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지도는 우리가 배우기로는 중국 송(宋)나라때(960~1277)년에 만들어진 "송본지리지장도" 라는 지도입니다. 여기서 말하건데 이 지도가 그려진 시점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하기 전이었고, 이 전에 만들어진 지도는 아직 발견된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지도속에 우리의 국토는 너무나 넓습니다.
지난 8월 14일 백주대낮에 KBS 1Radio를 통해 쏟아낸,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장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국사편찬 위원장의 인식을 읽어 낼수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자신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것이 아닌... 강호사학에 물든 연구자들과 여행객들이 함부로 하여서 라는 소리인데... 참... 뭐라 말을 해야할지... 저런년을 우리나라 역사를 다루는 기관의 최고인으로 뽑아놨다는것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와는 전혀 다른 뻘소리만... 최고수준 매국노의 뻘소리 인터뷰 내용을 이곳에 올리고자 합니다.
제목 : 8.14(목) 대한민국 60년, '역사, 미래와 만나다' 강연4 -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6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서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기까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텐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건국 60년 기념사업 추진단의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 ‘역사, 미래와 만나다’ 그 마지막 시간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 함께 합니다.. 정옥자 위원장은 대한민국 60년, 우리 역사를 보는 눈에 대해 얘기 하는데요.. 지금부터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정옥자 위원장:
제가 우리 역사를 보는 눈, 말하자면 사관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문제가 첨예하게 대립양상을 보이는 것도 결국 역사를 보는 눈의 문젭니다. 역사적인 사실, 자료, 팩트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서 시각차이가 있어서 이런 갈등이 오는 거기 때문에 사실은 역사관, 우리 역사를 보는 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우리 전통시대의 역사학에 대해서 약간 개관을 하고, 그리고 소위 근대사학 이후 사관 문제를 말씀드리는 순서로 하겠습니다.
역사연구는 대개 몇 가지 서술방법을 선택했는데
첫 번째가 기전쳅니다. 기전체는 아시다시피 본기와 열전이 중심이 된 사마천의 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동양에서의 기전체가 굉장히 많이 활용됩니다. 기전체의 특징은 본기와 열전이라는 것. 본기는 제왕의 정치사죠 말하자면 제왕의 통치행위, 그리고 열전은 당 시대에 살던 중요한 인물들을 유형별로 서술해서 라이프스토리를 써놓으니까 지금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별로 다름없구나 아주 구조적으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는 연표가 있고.
그리고 기사본말체는 사건의 원인, 경과, 결과를 죽 서술하는 건데 이건 각론을 쓸 때 유효합니다. 임진왜란 하면 그것의 원인, 경과, 결과, 이런 식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사건 서술에 유효한데 사실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사학이 이것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기사본말체는 사건 서술의 각론을 쓸 때 유효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편년체인데 편년체는 역사를 시간에 따라 죽 서술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같으면 편년체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데 굉장히 많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그렇게 조선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객관적으로 시간에 따라 죽 서술해놓고 있어서 오늘날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자료로 이것을 굉장히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강목체인데 이건 성리학적 역사서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강이라는 건 역사의 큰 줄기, 목은 각론입니다.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 그래서 전체 숲이 강이라면 거기에 하나하나 나무가 목이죠. 그래서 강과 목을 다 보는 겁니다. 전체를 그냥 한 번 죽 볼 때는 강만 읽고 세밀하게 내용을 탐색할 때는 목을 읽습니다. 그래서 강과 목이 다 갖춰 읽는 걸 굉장히 중요시했고, 그런데 이런 전통시대에 중요했던 역사가, 소위 식민사학이라는 게 시작되면서 상당히 많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식민사학은 아시다시피 제국주의적 역사학이죠. 그래서 이 제국주의적 역사학은 쉽게 말씀드리면 무력의 논리로 역사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제국주의에 의한 일본의 식민사학은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시키는 하나의 기틀이 되기 때문에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반도적 성격론입니다. 이건 쉽게 말해서 지리적 결정론입니다. 우리나라가 반도에 있기 때문에 독립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그동안엔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이젠 일본의 온정주의적인 지배를 받을 시기가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데 문제는 반도적 성격론이 단점만 애기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장점을 얘기 안 합니다. 그래서 반도적 성격론은 오늘날 와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시점에서 일제시대에 이런 것들이 지식인에게 굉장히 먹혔다는 얘기죠. 이광수 같은 분까지 여기 동조했으니까 보통사람에 대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런데 단적으로 반도에 있어서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가 역사상 있습니다. 로마제국이죠. 바로 반도에 있기 때문에 해양문화와 대륙문화를 다 아우르면서 세계 제국을 건설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분명히 반도에 있기 때문에 그 장점을 아마 충분히 살려서 우리가 동북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쪽에서는 문화중심국으로 분명히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사대주의론인데, 사대와 교린이란 말은 있었죠. 전통시대에. 사대는 중국과의 외교관계, 교린은 기타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죠. 사대와 교린은 전통시대의 외교용어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대라는 말에 주의를 붙인 거죠. 그래서 사대주의. 강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용어를 새로 만든 겁니다. 사대주의라는 말은 없고 사대라는 말은 있었죠. 그럼 전통시대 사대라는 말이 과연 그렇게 강자에게 일방적으로 굴종했느냐, 그거 아닙니다. 전통시대의 사대라는 건 중국과의 외교관계인데 그 핵심에 조공과 책봉이 있습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조공은 특산물 바쳤다는 건데 일방적으로 바친 거 아닙니다. 조공품이 있고 대가로 사여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공품은 뭘 가졌을까요? 인삼이죠. 대표적인 게 양각삼, 양처럼 뿔이 났다고 해서. 그 다음 종이에요. 명경지라고 해서 거울처럼 맑게 비치면서도 찢어지지 않는 당시의 아주 최고품이죠. 그 다음 황모필이에요. 황모 꼬리에서 나는 털이 아주 귀하고 질이 좋아서 그걸로 만든 붓, 이게 또 당시 최고품입니다 동북아시아의. 그리고 화문석입니다. 강화도에서 나오는. 그냥 쉽게 말씀드리면 토산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중국이 사여품이라고 해서 대가로 주는 물건은 뭘까요? 비단이라고 얘기하시는데, 비단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고 중국이 적극적으로 준 게 서적입니다. 우리가 제일 원한 게 책입니다. 선진문화를 중국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책에 최신 정보가 다 있고 그래서 책을 제일 선호했고 중국도 책을 줬습니다. 그리고 비단인데 비단은 사실 전통시대엔 용도가 많습니다. 우린 옷 해 입는 것만 자꾸 생각하는데 책 표지로 굉장히 많이 썼어요. 그래서 비단... 그 다음에 가져온 게 약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서역에서 들여왔거나 중국 본토는 말할 것도 없고 또 내몽고 이런 쪽에서 가져온 약재가 굉장히 우리한테 중요하기 때문에, 약재. 그래서 실제로 가져간 물건과 우리가 받아온 물건이 거의 동량 동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물건 갖다 바치면서 그런 적 없고 이건 공무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그때 가져가는 것도 예물이란 이름으로 가져가고 그쪽에서 주는 것도 예물입니다. 그리고 책봉이라는 것이 정권 교체할 때 중국의 비준을 받는 거나 비슷한데 역사에서 보면 도대체 어느 시기 동서고금에 주도하는 국가는 있게 마련입니다. 주도하는 국가와 관계 설정을 잘 하면서 어떻게 자주적으로 생존방식을 잘 개발해서 살아가느냐, 그런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는 오늘날 이런 것을 너무 지배와 피지배라는 양분법으로만 자꾸 해석하면서 전통시대 중국에 종속돼 있었던 걸로 자꾸 오해합니다. 그런데 사실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였지만 조선만큼 자주적이고 자기 정체성 지키면서 자부심 갖고 산 나라가 없습니다. 그건 고려도 마찬가집니다. 몽고라는 대 제국을 건설하고 몽고가 그렇게 복속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끝까지 항거하고 부마국으로서, 사돈 맺는 거 아닙니까? 지금도 딸 아무 데나 시집 안 보내죠. 상당히 자기와 대등한 위상을 가져야 맺는 거나 마찬가진데 고려도 사실은 부마국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통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지금 현대의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대외교질서인데 이걸 너무 힘의 논리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오늘날 전통시대의 상당 부분이 잘못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당쟁론인데 조선이 당쟁하다가 망했다. 그런 얘기를 일본 학자들이 계속 퍼뜨려서 우리도 잘 모르면서 당쟁하다 망했나보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색당파가 동시에 공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즈음해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학파가 크게 두 개로 됐는데요 그건 사림이 등장하면서 기존 정치세력... 훈구파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훈구파는 나쁜 것, 사림파는 좋은 건, 자꾸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훈구파는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한 국가에 공훈을 세운 정치적 구파입니다. 공훈을 세운 훈자와 구파, 그래서 훈구파입니다. 이 사람들 아니면 조선왕조가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없었어요. 성종때 되면 그들이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거기 안주하는 성향을 보이니까 성종 때에 안 되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비판세력으로 지방에서 학문하던 사림파를 왕이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림파가 혁신정치를 외치면서 그 후 중종 때 가면 여러분이 다 아시는 정암 조광조 선생 같은 분은 굉장히 격렬하게 개혁을 부르짖죠. 그런데 왜 그때 그럼 실패했는가, 너무 성급하게,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철인정치가 뭔지 그런 데 대한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왕에게는 철인이 되라고 하고. 그러니 결국 왕도 마지막에는 지쳐서 중종이 아무리 반정에 의해서 왕에 올랐지만 왕이 동조 안 하고 지식인의 상당 부분이 아직은 훈구파고 그러니 결국 실패했죠. 그래서 그 후 선조때 가서야 16세기 가서 율곡 이이 선생 같은 분은 조광조의 실패를 아주 뼈저리게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과격하게 급진적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때 되면 학파가 형성되면서 바로 영남학파가 동인, 기호학파가 서인. 다만 그 제자들이 나중에 방법론의 차이로 뒤에 정파를 구성하면서 갈등이 심해져서 소급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엔 동인과 서인이 있었는데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이 갈라졌기 때문에 3당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3당체제에서 임진왜란을 겪고 나니 북인이 상당히 의병활동에 공을 세우면서, 북인정권이 광해군 정권입니다. 그런데 광해군 정권의 실정이라든가 그런 방향성 문제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폐모살제 같은 문제. 그게 당시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반정에 의해서 인조가 왕에 오르고, 그 이후에는 양당 체젭니다. 서인이 여당이고 남인이 야당입니다. 북인은 광해군정권과 함께 몰락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후 17세기 말에 구체적으로는 1683년경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색당파로 갈려서 계속 싸움질했다, 이건 맞지 않는 겁니다. 이미 그 이전에 양당체제 형태를 구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양당체제와 똑같진 않더라도, 국회는 없지만, 결국은 일진일퇴합니다.
네 번째가 문화적 비독창성론인데, 너희들 아주 독창적인 걸 말해봐라. 전부 중국 것 갖다가 재탕삼탕하지 않느냐 그런 소릴 해요. 그런데 도대체 문화라는 것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요즘 문화 하면 자꾸 예술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은 문화의 한 부분이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고급문화는 굉장히 인간적이고 품격 높은 삶의 방식을 구축한 게 고급문화고, 또 저급문화는 그렇지 못한 게 저급문화죠. 그래서 우리가 물론 전통시대에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고급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고급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때는 문화유입통로가 중국이니까요. 그리고 일본은 그때는 동아시아에서는 아주 한 옆에 있는 고립된 섬으로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문화가 많이 전파된 거죠. 그게 거의 19세기 전반, 초까지는 통신사가 다닐 때까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 후에 서양과 직접 통교하면서 달라졌지만요. 그래서 우리가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능력이 바로 문화능력입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여서 아류로 전락한 게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승화시켜서 오히려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것. 그래서 우리 고유문화를 창출한 게 우리 능력입니다. 그건 고대부터 얘기하면 원효의 불교사상도 결국 중국을 통해서 중국불교 받아들인 거죠. 원효가 그걸 더 일원화시켜서 중국에 역수출했다는 거. 또 석굴암도 우리나라에 오면 결국 재질이 우리는 화강암이 많으니까, 화강암으로. 작지만 굉장히 정교하고 섬세하게, 아무리 중국 돈황에서 받아들였더라도 그 불상은 신라인의 얼굴이 되는 거죠. 그리고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규모는 작아지면서 섬세하고 정교하게 바뀌는 거죠.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금속활자나 고려청자라든가 대표적이고. 조선시대에는 국학으로 삼은 성리학 자체를 조선 성리학으로 한 단계 고양시켜서 그것이 조선의 국학이 되고. 그래서 조선 후기에 가면 조선 고유문화 창달한 것이 겸제의 진경산수, 추사의 추사체, 이런 것들이 전부 조선에서 나오는 서화죠. 그래서 내 문화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씨름하는 것도 벌거벗고 씨름하는 걸 전부 그려내는 거죠. 그래서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그런 창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근대사학으로 가겠습니다.
근대사학은 식민사학이 풍미하니까 이제 전통사학 갖고는 안 되겠다. 우리도 서양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식민사학에 대한 대응으로 근대사학이 우리나라에서도 싹트고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사학이 처음에, 이건 1880년대부터 개화운동이 본격적으로 되니까 차츰 우리나라 학자 중에서도 서구적인 방법으로 우리도 우리 역사를 연구해야겠다, 그러면서 우선 배워야 되니까 서구 역사서들을 많이 들여서 스터디하죠.
그래서 이 분들 중에서 상당수가 민족주의사학이라고 써놨는데요. 이건 일제가 강점하고 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 이런 분들도 처음엔 계몽주의사학으로 시작했는데 나라가 망하니까 이 분들이 민족주의사학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민족주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민족주의는 전통시대에는 있지도 않은 용어에요.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생긴 용어인데 이건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와 동전의 안팎이죠. 제국주의에 대응해서 민족주의 사학을 하는 거죠. 그래서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색채가 있습니다. 역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게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제일 앞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역사는 나와 나 아닌 존재의 투쟁이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됐죠. 이 분들이 굉장한 애국자고 당시에는 이 분들이 있어서 독립운동의 귀의처가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 와서는 이 분들도 역사적 인물로 재평가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회경제사학이 있는데, 사회경제사학이 일본에 유학했던 분들 중에서 막시즘의 세례를 받은 분들. 백남훈이라든가 김석형 이런 분들이 와서 우리 전 역사를 물적기초로 한 번 정리해 보는 거죠. 그런데 사실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한 번 물적 기초로 우리 역사를 정리해보는 의미는 있었는데, 역사라는 게 물적 기초로만 전개되는 게 아니죠. 그런데 이 분들은 도그마에 빠진 거죠. 모든 걸 물적 기초로만 해석하고 정리한.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장점은 있지만 물적 기초라는 도그마에 빠졌고. 이 분들이 대개는 월북했습니다. 그래서 남쪽에는 이 분들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 다음에 오히려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게 민중사학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70년대 경제성장을 거치고 나서는 분배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떻게 보면 자생적으로 사회 경제적인 사회경제사와 거의 유사한 민중사학이 나타나면서 그게 바로 80년대 신군부에 대한 맹렬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된 거죠. 그래서 민중사학으로 자생적으로 나타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 다음 실증사학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본 유학했던 분들이에요. 그래서 1934년에 이 분들이 진단학회를 조직합니다. 그래서 진단학회라는 건 역사뿐만 아니라 민속학, 문학, 이런 거 하는 분들이 전부 모여서 조직했죠. 그래서 이 분들이 내세우는 건 중화한 실증주의, 독일 랑케사학을 일본에서 이식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장점은 모든 역사는 실증에 의해야 한다. 역사를 철저하게 실증하는 기초를 세웠지만 이 분들도 의식, 역사관 면에서는 식민사관을 넘어서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분들 학력이 굉장히 좋죠. 그러니까 자격이 있죠. 그래서 광복 후 이 분들이 다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겁니다. 아무튼 이 분들이 아주 실증을 중요시한 건 역사의 기초공사를 분명히 한 공이 있는데 식민사관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후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리고 신민족주의사학. 아까 민족주의사학 할 때 제가 빠뜨렸는데 바로 민족주의사학 하던 분들이 재야사학으로 계승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지금도 재야사학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재야사학이 붐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야사학의 특징은 굉장히 애국적이에요. 그런데 너무 극우로 해서 일본의 극우가 일본에 미치는 영향이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굉장히 애국적인데 대신 일본을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비판받게 하는데, 우리도 바로 이런 재야사학 하는 분들이 아주 애국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위험한 것.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만주를 다 답사하고 여기도 우리땅, 그러고 태극기 꽂고 거기서 의식 같은 걸 치르는데 정말 애국적이고 감격스럽고 가슴 뛰는 일이지만, 중국은 그걸 보고 동북공정을 시작한 거죠. 안 되겠구나. 더군다나 연변 쪽에 조선족도 많고.
그래서 우리가 재야사학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민족주의사학은 일제가 패망할 즈음 1940년대쯤 되니까 이제는 일제가 패망하겠구나. 역사를 하는 건 과거를 돌이켜서 거기에 거울로서 비춰보고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까지도 전망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분들이 벌써 일제 패망을 예견했습니다. 일본은 패망할 거다.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민족주의는 앞으로는 이렇게 배타적 이기적인 민족주의 갖고는 안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있는 이상 민족주의 버리고 우리가 뭘로 구심점을 삼을 것이냐. 그래서 세계 모든 민족의 공존공영, 세계 모든 국가의 평화공존, 이런 쪽으로 우리가 민족주의를 해야겠다. 각 민족의 언어문화 이런 거 서로 다 인정하면서 민족 단위로 우리가 평화 공존을 추구해야겠다, 이런 분들이 생겨났어요. 이 분들이 신민족주의 사학입니다.
마지막으로 근현대사 문젭니다. 근현대사를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는데, 그동안 좌편향적 역사인식이란 얘기를 우리가 많이 했습니다. 좌편향적 역사인식이라는 건 더 쉽게 말씀드리면 비판론적인 역사인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좀 비판적으로 보고 이 비판이라는 건 반성을 위해서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좌편향적인 역사인식도 한 단계로서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지나쳐서 우리 국가의 그동안의 발전에는 좀 소홀히 하고 너무 자기 자학적인 측면까지 갔다는 것, 이게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 싶고. 그래서 이게 지나치니까 이젠 우편향적 역사인식. 소위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런 것도 나왔습니다. 이건 굉장히 현실론적인 역사인식이에요. 우리의 현실을 다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보자. 그런데 우편향적 역사인식도 좌편향적 역사인식에 대한 하나의 반성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반성이 너무 현실을 긍정하다 보니 일제시대까지 긍정하는 폐단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우라는 게 어떻게 보면 방법론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우리가 역사인식이 국민통합에 기여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통합적이고 균형감각이 있는 역사인식으로 우리 전 역사를 한 번 다시 재검토하고 그런 쪽으로 앞으로 역사인식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지난 월요일부터 4일 동안 방송된 건국 60년 기념사업 추진단의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 그 마지막 시간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
현 국사편찬위원장 정옥자의 KBS Radio 강연내용!
위 지도는 우리가 배우기로는 중국 송(宋)나라때(960~1277)년에 만들어진 "송본지리지장도" 라는 지도입니다. 여기서 말하건데 이 지도가 그려진 시점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하기 전이었고, 이 전에 만들어진 지도는 아직 발견된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지도속에 우리의 국토는 너무나 넓습니다.
지난 8월 14일 백주대낮에 KBS 1Radio를 통해 쏟아낸,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장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국사편찬 위원장의 인식을 읽어 낼수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자신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것이 아닌... 강호사학에 물든 연구자들과 여행객들이 함부로 하여서 라는 소리인데... 참... 뭐라 말을 해야할지... 저런년을 우리나라 역사를 다루는 기관의 최고인으로 뽑아놨다는것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와는 전혀 다른 뻘소리만... 최고수준 매국노의 뻘소리 인터뷰 내용을 이곳에 올리고자 합니다.
KBS 1Radio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 2008년 8월 14일
[다시듣기] 20080814.wma
KBS 방송파일 절대경로 :
mms://211.233.92.72/aod_new/1radio/interview_20080814.wma
위 URL에서 직접 다운로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래 다운로드 링크를 이용해 다운로드 받으신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Downloads] http://user.chol.com/~pmsam/ksk/interview_20080814.wma
제목 : 8.14(목) 대한민국 60년, '역사, 미래와 만나다' 강연4 -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6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서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기까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텐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건국 60년 기념사업 추진단의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
‘역사, 미래와 만나다’ 그 마지막 시간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 함께 합니다..
정옥자 위원장은 대한민국 60년, 우리 역사를 보는 눈에 대해 얘기 하는데요..
지금부터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정옥자 위원장:
제가 우리 역사를 보는 눈, 말하자면 사관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문제가 첨예하게 대립양상을 보이는 것도 결국 역사를 보는 눈의 문젭니다.
역사적인 사실, 자료, 팩트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서 시각차이가 있어서 이런 갈등이 오는 거기 때문에 사실은 역사관, 우리 역사를 보는 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우리 전통시대의 역사학에 대해서 약간 개관을 하고, 그리고 소위 근대사학 이후 사관 문제를 말씀드리는 순서로 하겠습니다.
역사연구는 대개 몇 가지 서술방법을 선택했는데
첫 번째가 기전쳅니다. 기전체는 아시다시피 본기와 열전이 중심이 된 사마천의 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동양에서의 기전체가 굉장히 많이 활용됩니다. 기전체의 특징은 본기와 열전이라는 것. 본기는 제왕의 정치사죠 말하자면 제왕의 통치행위, 그리고 열전은 당 시대에 살던 중요한 인물들을 유형별로 서술해서 라이프스토리를 써놓으니까 지금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별로 다름없구나 아주 구조적으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는 연표가 있고.
그리고 기사본말체는 사건의 원인, 경과, 결과를 죽 서술하는 건데 이건 각론을 쓸 때 유효합니다.
임진왜란 하면 그것의 원인, 경과, 결과, 이런 식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사건 서술에 유효한데 사실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사학이 이것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기사본말체는 사건 서술의 각론을 쓸 때 유효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편년체인데 편년체는 역사를 시간에 따라 죽 서술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같으면 편년체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데 굉장히 많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그렇게 조선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객관적으로 시간에 따라 죽 서술해놓고 있어서 오늘날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자료로 이것을 굉장히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강목체인데 이건 성리학적 역사서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강이라는 건 역사의 큰 줄기, 목은 각론입니다.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 그래서 전체 숲이 강이라면 거기에 하나하나 나무가 목이죠. 그래서 강과 목을 다 보는 겁니다. 전체를 그냥 한 번 죽 볼 때는 강만 읽고 세밀하게 내용을 탐색할 때는 목을 읽습니다. 그래서 강과 목이 다 갖춰 읽는 걸 굉장히 중요시했고, 그런데 이런 전통시대에 중요했던 역사가, 소위 식민사학이라는 게 시작되면서 상당히 많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식민사학은 아시다시피 제국주의적 역사학이죠.
그래서 이 제국주의적 역사학은 쉽게 말씀드리면 무력의 논리로 역사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제국주의에 의한 일본의 식민사학은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시키는 하나의 기틀이 되기 때문에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가 반도적 성격론입니다.
이건 쉽게 말해서 지리적 결정론입니다. 우리나라가 반도에 있기 때문에 독립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그동안엔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이젠 일본의 온정주의적인 지배를 받을 시기가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데 문제는 반도적 성격론이 단점만 애기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장점을 얘기 안 합니다. 그래서 반도적 성격론은 오늘날 와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시점에서 일제시대에 이런 것들이 지식인에게 굉장히 먹혔다는 얘기죠. 이광수 같은 분까지 여기 동조했으니까 보통사람에 대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런데 단적으로 반도에 있어서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가 역사상 있습니다. 로마제국이죠. 바로 반도에 있기 때문에 해양문화와 대륙문화를 다 아우르면서 세계 제국을 건설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분명히 반도에 있기 때문에 그 장점을 아마 충분히 살려서 우리가 동북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쪽에서는 문화중심국으로 분명히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사대주의론인데, 사대와 교린이란 말은 있었죠. 전통시대에. 사대는 중국과의 외교관계, 교린은 기타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죠. 사대와 교린은 전통시대의 외교용어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대라는 말에 주의를 붙인 거죠.
그래서 사대주의. 강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용어를 새로 만든 겁니다. 사대주의라는 말은 없고 사대라는 말은 있었죠.
그럼 전통시대 사대라는 말이 과연 그렇게 강자에게 일방적으로 굴종했느냐, 그거 아닙니다. 전통시대의 사대라는 건 중국과의 외교관계인데 그 핵심에 조공과 책봉이 있습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조공은 특산물 바쳤다는 건데 일방적으로 바친 거 아닙니다. 조공품이 있고 대가로 사여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공품은 뭘 가졌을까요? 인삼이죠. 대표적인 게 양각삼, 양처럼 뿔이 났다고 해서. 그 다음 종이에요. 명경지라고 해서 거울처럼 맑게 비치면서도 찢어지지 않는 당시의 아주 최고품이죠. 그 다음 황모필이에요. 황모 꼬리에서 나는 털이 아주 귀하고 질이 좋아서 그걸로 만든 붓, 이게 또 당시 최고품입니다 동북아시아의. 그리고 화문석입니다. 강화도에서 나오는. 그냥 쉽게 말씀드리면 토산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중국이 사여품이라고 해서 대가로 주는 물건은 뭘까요? 비단이라고 얘기하시는데, 비단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고 중국이 적극적으로 준 게 서적입니다. 우리가 제일 원한 게 책입니다. 선진문화를 중국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책에 최신 정보가 다 있고 그래서 책을 제일 선호했고 중국도 책을 줬습니다. 그리고 비단인데 비단은 사실 전통시대엔 용도가 많습니다. 우린 옷 해 입는 것만 자꾸 생각하는데 책 표지로 굉장히 많이 썼어요. 그래서 비단... 그 다음에 가져온 게 약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서역에서 들여왔거나 중국 본토는 말할 것도 없고 또 내몽고 이런 쪽에서 가져온 약재가 굉장히 우리한테 중요하기 때문에, 약재. 그래서 실제로 가져간 물건과 우리가 받아온 물건이 거의 동량 동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물건 갖다 바치면서 그런 적 없고 이건 공무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그때 가져가는 것도 예물이란 이름으로 가져가고 그쪽에서 주는 것도 예물입니다.
그리고 책봉이라는 것이 정권 교체할 때 중국의 비준을 받는 거나 비슷한데 역사에서 보면 도대체 어느 시기 동서고금에 주도하는 국가는 있게 마련입니다. 주도하는 국가와 관계 설정을 잘 하면서 어떻게 자주적으로 생존방식을 잘 개발해서 살아가느냐, 그런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는 오늘날 이런 것을 너무 지배와 피지배라는 양분법으로만 자꾸 해석하면서 전통시대 중국에 종속돼 있었던 걸로 자꾸 오해합니다. 그런데 사실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였지만 조선만큼 자주적이고 자기 정체성 지키면서 자부심 갖고 산 나라가 없습니다. 그건 고려도 마찬가집니다. 몽고라는 대 제국을 건설하고 몽고가 그렇게 복속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끝까지 항거하고 부마국으로서, 사돈 맺는 거 아닙니까? 지금도 딸 아무 데나 시집 안 보내죠. 상당히 자기와 대등한 위상을 가져야 맺는 거나 마찬가진데 고려도 사실은 부마국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통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지금 현대의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대외교질서인데 이걸 너무 힘의 논리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오늘날 전통시대의 상당 부분이 잘못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당쟁론인데 조선이 당쟁하다가 망했다.
그런 얘기를 일본 학자들이 계속 퍼뜨려서 우리도 잘 모르면서 당쟁하다 망했나보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색당파가 동시에 공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즈음해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학파가 크게 두 개로 됐는데요 그건 사림이 등장하면서 기존 정치세력... 훈구파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훈구파는 나쁜 것, 사림파는 좋은 건, 자꾸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훈구파는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한 국가에 공훈을 세운 정치적 구파입니다. 공훈을 세운 훈자와 구파, 그래서 훈구파입니다. 이 사람들 아니면 조선왕조가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없었어요. 성종때 되면 그들이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거기 안주하는 성향을 보이니까 성종 때에 안 되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비판세력으로 지방에서 학문하던 사림파를 왕이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림파가 혁신정치를 외치면서 그 후 중종 때 가면 여러분이 다 아시는 정암 조광조 선생 같은 분은 굉장히 격렬하게 개혁을 부르짖죠. 그런데 왜 그때 그럼 실패했는가, 너무 성급하게,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철인정치가 뭔지 그런 데 대한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왕에게는 철인이 되라고 하고. 그러니 결국 왕도 마지막에는 지쳐서 중종이 아무리 반정에 의해서 왕에 올랐지만 왕이 동조 안 하고 지식인의 상당 부분이 아직은 훈구파고 그러니 결국 실패했죠.
그래서 그 후 선조때 가서야 16세기 가서 율곡 이이 선생 같은 분은 조광조의 실패를 아주 뼈저리게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과격하게 급진적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때 되면 학파가 형성되면서 바로 영남학파가 동인, 기호학파가 서인. 다만 그 제자들이 나중에 방법론의 차이로 뒤에 정파를 구성하면서 갈등이 심해져서 소급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엔 동인과 서인이 있었는데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이 갈라졌기 때문에 3당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3당체제에서 임진왜란을 겪고 나니 북인이 상당히 의병활동에 공을 세우면서, 북인정권이 광해군 정권입니다. 그런데 광해군 정권의 실정이라든가 그런 방향성 문제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폐모살제 같은 문제. 그게 당시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반정에 의해서 인조가 왕에 오르고, 그 이후에는 양당 체젭니다. 서인이 여당이고 남인이 야당입니다. 북인은 광해군정권과 함께 몰락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후 17세기 말에 구체적으로는 1683년경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색당파로 갈려서 계속 싸움질했다, 이건 맞지 않는 겁니다. 이미 그 이전에 양당체제 형태를 구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양당체제와 똑같진 않더라도, 국회는 없지만, 결국은 일진일퇴합니다.
네 번째가 문화적 비독창성론인데, 너희들 아주 독창적인 걸 말해봐라. 전부 중국 것 갖다가 재탕삼탕하지 않느냐 그런 소릴 해요. 그런데 도대체 문화라는 것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요즘 문화 하면 자꾸 예술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은 문화의 한 부분이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고급문화는 굉장히 인간적이고 품격 높은 삶의 방식을 구축한 게 고급문화고, 또 저급문화는 그렇지 못한 게 저급문화죠. 그래서 우리가 물론 전통시대에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고급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고급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때는 문화유입통로가 중국이니까요. 그리고 일본은 그때는 동아시아에서는 아주 한 옆에 있는 고립된 섬으로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문화가 많이 전파된 거죠. 그게 거의 19세기 전반, 초까지는 통신사가 다닐 때까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 후에 서양과 직접 통교하면서 달라졌지만요. 그래서 우리가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능력이 바로 문화능력입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여서 아류로 전락한 게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승화시켜서 오히려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것. 그래서 우리 고유문화를 창출한 게 우리 능력입니다. 그건 고대부터 얘기하면 원효의 불교사상도 결국 중국을 통해서 중국불교 받아들인 거죠. 원효가 그걸 더 일원화시켜서 중국에 역수출했다는 거. 또 석굴암도 우리나라에 오면 결국 재질이 우리는 화강암이 많으니까, 화강암으로. 작지만 굉장히 정교하고 섬세하게, 아무리 중국 돈황에서 받아들였더라도 그 불상은 신라인의 얼굴이 되는 거죠. 그리고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규모는 작아지면서 섬세하고 정교하게 바뀌는 거죠.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금속활자나 고려청자라든가 대표적이고. 조선시대에는 국학으로 삼은 성리학 자체를 조선 성리학으로 한 단계 고양시켜서 그것이 조선의 국학이 되고. 그래서 조선 후기에 가면 조선 고유문화 창달한 것이 겸제의 진경산수, 추사의 추사체, 이런 것들이 전부 조선에서 나오는 서화죠. 그래서 내 문화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씨름하는 것도 벌거벗고 씨름하는 걸 전부 그려내는 거죠. 그래서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그런 창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근대사학으로 가겠습니다.
근대사학은 식민사학이 풍미하니까 이제 전통사학 갖고는 안 되겠다. 우리도 서양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식민사학에 대한 대응으로 근대사학이 우리나라에서도 싹트고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사학이 처음에, 이건 1880년대부터 개화운동이 본격적으로 되니까 차츰 우리나라 학자 중에서도 서구적인 방법으로 우리도 우리 역사를 연구해야겠다, 그러면서 우선 배워야 되니까 서구 역사서들을 많이 들여서 스터디하죠.
그래서 이 분들 중에서 상당수가 민족주의사학이라고 써놨는데요.
이건 일제가 강점하고 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 이런 분들도 처음엔 계몽주의사학으로 시작했는데 나라가 망하니까 이 분들이 민족주의사학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민족주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민족주의는 전통시대에는 있지도 않은 용어에요.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생긴 용어인데 이건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와 동전의 안팎이죠. 제국주의에 대응해서 민족주의 사학을 하는 거죠. 그래서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색채가 있습니다. 역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게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제일 앞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역사는 나와 나 아닌 존재의 투쟁이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됐죠.
이 분들이 굉장한 애국자고 당시에는 이 분들이 있어서 독립운동의 귀의처가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 와서는 이 분들도 역사적 인물로 재평가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회경제사학이 있는데, 사회경제사학이 일본에 유학했던 분들 중에서 막시즘의 세례를 받은 분들. 백남훈이라든가 김석형 이런 분들이 와서 우리 전 역사를 물적기초로 한 번 정리해 보는 거죠. 그런데 사실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한 번 물적 기초로 우리 역사를 정리해보는 의미는 있었는데, 역사라는 게 물적 기초로만 전개되는 게 아니죠. 그런데 이 분들은 도그마에 빠진 거죠. 모든 걸 물적 기초로만 해석하고 정리한.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장점은 있지만 물적 기초라는 도그마에 빠졌고. 이 분들이 대개는 월북했습니다. 그래서 남쪽에는 이 분들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 다음에 오히려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게 민중사학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70년대 경제성장을 거치고 나서는 분배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떻게 보면 자생적으로 사회 경제적인 사회경제사와 거의 유사한 민중사학이 나타나면서 그게 바로 80년대 신군부에 대한 맹렬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된 거죠. 그래서 민중사학으로 자생적으로 나타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 다음 실증사학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본 유학했던 분들이에요. 그래서 1934년에 이 분들이 진단학회를 조직합니다. 그래서 진단학회라는 건 역사뿐만 아니라 민속학, 문학, 이런 거 하는 분들이 전부 모여서 조직했죠. 그래서 이 분들이 내세우는 건 중화한 실증주의, 독일 랑케사학을 일본에서 이식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장점은 모든 역사는 실증에 의해야 한다. 역사를 철저하게 실증하는 기초를 세웠지만 이 분들도 의식, 역사관 면에서는 식민사관을 넘어서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분들 학력이 굉장히 좋죠.
그러니까 자격이 있죠.
그래서 광복 후 이 분들이 다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겁니다.
아무튼 이 분들이 아주 실증을 중요시한 건 역사의 기초공사를 분명히 한 공이 있는데 식민사관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후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리고 신민족주의사학. 아까 민족주의사학 할 때 제가 빠뜨렸는데
바로 민족주의사학 하던 분들이 재야사학으로 계승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지금도 재야사학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재야사학이 붐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야사학의 특징은 굉장히 애국적이에요.
그런데 너무 극우로 해서 일본의 극우가 일본에 미치는 영향이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굉장히 애국적인데 대신 일본을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비판받게 하는데,
우리도 바로 이런 재야사학 하는 분들이 아주 애국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위험한 것.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만주를 다 답사하고 여기도 우리땅, 그러고 태극기 꽂고 거기서 의식 같은 걸 치르는데 정말 애국적이고 감격스럽고 가슴 뛰는 일이지만, 중국은 그걸 보고 동북공정을 시작한 거죠. 안 되겠구나. 더군다나 연변 쪽에 조선족도 많고.
그래서 우리가 재야사학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민족주의사학은 일제가 패망할 즈음 1940년대쯤 되니까 이제는 일제가 패망하겠구나. 역사를 하는 건 과거를 돌이켜서 거기에 거울로서 비춰보고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까지도 전망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분들이 벌써 일제 패망을 예견했습니다. 일본은 패망할 거다.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민족주의는 앞으로는 이렇게 배타적 이기적인 민족주의 갖고는 안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있는 이상 민족주의 버리고 우리가 뭘로 구심점을 삼을 것이냐. 그래서 세계 모든 민족의 공존공영, 세계 모든 국가의 평화공존, 이런 쪽으로 우리가 민족주의를 해야겠다. 각 민족의 언어문화 이런 거 서로 다 인정하면서 민족 단위로 우리가 평화 공존을 추구해야겠다, 이런 분들이 생겨났어요. 이 분들이 신민족주의 사학입니다.
마지막으로 근현대사 문젭니다.
근현대사를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는데,
그동안 좌편향적 역사인식이란 얘기를 우리가 많이 했습니다. 좌편향적 역사인식이라는 건 더 쉽게 말씀드리면 비판론적인 역사인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좀 비판적으로 보고 이 비판이라는 건 반성을 위해서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좌편향적인 역사인식도 한 단계로서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지나쳐서 우리 국가의 그동안의 발전에는 좀 소홀히 하고 너무 자기 자학적인 측면까지 갔다는 것, 이게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 싶고.
그래서 이게 지나치니까 이젠 우편향적 역사인식. 소위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런 것도 나왔습니다. 이건 굉장히 현실론적인 역사인식이에요. 우리의 현실을 다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보자.
그런데 우편향적 역사인식도 좌편향적 역사인식에 대한 하나의 반성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반성이 너무 현실을 긍정하다 보니 일제시대까지 긍정하는 폐단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우라는 게 어떻게 보면 방법론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우리가 역사인식이 국민통합에 기여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통합적이고 균형감각이 있는 역사인식으로 우리 전 역사를 한 번 다시 재검토하고 그런 쪽으로 앞으로 역사인식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지난 월요일부터 4일 동안 방송된 건국 60년 기념사업 추진단의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
그 마지막 시간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위원장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