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네덜란드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네덜란드 프로트 준데르트 주요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아를의 도개교(跳開橋)》《해바라기》
본문 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13세 빈센트
1853년 3. 30.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 흐르트 츤데르트에서 출생. 1863년 살롱 낙선전 열림. 1865년 프로빌의 기숙 학교에 입학, 69년까지 다님. 1869년 7월 30일, 헤이그에 있는 구필 상회에 취직, 나중에는 브뤽셀서 근무. 1873년 5월 구필 상회 런던 지점으로 전임. 1876년 구필 상회에서 해고. 1877년 1월~4월 서점에 근무. 고호의 신앙심이 한층 돈독해져 목사가 되기로 결심. 1879년 바스메스에서 부목사, 정신적 물질적으로 곤궁한 생활. 1882년 1월 거리에 창부 시엥을 만나 20개월 동안 모델로 씀.
18세 빈센트
1882년 석탄짐을 진 탄광의 여인들(Femmes de mineurs portant de sacsde charbon), 7월 지붕들(Les Toitures ). 1883년 황무지와 석탄 구덩이의 작은 집, 마을과 일하는 농부 등을 그림 루스 두이넨부근의 길들 (Routes pres de Loosduinen ). 1884년 니넨신부의 겨울정원(Le jardin de presbytere de Nienen enhiver), 1885년 4월~5월 정물, 농부, 직물기계, 두부 등 습작. 제작. 6월 을 제작. 1886년 셍트마리의 풍경, 해변의 배들, 채소밭들. 1887년 인상파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6월 빙그 화랑에서 본 일본 그림에 충격을 받아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한다. 1888년 3월「예술가의 공동체」를 입안, 4월 꽃피는 나무, 모브의 회상을 제작.
19세 빈센트
1888년 7월 일본처녀(La Mousme) , 8월, 해바라기(Tournesols), 알제리 보명(Le Zouave ), 9월 아를르 벵상의 집(La Maison de Vincent a Arles ),아를르 반고호의 침실(Chambre a coucher de Van Gogh a Arles ),밤의카페(Le Cafe,le soir ), 정수리를 면도한 자화상(Autoportrait au crane rase ). 1888년 10월 씨뿌리는 남자(Le Semeur). 1888년 11월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아르망 룰렝의 초상(Portraitd'Armand Roulin), 카미유 룰렝의 초상(Portrait de Camille Roulin). 1889년 아를르에 수용됨,생애에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200점의 그림을 그림. 1889년 셍레미의 셍폴 정신병원(L'Asile Saint-Paul a Saint-Remy). 1889년 1~3월 목부(La Berceuse), 파이프를 문 자화상(Autoportrait a la pipe),화판과 양파가 있는 정물 (Nature morte a la planche a dessin et auxoignons), 우편배달원 룰렝(Le Facteur Roulin). 1889년 5~6 셍폴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Saint-Paul), 황금빛 밀밭(Les Bles jaunes).
자화상
1890년 붓꽃(Les Iris), 오베르 쉬르 와즈의 길(Rue a Auvers-sur-Oise). 1890년 1월 낮잠(La Sieste), 밀레의 모작으로 잘 알려짐. 1890년 5월 셍 레미를 떠나 파리로 옮김. 미술 애화가인 정신신경과 의사 가세의환자이자 친구가 됨. 5월 의사 가세의 정원(Le Jardin du docteur Gac het), 6월 의사 가세(Le Docteur Gachet), 오베르 성당 (L'Eglise d'Au vers). 1890년 6~7월 천둥치는 하늘밑의 들판(Champs sous un ciel d'orage),까마귀나는 밀밭(Les Champs de ble aux corbeaux). 1890년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임. 1890년 7월 27일 리볼베 권총을 가슴에 발사,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29일 세상을 떠남.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1891년 고호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월 25일, 동생 테오 사망. 오베르의 조그마한 묘에 고호와 함께 합장.
◆ 고흐의 삶 - 첫번째 이야기 ◆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 고흐의 삶 - 두번째 이야기 ◆
고흐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누에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 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과 '감자먹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누에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 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워프로 갑자기 떠났다.
◆ 고흐의 삶 - 세번째 이야기 ◆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 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구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피사로와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 고흐의 삶 - 네번째 이야기 ◆
그후 12개월 동안 (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고흐의 삶 - 다섯번째 이야기 ◆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로 갔다.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엔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 (1891. 1. 25) 만성 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어린시절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친절하고도 온순한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Theodorus van Gogh (1822~85)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고, 1857년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흐와 일생동안 수백통의 편지를 나누며 그를 후원했던 테오(Theo)입니다.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빌헤미나(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 르넬리스(Cornelius)가 태어났습니다. 빈센트의 할아버지와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가 장 오랜 전통의 개신교인 캘빈 교회 목사였다. 어머니는저명한 왕실 제본사의 딸로서 그림을 잘 그렸고 글 솜씨도 있었다. 빈센트 숙부의 형제인 헨드릭 숙부, 하임 숙부 그리고 크르넬리스 숙부 들도 모두 화상이었다. 이들 여섯 형제 중에서 오직 테오도루스만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들이 30여점 남아 있습니다.
1864년10월1일,아버지는 빈센트를 로젠달과 도르트레히트 사이에 위치한 제벤베르겐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제 빈센트는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살게 되었다. "층계위에 프로빌리 교장 선생님옆에 서서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축축하게 젖은 길을 따라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빈센트는 기숙학교에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배웠다.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틸부르크에있는 한니크인스티튜트에 보내졌다. 그러나 1868년 3월 중순이 되면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반 고흐 목사는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학비마저 지불할 수 없었다. 빈센트는 열다섯 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 때 센트 숙부는 병으로 사업을 중단하고 브레다와 가까운 프린헨하계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있는 지점 세 개를 열고 있던 구필 화랑은 해외지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센트 숙부의 헤이그 화랑은 네덜란드 지점이었다.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은 빈센트는 테르스테크가 새로 지점장을 맡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다. 빈센트는 규칙적이며 검소한 젊은이였고, 독서와 미술과 관람을 즐기는 학구파였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 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 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 아 분위기였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다.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 그 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된다. 외 로운 이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 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을 약속한 상태였다.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난다.
네덜란드시절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고흐는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자연은 위대하고 고귀하고 진실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평온과 인내를 잃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 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된다.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시절
파리 1886년 2월 20일, 테오는 몽마르트(Montmartre)거리 19번지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빈센트가 보낸 짧은 전갈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빈센트가 파리에 막 도착했으며, 루브르에 있는 살롱 카페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빈센트가 그처럼 서둘러 파리에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테오와 같이 생활하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라발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테오와 빈센트의 공동 생활이 시작됩니다. 앤트워프에 있기까지 빈센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파리에 와서 그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탕기영감이 운영하던 클로젤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 러셀(John Russell,1858-1931),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등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1870년 이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서 상을 받은 코르몽(Cormon,1845-1924)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빈센트는 4월에 이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던 그는 4개월 만에 코르몽의 화실을 떠납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레픽 거리 54번지로 이사했고 빈센트는 방 하나를 화실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그의 작품에서 이제 색채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파리의 지붕과 몽마르트의 풍차들을 그리면서 누에넨에서 그렸던 어두운 색조의 그림과 다른 강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빈센트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몽마르트 정원이나 레픽의 화실 창을 통해 본 풍경을 그릴 때 점묘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내던 빈센트는 베르나르의 부모가 살고 있는 아니에르를 방문하여 그 곳의 풍경을 그리면서 더 많은 색채를 보게 되고,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베르나르와 함께 클리시 거리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전시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빈센트가 식당주인과 언쟁을 하는 바람에 전시회는 끝이 났고 클리시 거리에 있는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됩니다. 빈센트는 그 선술집의 주인이며 드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사귀었지만 헤어지고 맙니다. 6월에 빈센트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합니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케텡, 베르나르, 드 코닝, 로트렉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 이 전시회를 통해 빈센트는 고갱, 기욤, 쇠라 등을 알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빈센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링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 주고 인도해 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동료 화가였던 기욤은 "빈센트는 자신의 의견을 좀더 잘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지 않은 채 무릎을 꿇기까지 했는데, 그런 그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고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탕기 부인에게 위협적인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요. 결국 테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게다가 빈센트가 집을 언제나 어수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를시절
나는-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아닌게 아니라 옳은 말이겠지만,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애정은 예술을 싫어하는 법이다......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숱한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 1888년 아를로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렀다. 진실 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으나, 차차 라셸 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 다. 망명적 존재, 사회의 폐물,...., 예술가들처럼 그녀도 우리의 친구이고 누이 동생일세. 우리들과 마찬가지로-그녀도 폐물의 처지에서 착실한 독립을하려한 댔 자 조금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 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해가 뜨면 질 때까 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들의 우울 증이나 그 밖의 것은 너무나 예술적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에 비롯된 것이며, 숙명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 주는 돈으 로 살았다. 절약을 위해 보다 요령이 있는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 렸다. 빈센트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다. 다음날 경찰이 빈센트 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빈센트는 곧 병 원에 수용되었다.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 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빈센트는 독방에 수용되었다.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다.
생_레미,오베르시절
생-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으나,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9월에 과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11월, 빈센트는 제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 점 풀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30일 그림 여섯 점을 보냅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에 실리게 됩니다.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다.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 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 일한 글이기도 했다.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다.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난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 어가 누웠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다.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 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 의 나이로 죽었다.
초기(Earliest Paintings 1881~1883).....
빈센트의 초기 작품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된 배경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작품중 상당수는 그의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린 주제가 되는 것도 많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 시기의 그림들이 평면적이며, 색상의 사용도 적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나, 이것이야 말로 미술의 새로운 거장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시대(Netherlands 1880~1885).....
이 시기를 통하여 빈센트 반 고호는 진정한 거장으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그린 들판판과 농부와 관련된 주제들은 빈센트가 좋아하던 주제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가 기교적으로 더욱 확고해 지는 것을 보여주며, 빈센트가 화가로서의 스타일을 굳히는데 중요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농부의 초상화 그림은 그가 미술의 거장이 되면서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면밀히 보여준다.
파리시대(Paris 1886~1888).....
파리에 2년의 반 고호는 논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술가으로서의 그의 직업의 안에서 가장 중추의 것이었다. 파리에서 빈센트는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일본 판화의 강렬한 색채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이전보다 훨씬 밝고 강렬한 색조를 띠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Van Gogh의 그림물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를시대(Arles 1888~1889).....
빈센트가 아를에서 머무른 기간동안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역작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를에서 완성되는 그림은 빈센트의 이전의 예술적인 기간의 통합을 반영한다.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필법, 그리고 그림에 쏟아 부었던 열정이 합쳐져 해바라기, 황혼의 밀밭 등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쌩레미시대(St.Rhemy 1889~1890).....
생레미 요양원에서 빈센트는 계속되는 환각, 발작증세와 싸우면서도 "별이 빛나는 밤"과 "해뜰 무렵의 밀밭 수확"과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아니러니컬하게도 그의 몸과 정신이 병들고 쇠약해질수록 예술가로서 재능은 더욱 빛을 발휘했습니다
오베르(Auvers 1890,5~1890,7).....
생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오베르에서 빈센트는 죽기 전까지 3개월 동안 77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빛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색들을 화폭에 담았고, 자신을 돌봐 준 닥터 가셰와 하숙집 라부 가족들을 모델로 하여 많은 인물화를 남겼습니다. 빈센트는 1890년 7월에 자살했다. 그가 그의 천재의 정점에 있었다.
The Drawings...... 반 고호의 수많은 습작을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빈센트는 10년 정도 예술가로 인생을 살면서 1,000장 이상의 습작을 남겼습니다. (또한 유화 873점, 수채화 152점, 서신 스케치 131점)
vincent van gogh
고흐 [Gogh, Vincent van, 1853.3.30~1890.7.29]
요약
네덜란드의 화가.
국적 네덜란드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네덜란드 프로트 준데르트
주요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아를의 도개교(跳開橋)》《해바라기》
본문
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13세 빈센트
1853년 3. 30.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 흐르트 츤데르트에서 출생.
1863년 살롱 낙선전 열림.
1865년 프로빌의 기숙 학교에 입학, 69년까지 다님.
1869년 7월 30일, 헤이그에 있는 구필 상회에 취직, 나중에는 브뤽셀서 근무.
1873년 5월 구필 상회 런던 지점으로 전임.
1876년 구필 상회에서 해고.
1877년 1월~4월 서점에 근무. 고호의 신앙심이 한층 돈독해져 목사가 되기로 결심.
1879년 바스메스에서 부목사, 정신적 물질적으로 곤궁한 생활.
1882년 1월 거리에 창부 시엥을 만나 20개월 동안 모델로 씀.
18세 빈센트
1882년 석탄짐을 진 탄광의 여인들(Femmes de mineurs portant de sacsde charbon), 7월 지붕들(Les Toitures ).
1883년 황무지와 석탄 구덩이의 작은 집, 마을과 일하는 농부 등을 그림 루스 두이넨부근의 길들 (Routes pres de Loosduinen ).
1884년 니넨신부의 겨울정원(Le jardin de presbytere de Nienen enhiver), 1885년 4월~5월 정물, 농부, 직물기계, 두부 등 습작. 제작. 6월 을 제작.
1886년 셍트마리의 풍경, 해변의 배들, 채소밭들.
1887년 인상파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6월 빙그 화랑에서 본 일본 그림에 충격을 받아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한다.
1888년 3월「예술가의 공동체」를 입안, 4월 꽃피는 나무, 모브의 회상을 제작.
19세 빈센트
1888년 7월 일본처녀(La Mousme) , 8월, 해바라기(Tournesols), 알제리 보명(Le Zouave ), 9월 아를르 벵상의 집(La Maison de Vincent a Arles ),아를르 반고호의 침실(Chambre a coucher de Van Gogh a Arles ),밤의카페(Le Cafe,le soir ), 정수리를 면도한 자화상(Autoportrait au crane rase ).
1888년 10월 씨뿌리는 남자(Le Semeur).
1888년 11월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아르망 룰렝의 초상(Portraitd'Armand Roulin), 카미유 룰렝의 초상(Portrait de Camille Roulin).
1889년 아를르에 수용됨,생애에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200점의 그림을 그림.
1889년 셍레미의 셍폴 정신병원(L'Asile Saint-Paul a Saint-Remy).
1889년 1~3월 목부(La Berceuse), 파이프를 문 자화상(Autoportrait a la pipe),화판과 양파가 있는 정물 (Nature morte a la planche a dessin et auxoignons), 우편배달원 룰렝(Le Facteur Roulin).
1889년 5~6 셍폴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Saint-Paul), 황금빛 밀밭(Les Bles jaunes).
자화상
1890년 붓꽃(Les Iris), 오베르 쉬르 와즈의 길(Rue a Auvers-sur-Oise).
1890년 1월 낮잠(La Sieste), 밀레의 모작으로 잘 알려짐.
1890년 5월 셍 레미를 떠나 파리로 옮김. 미술 애화가인 정신신경과 의사 가세의환자이자 친구가 됨. 5월 의사 가세의 정원(Le Jardin du docteur Gac het), 6월 의사 가세(Le Docteur Gachet), 오베르 성당 (L'Eglise d'Au vers).
1890년 6~7월 천둥치는 하늘밑의 들판(Champs sous un ciel d'orage),까마귀나는 밀밭(Les Champs de ble aux corbeaux).
1890년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임.
1890년 7월 27일 리볼베 권총을 가슴에 발사,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29일 세상을 떠남.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1891년 고호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월 25일, 동생 테오 사망. 오베르의 조그마한 묘에 고호와 함께 합장.
◆ 고흐의 삶 - 첫번째 이야기 ◆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 고흐의 삶 - 두번째 이야기 ◆
고흐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누에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 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과 '감자먹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누에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 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워프로 갑자기 떠났다.
◆ 고흐의 삶 - 세번째 이야기 ◆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 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구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피사로와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 고흐의 삶 - 네번째 이야기 ◆
그후 12개월 동안 (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고흐의 삶 - 다섯번째 이야기 ◆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로 갔다.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엔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 (1891. 1. 25) 만성 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어린시절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친절하고도 온순한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Theodorus van Gogh (1822~85)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고, 1857년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흐와 일생동안 수백통의 편지를 나누며 그를 후원했던 테오(Theo)입니다.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빌헤미나(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 르넬리스(Cornelius)가 태어났습니다.
빈센트의 할아버지와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가 장 오랜 전통의 개신교인 캘빈 교회 목사였다. 어머니는저명한 왕실 제본사의 딸로서 그림을 잘 그렸고 글 솜씨도 있었다. 빈센트 숙부의 형제인 헨드릭 숙부, 하임 숙부 그리고 크르넬리스 숙부 들도 모두 화상이었다. 이들 여섯 형제 중에서 오직 테오도루스만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들이 30여점 남아 있습니다.
1864년10월1일,아버지는 빈센트를 로젠달과 도르트레히트 사이에 위치한 제벤베르겐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제 빈센트는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살게 되었다. "층계위에 프로빌리 교장 선생님옆에 서서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축축하게 젖은 길을 따라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빈센트는 기숙학교에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배웠다.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틸부르크에있는 한니크인스티튜트에 보내졌다. 그러나 1868년 3월 중순이 되면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반 고흐 목사는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학비마저 지불할 수 없었다. 빈센트는 열다섯 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 때 센트 숙부는 병으로 사업을 중단하고 브레다와 가까운 프린헨하계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있는 지점 세 개를 열고 있던 구필 화랑은 해외지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센트 숙부의 헤이그 화랑은 네덜란드 지점이었다.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은 빈센트는 테르스테크가 새로 지점장을 맡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다. 빈센트는 규칙적이며 검소한 젊은이였고, 독서와 미술과 관람을 즐기는 학구파였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 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 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 아 분위기였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다.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 그
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된다. 외 로운 이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 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을 약속한 상태였다.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난다.
네덜란드시절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고흐는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자연은 위대하고 고귀하고 진실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평온과 인내를 잃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 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된다.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시절
파리 1886년 2월 20일, 테오는 몽마르트(Montmartre)거리 19번지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빈센트가 보낸 짧은 전갈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빈센트가 파리에 막 도착했으며, 루브르에 있는 살롱 카페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빈센트가 그처럼 서둘러 파리에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테오와 같이 생활하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라발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테오와 빈센트의 공동 생활이 시작됩니다. 앤트워프에 있기까지 빈센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파리에 와서 그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탕기영감이 운영하던 클로젤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 러셀(John Russell,1858-1931),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등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1870년 이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서 상을 받은 코르몽(Cormon,1845-1924)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빈센트는 4월에 이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던 그는 4개월 만에 코르몽의 화실을 떠납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레픽 거리 54번지로 이사했고 빈센트는 방 하나를 화실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그의 작품에서 이제 색채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파리의 지붕과 몽마르트의 풍차들을 그리면서 누에넨에서 그렸던 어두운 색조의 그림과 다른 강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빈센트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몽마르트 정원이나 레픽의 화실 창을 통해 본 풍경을 그릴 때 점묘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내던 빈센트는 베르나르의 부모가 살고 있는 아니에르를 방문하여 그 곳의 풍경을 그리면서 더 많은 색채를 보게 되고,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베르나르와 함께 클리시 거리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전시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빈센트가 식당주인과 언쟁을 하는 바람에 전시회는 끝이 났고 클리시 거리에 있는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됩니다. 빈센트는 그 선술집의 주인이며 드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사귀었지만 헤어지고 맙니다.
6월에 빈센트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합니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케텡, 베르나르, 드 코닝, 로트렉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 이 전시회를 통해 빈센트는 고갱, 기욤, 쇠라 등을 알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빈센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링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 주고 인도해 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동료 화가였던 기욤은 "빈센트는 자신의 의견을 좀더 잘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지 않은 채 무릎을 꿇기까지 했는데, 그런 그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고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탕기 부인에게 위협적인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요. 결국 테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게다가 빈센트가 집을 언제나 어수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를시절
나는-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아닌게 아니라 옳은 말이겠지만,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애정은 예술을 싫어하는 법이다......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숱한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
1888년 아를로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렀다. 진실 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으나, 차차 라셸 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 다. 망명적 존재, 사회의 폐물,...., 예술가들처럼 그녀도 우리의 친구이고 누이 동생일세. 우리들과 마찬가지로-그녀도 폐물의 처지에서 착실한 독립을하려한 댔 자 조금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 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해가 뜨면 질 때까 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들의 우울 증이나 그 밖의 것은 너무나 예술적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에 비롯된 것이며, 숙명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 주는 돈으 로 살았다. 절약을 위해 보다 요령이 있는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 렸다. 빈센트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다. 다음날 경찰이 빈센트 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빈센트는 곧 병 원에 수용되었다.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 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빈센트는 독방에 수용되었다.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다.
생_레미,오베르시절
생-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으나,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9월에 과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11월, 빈센트는 제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 점 풀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30일 그림 여섯 점을 보냅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에 실리게 됩니다.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다.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 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 일한 글이기도 했다.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다.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난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 어가 누웠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다.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 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 의 나이로 죽었다.
초기(Earliest Paintings 1881~1883).....
빈센트의 초기 작품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된 배경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작품중 상당수는 그의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린 주제가 되는 것도 많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 시기의 그림들이 평면적이며, 색상의 사용도 적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나, 이것이야 말로 미술의 새로운 거장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시대(Netherlands 1880~1885).....
이 시기를 통하여 빈센트 반 고호는 진정한 거장으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그린 들판판과 농부와 관련된 주제들은 빈센트가 좋아하던 주제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가 기교적으로 더욱 확고해 지는 것을 보여주며, 빈센트가 화가로서의 스타일을 굳히는데 중요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농부의 초상화 그림은 그가 미술의 거장이 되면서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면밀히 보여준다.
파리시대(Paris 1886~1888).....
파리에 2년의 반 고호는 논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술가으로서의 그의 직업의 안에서 가장 중추의 것이었다. 파리에서 빈센트는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일본 판화의 강렬한 색채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이전보다 훨씬 밝고 강렬한 색조를 띠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Van Gogh의 그림물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를시대(Arles 1888~1889).....
빈센트가 아를에서 머무른 기간동안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역작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를에서 완성되는 그림은 빈센트의 이전의 예술적인 기간의 통합을 반영한다.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필법, 그리고 그림에 쏟아 부었던 열정이 합쳐져 해바라기, 황혼의 밀밭 등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쌩레미시대(St.Rhemy 1889~1890).....
생레미 요양원에서 빈센트는 계속되는 환각, 발작증세와 싸우면서도 "별이 빛나는 밤"과 "해뜰 무렵의 밀밭 수확"과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아니러니컬하게도 그의 몸과 정신이 병들고 쇠약해질수록 예술가로서 재능은 더욱 빛을 발휘했습니다
오베르(Auvers 1890,5~1890,7).....
생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오베르에서 빈센트는 죽기 전까지 3개월 동안 77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빛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색들을 화폭에 담았고, 자신을 돌봐 준 닥터 가셰와 하숙집 라부 가족들을 모델로 하여 많은 인물화를 남겼습니다.
빈센트는 1890년 7월에 자살했다. 그가 그의 천재의 정점에 있었다.
The Drawings......
반 고호의 수많은 습작을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빈센트는 10년 정도 예술가로 인생을 살면서 1,000장 이상의 습작을 남겼습니다.
(또한 유화 873점, 수채화 152점, 서신 스케치 131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