에서 주제를 구사해내는 솜씨가 거의 완벽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현실을 점점 더 완전히 묘사하게 된 것이다. 거리도 그림자도 그의 그림의 다른 요소에 대한 지각작용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유명한 [델프트 풍경]에서는 베르메르는 시계에 시간(오전 7시 10분)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완숙한 경지에서는 여러 그림들 사이에 뚜렷한 발달 정도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는 놀랄 만한 힘을 지닌 것도 있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도 있다. 이 단계의 그림들은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화가의 전혀 다른 일면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념의 우의]는 예기치 않은 상징적 복합 구성을 보여주며, 베르메르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회화의 우의]는 오랫동안 피테르 데 호흐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베르메르의 그림에 적힌 제작 연대는 대체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작품들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통적으로 미술사가들은 한 화가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구도가 좀더 복잡한 그림이 보다 후기에 그려졌다는 원칙을 따르고 잇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구도가 가장 복잡한 [신념의 우의]와 [회화의 우의]는 베르메르가 궁극적으로 도달 한 경지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풍경화는 물론 [어린 소녀의 두상]이나 [빨간 모자를 쓴 소녀] 같은 보다 단순한 작품에서도 똑같이 충실했다. 이따금 [푸른 옷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편지를 읽고 있는 젊은 여인]과 [식모]는 더 단순하고, 따라서 상징적 요소가 풍부한 작품들보다 더 먼저 그려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만 단순한 작품들도 복잡한 그림보다 더 대담한 실험을 보여준다. 이런 대담한 실험은 대체로 후기 작품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알려져 있다.
베르메르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속화 중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당시의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플랑드르의 미술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베르메르는 이 모든 영향력에 저항했다. 예를 들어 프란스 할스는 이따금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교류한 듯하고, 렘브란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인 구에르치노와 교류한 듯하나, 베르메르는 유독 완전히 개인적인 방향에 몰두했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현실에 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분석하는 방식에서 볼 때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이다. 이것은 늪지대와 바다를 정복한 네덜란드 수력 공학자들이나 토성 둘레의 테를 발견한 천문학자 호이겐스의 엄밀한 방식을 연상시킨다. 베르메르의 모든 작품들은 그 특유의 농도와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재발견한 미술사가인 테오필 토레(W. 뷔르거의 가명)가 1866년 76점의 그림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할 때까지는 모두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2년 뒤에 또 다른 학자는 76점 가운데 56점만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1907년에는 이 숫자가 다시 34점으로 줄어들었고, 권위 있는 학설에 따르면 오늘날 이 숫자는 30-35점에 머물러 있다. 1937년에 베르메르 작품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권위자들은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945년에 위작자인 한스 반 메레헨이 나타나, 그때까지 위대한 미술품 감정가들이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으로 판정한 그림들이 사실은 자기가 그린 위작이라고 선언하자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베르메르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그 위작 소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johannes jan vermeer
http://blog.naver.com/hgaslh/40011108281
네덜란드의 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로 실내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그림의 구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았고, 순수하고 개성적인 색채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다양한 형태와 표면에 작용하는 햇빛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에는 자화상인 [회화의 우의](1665경)가 있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시 장터에서 자기 집안이 경영하던 여인숙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그 도시에서 살았다. 델프트에 보관되어 있는 공문서에 따르면 그는 1653년 4월 5일에 결혼했고 같은 해 12월에 화가 길드에 가입했다. 그가 생전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1663년에 그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델프트에 간 바타자르 드 몽코니라는 프랑스인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베르메르는 1662-63, 1670-71년에 화가 길드의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기보다는 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일로 가족을 부양한 것 같다.
이 조용한 남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 빈약한 기록에 따르면 베르메르는 빵집 주인, 식료품가게 주인들과 함께 살았고, 이 상인들은 그의 그림을 외상에 대한 담보로 받았다. 그는 가게 주인들 틈에서 작품을 계속했는데, 이웃에 사는 장사꾼들은 그에게 껍질이 단단하고 윤기 있는 빵과 우유를 비롯한 물질적인 영양을 공급해주었고, 그는 [식모] 같은 그림처럼 물질적인 음식물에 정신적인 차원을 덧붙였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귀족사회와 중상류층 사회도 묘사했는데 이런 그림에서는 세련된 귀부인들이 편지를 읽거나 레이스를 뜨며 신사를 맞이한다. 또한 음악을 듣거나 철학과 문학을 접하며, 객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다.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의 배경은 값비싼 양탄자와 훌륭한 악기, 수놓은 드레스와 화려한 겉옷, 담비 모피와 비단, 진주와 은식기가 있는 호화로운 실내이다.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상류사회의 인물들을 대체로 진주의 무게를 달고 있거나 시와 천문학, 음악과 지리학에 몰두하는 인물들로 재창조했다. 그들은 닫혀 있는 우주의 영웅들로서 이 소우주에서는 자연광과 반사광의 점진적 색조 변화가 극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다. 현실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현실을 채로 거르는 것을 정제라고 한다면 베르메르는 그림들은 정제된 삶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메르는 인생은 신비에 싸여 있어서 수많은 해석을 낳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그의 인생을 너무 좁게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술사가인 레지널드 H.빌렌스키는 그가 광학 기구와 거울을 이용하여 시야를 넓히려고 애쓴 실험실의 연구가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그를 가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낸 사람으로 보았으며, 그의 그림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에서 그의 아내인 카타리나 베르메르를 찾아냈다. 이 2가지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둘 다 그를 은둔가로 묘사한 점에서는 같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화가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방안에 갇힌 채 그림의 주제로부터 그를 격리시키고 있는 모든 사물들을 자신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려운 계획을 도와주는 지지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대상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한 예술가의 영상이 떠오른다. 베르메르가 그린 유명한 2점의 풍경화는 둘 다 창문을 통해 보고 그렸다는 사실을 여기에 덧붙여두어야겠다. 베르메르는 [회화의 우의]에서 등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렸는데 그가 이런 의자에 붙박인 듯 앉아서 그림을 그린 것이 어떤 신체적 결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가까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기 때문이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의문은 놀랄 만큼 빈틈없고 뛰어난 그의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의 화가들에게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빈틈없이 짜여진 그의 그림의 구조는 다른 화가들이 모방하기에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작한 20세기의 주요화가들조차도 이 거장이 원숙기에 그린 작품은 감히 흉내낼 엄두도 못 냈고, 그가 명성을 얻기 전인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들만을 위작했다. 베르메르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어 널리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43세에 세상을 떠나 델프트의 구교회에 묻힌 뒤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파산할 운명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애를 써서 남편의 그림 가운데 29점을 구해냈다. 베르메르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잦은 전쟁 때문에 파산 상태였다.
베르메르의 예술은 그가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과학적일 만큼 매우 섬세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 각 그림은 물체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과 빛으로 실험한 다양한 분석의 총체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특히 회화적인 연구의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색채를 단순히 형태를 표현하는 수단에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존재와 그 환경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새로운 시각적 수단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으며 대담한 원근법의 탐구는 오늘날의 사진술에서 광학렌즈와 망원렌즈의 사용을 예시하고 있다. 19세기말에 사진술이 발달함에 따라 정제된 지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시기와 베르메르가 재발견된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베르메르가 꾸준히 놀랄 만큼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매우 적다. 서명이 없으나, 그의 작품임이 거의 확실한 [화장하고 있는 디아나](1654),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예수](1654경-55), [여자 뚜쟁이](1656), [잠자는 소녀] 등은 베르메르의 가장 초기작에 속한다. 색채 처리, 원근법, 일부 대상의 분석과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베르메르가 그린 가장 위대한 작품들과 분명 관련되어 있으며, 그 걸작들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통일성과 조화가 뚜렷이 드러난다.
이 위대한 화가는 다음 단계에서 주제를 구사해내는 솜씨가 거의 완벽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현실을 점점 더 완전히 묘사하게 된 것이다. 거리도 그림자도 그의 그림의 다른 요소에 대한 지각작용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유명한 [델프트 풍경]에서는 베르메르는 시계에 시간(오전 7시 10분)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완숙한 경지에서는 여러 그림들 사이에 뚜렷한 발달 정도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는 놀랄 만한 힘을 지닌 것도 있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도 있다. 이 단계의 그림들은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화가의 전혀 다른 일면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념의 우의]는 예기치 않은 상징적 복합 구성을 보여주며, 베르메르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회화의 우의]는 오랫동안 피테르 데 호흐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베르메르의 그림에 적힌 제작 연대는 대체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작품들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통적으로 미술사가들은 한 화가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구도가 좀더 복잡한 그림이 보다 후기에 그려졌다는 원칙을 따르고 잇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구도가 가장 복잡한 [신념의 우의]와 [회화의 우의]는 베르메르가 궁극적으로 도달 한 경지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풍경화는 물론 [어린 소녀의 두상]이나 [빨간 모자를 쓴 소녀] 같은 보다 단순한 작품에서도 똑같이 충실했다. 이따금 [푸른 옷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편지를 읽고 있는 젊은 여인]과 [식모]는 더 단순하고, 따라서 상징적 요소가 풍부한 작품들보다 더 먼저 그려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만 단순한 작품들도 복잡한 그림보다 더 대담한 실험을 보여준다. 이런 대담한 실험은 대체로 후기 작품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알려져 있다.
베르메르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속화 중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당시의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플랑드르의 미술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베르메르는 이 모든 영향력에 저항했다. 예를 들어 프란스 할스는 이따금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교류한 듯하고, 렘브란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인 구에르치노와 교류한 듯하나, 베르메르는 유독 완전히 개인적인 방향에 몰두했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현실에 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분석하는 방식에서 볼 때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이다. 이것은 늪지대와 바다를 정복한 네덜란드 수력 공학자들이나 토성 둘레의 테를 발견한 천문학자 호이겐스의 엄밀한 방식을 연상시킨다. 베르메르의 모든 작품들은 그 특유의 농도와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재발견한 미술사가인 테오필 토레(W. 뷔르거의 가명)가 1866년 76점의 그림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할 때까지는 모두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2년 뒤에 또 다른 학자는 76점 가운데 56점만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1907년에는 이 숫자가 다시 34점으로 줄어들었고, 권위 있는 학설에 따르면 오늘날 이 숫자는 30-35점에 머물러 있다. 1937년에 베르메르 작품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권위자들은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945년에 위작자인 한스 반 메레헨이 나타나, 그때까지 위대한 미술품 감정가들이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으로 판정한 그림들이 사실은 자기가 그린 위작이라고 선언하자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베르메르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그 위작 소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