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봉사와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착해지고, 우리 몸도 영향을 받아 신체내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물질 lgA가 생긴다는 미국 하버드 의대의 보고서에서 인용된 용어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 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니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데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데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데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리지 외의 성녀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리지 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데레사는 1888년 열 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서의 길을 따랐다. 데레사는 라고 했다. 리지 외의 데레사는 자신을 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데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이라고 불렀다.
마더 데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데레사가 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데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데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마더 데레사는 어디에 뭐가 필요한 지를 알아 적절히 대응하고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하고, 회헌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지부를 파견하는 등 전형적이고도 정력적인 실업가로 보인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일상적으로 설명했다.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현대에서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개념, 즉 균형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거룩함이 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갈라진 지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고르게 결합된다는 의미이다.
마더 데레사의 영적인 길은 관상생활이 사랑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단순성 뒤에는 탁월한 신앙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여러 해 동안의 체험과 봉헌이 숨어 있다. 마더 데레사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1910년 8월 27일. 옛 유고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데레사가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꽃망울(곤히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데레사는 소녀 시절 신심회라는 본당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당시 예수회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살 때였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데레사 수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창 세상을 동경할 나이인 18세(1928년). 데레사 수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까지 배웅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가서 요양을 했다.
데레사 수녀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은 바로 이때다. 데레사 수녀는 지질링을 다녀와서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빈민굴로 자리를 옮기는 데는 수녀회 허락이 늦어져 2년이란 기간이 소요됐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평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 모은 신비로 운 힘을 발휘했다.
연약한 수녀의 몸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한 빈민구호사업.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빈민구호사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1950년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설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 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어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도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 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노벨 평화상, 케네디 인권상, 인도 최고의 바라트라트나 훈장...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1997년 9월5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메시지를 남겼다.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온정입니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2. 데레사수녀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1974년 인터뷰에서)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 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 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996년 연설)
"낙태는 '자궁내 살인'입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원하지 않으면 저에게 보내주십시오."(유엔 연설에서)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만일 달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그곳에도 갈 것입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없는 사람과 불구자, 맹인, 나환자,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됐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의사를 밝히며)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이 전쟁에서 단기간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하는 승자나 패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통과 참상, 당신들이 무기가 저지른 생명의 손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사랑의 등불 머더 데레사'에서)
"나는 전쟁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근과 주검은 봤습니다. 나는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3. 데레사수녀님 연보
1910년: 8월 27일 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께 건축업자의 1남2녀 중 막내로 출생.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캘커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인도 지질링 도착. 1929-1948년: 캘커타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학 교편을 잡다 교장에 임명, 로레토 수녀회와 관련있는 인도 수녀회인 성안나 수녀원의 수련장 맡음. 1946년: 결핵 때문에 요양차 기차를 타고 산간도시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음. 곧바로 빈민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 수녀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 1948년: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하얀 사리와 이마에는 푸른 줄무니가 있는 새 수도복을 입음. 3개월간 미국 의료수녀원이 잇는 파트나에서 간호학을 수학. 그해 성탄절에 캘커타로 돌아와서 빈민촌에 학교를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창립.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를 설립, 다음해 고아원을 세움. 1962년: 파드마 슈리상 수상, 상금으로 여러 곳에 새 안식처를 건립. 1963-1978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황청 인가 취득, 첫 해외시설을 베네수엘라 코코로트에 건립. 사랑의 선교회 남자 수도회가 앤드루수사에 의해 창설, 국제 데레사수녀협조자회와 자매결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음. 상금으로 나환자들의재활센터를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명명. 69년 중국 방문.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상금 19만2천달러는 나환우 구호소 건립 기금에 씀. 1981-1985년: 81년, 82년, 85년 3차례 한국 방문. 1982년: 포위된 베이루트의 한 병원에서 37명의 지진아를 구조하는동안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에게 총격을 멈추도록 설득.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 발작을 일으킴. 1985년: 미국 '자유의 메달' 수상. 뉴욕에 에이즈 말기 환자를 위한병원 건립. 1989년: 두 번째 심장 발작. 삼장박동 조절장치를 주입시킴. 1990년: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표명. 후계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에서 데레사 수녀 자신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재선됨. 1991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폐렴 발생. 심부전 발생.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입원. 1993년: 5월 로마에서 넘어져 늑골 3개가 부러짐. 8월 뉴델리에서 말라리아로 입원. 9월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음. 1996년: 미국 명예시민권 받음. 또다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짐. 8월 말라리아 발병, 좌심실 부전, 폐감염, 심장병 재발, 11월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입원. 1997년: 3월 13일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9월 5일 밤 9시30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열성적인 카톨릭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교리 공부를 열심히 했던 테레사는 선교활동에 관심을 갖고 1928년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들어간다. 수녀회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인도의 캘커타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열망으로 '사랑의 선교회'을 열고 집을 마련한다. 나환자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재활 센터를 마련하기도 하고, 빈민굴에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고 있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기도 한다. 세계 곳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돌보는가 하면,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조지 대통령과 후세인 대통령을 찾아가 전쟁을 중지시키도록 호소하기도 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역이 있으면 그곳으로 달려가 부상자를 돌보기도 한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온 마더 테레사는 1949년 받은 노벨 평화상 외에도 수많은 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테레사의 정신과 활동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상으로도 평가할 수 없다. 1997년 죽기 전까지 심장병과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자선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
1910: 유럽 남동부에서 태어난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마더 네레사)는 캘커자의 빈민굴에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수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된다. 노벨 평화상과 종교의 발전을 위한 템플턴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그녀는 교황님과 대통령, 귀족들과 개인 친분을 쌓는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비천한 일을 하는데 결코 주저한 적이 없으며 자주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겸손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한 107군데 수도원은 국제적으로 4천 명의 수녀와 수사들이 있다.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묘사한 시편은 그녀에게 꼭 들어맞는 내용이다. "야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늙어서도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진기있고 싱싱하오리니 그들은 주께서 얼마나 바르심을 내 바위, 당신께는 하지 없으심을 널리 알리리이다.(시편 91편 14-16)
1910년 8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1900년에 결혼한 니콜 브약스히야와 드라나 베르나이의 막내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나다. 언니 아가는 1905년에 태어나고, 오빠 나자르는 1907년에 태어나다.
1910년 8월 27일: 예수 성심 성당에서 아네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부모는 열성저인 가톨길 신자로,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었다.
1919년: 니콜 브약스히야는 정치적인 회의에 참석한 뒤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력한 국수주의자의 신념을 갖고 있는 시의원이었다.
1915-24년: 아녜스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빠 언니와 함께 아녜스는공립학교에 다닌다. 건강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본당 교리공부반에 나가는 한편 본당 성가대원으로, 마리아의 딸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청녀단체에 속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인들에 대한 책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마더 테레사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가족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우 화합된 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위해 살았으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단결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외아들ㅇ니 나자르는 어머니와 누이들의 종교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성당 바로 옆집에서 살았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와 누이들은 집에서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성가대나 봉사난 선교에 관한 토론 문네에 늘 관여하곤 했습니다." 또한 나자르는 어머니의 관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그 많은 가난한 사람을 빈손으로 가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우리와 피를 나눈 친척도 아니고 또 비록 저렇게 가난하지만 우리 형제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라.'"
아녜스는 열두 살 때 선교사의 삶에 대한 부르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후 몇 년 동안 이 소명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잠을 잔다. 그 사이에 그녀는 마리아의 딸들회의 활동당원으로 일한다.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님의 권유로 그녀는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녜스의 오빠 나자르는 기병장교가 되기 위해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옮겨 간다.
1928년: 아녜스가 스코페의 수호성인 재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의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명백한 소명임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의 성모님께서 나를 중재하시어 나의 소명을 찾도록 도와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유고슬라비아 예수회의 지도와 도움으로 아녜스는 (아일랜드의 성모라고 볼리는) 메리워드가 16세기에 설립한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입회를 신청한다. 그녀는 인도에서 하는 그들의 선교사업에 큰 매력을 느낀다.
1928년 9월 26일:입회 허락을 받고 아녜스는 더블린으로 간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을 거쳐 로게토 성모수녀회 본원에 도착한다.
1928년 12월 1일: 두 달 동안 집중적인 영어공부를 한 후 아ㅖ스는 배로 더블린을 떠나 37일 후인 1929년 1월 6일에 인도에 도착한다. 아녜스는 캘커다에 1주일만 머물고 곧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다질링으로 가 수련기를 시작한다.
1931년 5월 24일: 수련기 2년을 보내고 아녜스는 세례명을 테레사로 바꾸고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유기서원을 한다. "저는 수도서원을 할 대 테레사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석은 아빌라의 대 테레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나는 리지외의 소화 테레사를 택했습니다."
1931-37년: 유기서원을 한 후에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살면서 로테토 성모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선생님으로 일한다.
1937년 5월 24일: 몇 번에 걸쳐 유기서원을 갱신하고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그리고 마힘내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다. 마더 테레사는 수녀회에서의 삶을 이럿게 총망라한다. "나는 로페토에서 제일 행복한 수녀였습니다. 가르치는 에 나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으니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수행하는 진정한 사도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1946 9월 10일: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가난한 이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시다. 마더 테레사는 그날을 '영감의 날'이라고 부른다. "내가 대피정에 참석하려고 캘커다에서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선명하게 나의 소명 안에 또 다른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 메시지는 명백했습니다. 나는 우리 수오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가야 할 목적지는 알았지만 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1948년:로레토 성모수녀회를 떠나는 석은 테레사 수녀에게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그녀의 수도회로 보래주는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도 수녀로서 살도록 허락이 떨어진다.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복을 벗고 인다아에서 가장 가난한 여자들이 입는 흰 사리로 갈아입고 수도회를 떠난다. 사리에는 그녀가 동정 마리아를 닮고 캘커타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과장을 이수한 후 곧 돌아와 캘터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한는 열망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해 그녀는 인도의 시민권을 신청하는데, 곧바로 평생 인도 시민권을 받는다.
1949년 3월 19일: 첫번째 지원자가 마더 테레사와 합류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르치던 제자 슈바시니 다스가 어느날 예기치 않게 그녀를 방문해 함께할 것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번째 수녀가 된다.
1950년 7월 10일: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상당수의 젊은 여성들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1949년 이후 나는 젊은 여성들이 한 명씩 도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옛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싶어했고, 매우 신속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1950년 10월 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서는 사랑의 선교회를 승인한다. 10명의 수녀가 2년간의 수련기를 시작한다.
1952년: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수도회에 회원이 30여 명이 된다. 그 중에 12명은 종신서원자이고 12명은 수련자, 나머지는 청원자였다. 아직도 수녀들은 자기들의 수도원이 없었다. 그들은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에서 '손님'으로 지낸다. 구녀들은 빈민가에 버림받은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수도자 양성과 공부에 열중한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중심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 칼리하트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얻는다. 그 집은 8월 22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문을 여는데 열자마자 정원까지 꽉 들어찬다.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퇴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계속된다. 항상 새로운 지원자가 뒤를 이어온다. 그 집의 이름은 힌두어로 니르말 리다이인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이 힌두인이기 때문이었다.
1953년: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창립된다. 끊임없는 기도 덕택에 하늘의 선물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수도원을 위해 캘커타 54번가에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할 수있는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본원은 사랑의 선교회 총사령부가 된다. 수녀들은 버림받은 비민굴의 고아들을 위해 같은 거리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가 후에 그 집을 사게 된다. 고아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의 집에서 죽은 부모들의 어린이들이다. 수녀들은 자신들이 돌볼 나환우들의 집을 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우선 나환우들을 위한 '이동 병실'부터 시작한다. 후에 수녀들은 캘커타 외곽지대에 티타가르와 산티나가르라 불리는 나환우들이 자랍할 수있는 재활 센터를 연다.
1962년: 마더 테레사는 인도 정보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상을 받게 되며, 동남 아시아의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아시아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아직 서구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65년 2월 1일: 사라의 선교회가 더한층 인저을 받는다. 이제 15년이 된 이 수도회는 놀랄 만큼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3백 명의 수녀와 여러 개의 틈이 생긴다. 유럽 여러 나라 수녀들이 포함된다. 그때까지 사랑의 선교회 수녀회는 지역 주교의 관할하에 인도에만 위치하게 된다. 몇몇 주교의 후원으로,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칭찬교령을 내리낟. 이 교령은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 대주교 초청과 아울러 사랑의 선교회 선교 사업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1965-71년:존세계에 새로운 분원이 문을 열게 된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분원이 마더 테레사의 첫버째 해외 분원이 된다. 그 다음해 지역 바톨릭 주교들의 초청으로 더 많은 분원이 아프리카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애들레이드, 유럽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문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 로마 분원이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의 주교 자격으로 일을 찬미하고 그녀의 후원자가 되며, 선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바타칸 시민권을 수여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1년에 50여 개의 분원를 갖게 된다.
1969년 3월 3일:교황 바오로 6세가 협조자의 회칙을 인정하여 그들도 사랑의 선교회에 공식적으로 병합된다.
1969년 3월 26일: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마더 테레사의 협조자들은 국제적으로 일반 평신도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들이 영성의 실체이며 사랑의 선교회 일을 더 넓혀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 그 수는 매년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 파악조차 힘들 정도이다.사랑의 선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래 협조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1970년:마더 테레사는 국제적인 중요한 상을 받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펜과 전파를 통해 마더 테레사를 서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상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종교의 진보상인 템플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에서는 요한 바오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2년 7월 12일: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가 알바니아에서 영면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칠리아에 있는 아들과 마더 테레사를 보고 싶어했지만, 알바니아 정부에서 그녀의 출국 허가를 거절한다.
1974년:마더 테레사의 언니 아가 브약스히야가 오빠의 여동새을 보지 못한 채 알바니아에서 죽다.
1979년 10월 17일: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의 단순성이나 겸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 10일: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삶을 모두 헌신한 가난한 사람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 올리프 5세로부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980-85년: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 곳에 새로운 분원을 열고, 많은 새로운 성소자의 축복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레바논, 서독,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브라질 ,페루,케냐,아이티, 스페인,에티오피아, 벨기에, 뉴기니아,아르헨티나 등 14군데에 분원을 연다.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뒤로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롤 뻗어 나간다. 1981년 한 새만도 8군데난 새로운 분원을 열고, 82년에는 12군데, 83년에는 14군데로 늘어난다. 사강의 선교회는 축복 속에 지원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시기에 참으로 예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89년:사라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에게는 닫혀 있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의 선교회는 에테오피아와 남예맨에 분원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또 그들은 나카라과와 쿠바와 러시아에서도 분원 허가를 받았느데, 이들 국가는 정책에 의해 무신론주의가 활발한 나라다. 소련의 경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결실의 하나로 마더 테레사가 모스크바에 분원 허가를 받는다.
1986년 2월:요한 바오로 2세가 캘커타를 방문한다. 마더 테레사를 방문한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이룬 여러 가지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1988년 5월 21일:사랑의 선교회는 로마의 바타칸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를 연다. 마리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의 선물'이라고 이름지어진 보호소에는 어른을 위한 72개의 침상과 2개의 식당이 있는데 한 식당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한 식당은 잠깐 들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요양소에는 휴게실과 진료실이 각각 하나씩 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알현실 쪽으로 난 정원이 있다.
1988-89년:마더 테레사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입원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과로해 입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황님조차도 건가에 좀더 유의할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주치의들은 그녀에게 전기 자극으로 심장 박동을 지속시키는 페이스메이커를 장치한 후 6개월 동안 안정을 취하도록 권한다.
1990년 4월 16일:건강을 이유로 마더 테레사는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책임에서 자유로원지자 그녀는 여러 수녀원을 방분하며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90년 9월:마더 테레사는 80고령인데다가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정년퇴직에 기각되어 다시 사랑의 선교회 총장직에 재선출된다.
1991년 1월:마더 테레사는 걸프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두 정상에게 호소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죄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정열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테레사의 요처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두 팀의 수녀들이 전쟁으로 약탈당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바그다드로 간다.
1991-93년:마더 테레사의 건강이 또다시 약화되어 처음엔 멕시코의 티후주아나에서, 다음엔 인도 델리에서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1993년 10월에 베이징의 초청에 응한다.
1993년 8월 30일:건강이 약화되자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만을 협조자로 부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 외에 사랑의 선교회에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해체된다.
1994년 2월 3일:미국 워싱턴 DC의 조찬 기도회에서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옆에서 마더 테레사는 수천 명의 관중이 넋을 잃고 듣고 있는 메시지에서 생명의 중시와 평화를 촉구한다. 후에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에게 '그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의탁의 삶'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1996년 4월: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 침대에서 떨어져 골절상으로 병원에 잠깐 입원한다.
1996년 8월:마더 테레사는 캘커타에 있는 병원에 말라리아로 입원한다. 장기간의 열벼이 심장 상태를 약화시킨데다 오랫동안 인공호흡용 마스크르 사용해 폐에까지 감염된다.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일터로 되돌아온다.
1996년 10월: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를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한다. 헌장에 서명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전세계 수백만 명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한다.
마더 데레사의 말씀
가,정,과,가,족,
부모들은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고 다정하게 보살피지요. 언젠가 열 두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인도인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이들 가운데 막내는 정말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흉측한 기형이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우리 집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그 어머니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수녀님, 제발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 온갖 사랑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만일 이 아이를 데려가시면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초연한 척하며 피상적인 차원에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 모범이신 예수님은 순종하는 일에서도 모범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의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 즉 나자렛의 성가족은 우리가 닮아야 할 훌륭한 모델입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부양하기 위하여 양식이나 의복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인 마리아 역시 아들과 남편을 보살피기 위하여 평범한 주부로서 자신의 일을 겸손하게 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자라면서 평범한 생활, 즉 자신과 남편과 함께 가정에 안주하게 될까 봐 염려했습니다. 그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했으며, 서로 다정하게 대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족은 우리의 훌륭한 모델입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활동을 하면서 가끔씩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우선,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빵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 본질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또 다른 형태의 가난도 존재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이들이나 부모님에게 부족한 것은 음식이나 좋은 옷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언제 시작되나요?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시작됩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함께 머뭅니다.
가끔 이기적인 부모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 사람들도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여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굶주림이 없는 세상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식구들이 느끼는 가난과 굶주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 굶주림과 가난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일하고 또 희생과 참화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성 빈센치오 아 바울로는 그의 수도회는 입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주인입니다. 우리가 존경심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 요.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만한 쓰레기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먹기 싫은 음식이나 상하려고 하는 음식을 그들에게 줍니다. 유효 기간이 지난 음식., 그래서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유행이 지난 옷, 이제는 입고 싶지 않는 옷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 주인으로 여기면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열등하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죠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한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몇 해 전, 캘커타에 설탕이 대단히 부족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네 살 정도 된 소년이 부모와 함께 나를 찾아왔습니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설탕 그릇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나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사흘 동안 먹지 않고 모아 둔 설탕이에요. 아이들이게 주세요." 그 어린 소년의 사랑은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소년은 서너 살밖에 안된 것 같았습니다. 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소년을 몰랐습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니까요. 그 부모 역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른들로부터 나의 처지에 대해 들은 다음 그런 결정을 내린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힌두교도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그런데 남은 것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서서히 주시는 사랑에 마음을 여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다정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분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은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보관해 두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서로 나누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되지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알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비난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비난한 그 나환자, 그 병자, 그 술 취한 사람이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사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비난한 그들, 병자, 알코올 중독자, 도둑이 바로 내 형제 자매입니다. 그들이 거리에 버려진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에 빠져들었다고 한 얘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겸손은 진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거든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가정이 조금만 더 사랑과 화합, 평화의 행복으로 충만했더라면 알코올 중독자와 약물 중독자들이 이렇데 많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은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의 그물입니다.
만일 불친절로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지나친 친절이 실수가 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나는 비록 실수가 될지언정 지나친 친절을 택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워지려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태오 11 :29) 겸손 만이 우리를 일치시키고, 일치만이 우릴를 평화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다가가 겸손과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웁시다.
어떤 상류층의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혁명입니다. 사랑의 혁명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참된 행복에 대해여 설명하시기 전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음식을 먹여 주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후에야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체하는 태도나 동정심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다정함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요, 비추고 싶은 빛이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요, 내가 나누고 싶은 기쁨이요, 내 주위에 퍼뜨리고 싶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됨 믿음을 원한다면 너그럽게 자신을 내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오늘날 국가들은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국경선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국경을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피난처, 안식처와 의복을 나누어주려 노력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선교회 수도자들은 사회사업가로서가 아니라 관상가로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으로 돕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자신은 나환자를 만지지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돈으로 친다면, 2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꺼이 할 수 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요. 내가 신뢰하는 것은 단 하나,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내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 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그 분의 다정한 손길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마태오 25: 40).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덕분에 고통이 위대한 사랑과 엄청난 관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젊은이든, 늙은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누구라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하느님께 봉헌합시다. 누군가 버림받는 걸 목격하게 되면 그 즉시 를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려 주십시오. 그 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버림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일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생명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이들의 비명이 하느님의 귀에까지 들렸다고 확신합니다.
전쟁은 인간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누가 전쟁을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환영하고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실패했다고 낙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성공했다고 큰소리 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영예를 돌려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돌보겠습니다. 우리의 고아원이 항상 어린이들로 가득 차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캘커타에서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유행중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자연 피임을 강조하시는데도 그 주위에는 점점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밤에도 일합니다. 몇 달 전에 우리는 캘커타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버려진 사람 대 여섯 명을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에 데려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는 작고 나이 든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몸은 이미 망가졌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직접 그 분을 돌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을 침대에 옮겨 놓을 준비를 다하자 그 여인은 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그 여인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감사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잠시 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나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을 것입니다. 계속 소리쳤을 거예요. "배고파 죽겠어요. 목말라 죽겠어요. 나는 죽어 가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인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고 자신만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너그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이롭습니다. 이 얘기는 자꾸자꾸 해도 전혀 싫증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눈길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언뜻 소용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언젠가 나는 쓰레기 더미에서 나이 든 여성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두 팔에 안고 왔습니다. 그녀는 계속 비통한 목소리로 외치기만 했습니다. "내 자식이 내게 이런 짓을 했어요.!" 그녀는 배고파 죽겠다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 다. 그녀는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내 아들이 이랬습니다.!" 그녀가 내 아들을 용서한다고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에야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눈길 아래 평화롭게 죽는 것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절정의 순간입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절망하거나 저주하면서 죽어간 이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발견한 남자를 캘커타의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 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를 침대에 눕히고 막 일어나려는데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천사처럼 죽어 가고 있습니다 . 저는 웃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 가난의 위대함입니다!
마더 데레사
Tresa Effect (데레사 효과)
데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봉사와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착해지고, 우리 몸도 영향을 받아 신체내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물질 lgA가 생긴다는 미국 하버드 의대의 보고서에서 인용된 용어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 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니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데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데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데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리지 외의 성녀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리지 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데레사는 1888년 열 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서의 길을 따랐다.
데레사는 라고 했다. 리지 외의 데레사는 자신을 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데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이라고 불렀다.
마더 데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데레사가 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데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데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마더 데레사는 어디에 뭐가 필요한 지를 알아 적절히 대응하고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하고, 회헌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지부를 파견하는 등 전형적이고도 정력적인 실업가로 보인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일상적으로 설명했다.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현대에서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개념, 즉 균형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거룩함이 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갈라진 지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고르게 결합된다는 의미이다.
마더 데레사의 영적인 길은 관상생활이 사랑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단순성 뒤에는 탁월한 신앙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여러 해 동안의 체험과 봉헌이 숨어 있다.
마더 데레사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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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자들의 어머니 데레사 수녀님의 출생에서 선종까지
1910년 8월 27일. 옛 유고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데레사가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꽃망울(곤히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데레사는 소녀 시절 신심회라는 본당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당시 예수회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살 때였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데레사 수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창 세상을 동경할 나이인 18세(1928년). 데레사 수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까지 배웅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가서 요양을 했다.
데레사 수녀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은 바로 이때다. 데레사 수녀는 지질링을 다녀와서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빈민굴로 자리를 옮기는 데는 수녀회 허락이 늦어져 2년이란 기간이 소요됐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평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 모은 신비로 운 힘을 발휘했다.
연약한 수녀의 몸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한 빈민구호사업.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빈민구호사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1950년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설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 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어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도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 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노벨 평화상, 케네디 인권상, 인도 최고의 바라트라트나 훈장...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1997년 9월5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메시지를 남겼다.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온정입니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2. 데레사수녀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1974년 인터뷰에서)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 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 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996년 연설)
"낙태는 '자궁내 살인'입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원하지 않으면 저에게 보내주십시오."(유엔 연설에서)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만일 달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그곳에도 갈 것입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없는 사람과 불구자, 맹인, 나환자,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됐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의사를 밝히며)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이 전쟁에서 단기간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하는 승자나 패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통과 참상, 당신들이 무기가 저지른 생명의 손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사랑의 등불 머더 데레사'에서)
"나는 전쟁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근과 주검은 봤습니다. 나는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3. 데레사수녀님 연보
1910년: 8월 27일 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께 건축업자의 1남2녀 중 막내로 출생.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캘커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인도 지질링 도착.
1929-1948년: 캘커타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학 교편을 잡다 교장에 임명, 로레토 수녀회와 관련있는 인도 수녀회인 성안나 수녀원의 수련장 맡음.
1946년: 결핵 때문에 요양차 기차를 타고 산간도시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음. 곧바로 빈민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 수녀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
1948년: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하얀 사리와 이마에는 푸른 줄무니가 있는 새 수도복을 입음. 3개월간 미국 의료수녀원이 잇는 파트나에서 간호학을 수학. 그해 성탄절에 캘커타로 돌아와서 빈민촌에 학교를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창립.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를 설립, 다음해 고아원을 세움.
1962년: 파드마 슈리상 수상, 상금으로 여러 곳에 새 안식처를 건립.
1963-1978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황청 인가 취득, 첫 해외시설을 베네수엘라 코코로트에 건립. 사랑의 선교회 남자 수도회가 앤드루수사에 의해 창설, 국제 데레사수녀협조자회와 자매결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음. 상금으로 나환자들의재활센터를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명명. 69년 중국 방문.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상금 19만2천달러는 나환우 구호소 건립 기금에 씀.
1981-1985년: 81년, 82년, 85년 3차례 한국 방문.
1982년: 포위된 베이루트의 한 병원에서 37명의 지진아를 구조하는동안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에게 총격을 멈추도록 설득.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 발작을 일으킴.
1985년: 미국 '자유의 메달' 수상. 뉴욕에 에이즈 말기 환자를 위한병원 건립.
1989년: 두 번째 심장 발작. 삼장박동 조절장치를 주입시킴.
1990년: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표명. 후계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에서 데레사 수녀 자신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재선됨.
1991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폐렴 발생. 심부전 발생.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입원.
1993년: 5월 로마에서 넘어져 늑골 3개가 부러짐. 8월 뉴델리에서 말라리아로 입원. 9월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음.
1996년: 미국 명예시민권 받음. 또다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짐. 8월 말라리아 발병, 좌심실 부전, 폐감염, 심장병 재발, 11월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입원.
1997년: 3월 13일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9월 5일 밤 9시30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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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1910 ~ 1997)
열성적인 카톨릭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교리 공부를 열심히 했던 테레사는 선교활동에 관심을 갖고 1928년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들어간다. 수녀회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인도의 캘커타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열망으로 '사랑의 선교회'을 열고 집을 마련한다. 나환자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재활 센터를 마련하기도 하고, 빈민굴에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고 있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기도 한다. 세계 곳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돌보는가 하면,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조지 대통령과 후세인 대통령을 찾아가 전쟁을 중지시키도록 호소하기도 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역이 있으면 그곳으로 달려가 부상자를 돌보기도 한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온 마더 테레사는 1949년 받은 노벨 평화상 외에도 수많은 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테레사의 정신과 활동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상으로도 평가할 수 없다. 1997년 죽기 전까지 심장병과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자선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
1910: 유럽 남동부에서 태어난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마더 네레사)는 캘커자의 빈민굴에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수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된다. 노벨 평화상과 종교의 발전을 위한 템플턴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그녀는 교황님과 대통령, 귀족들과 개인 친분을 쌓는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비천한 일을 하는데 결코 주저한 적이 없으며 자주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겸손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한 107군데 수도원은 국제적으로 4천 명의 수녀와 수사들이 있다.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묘사한 시편은 그녀에게 꼭 들어맞는 내용이다. "야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늙어서도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진기있고 싱싱하오리니 그들은 주께서 얼마나 바르심을 내 바위, 당신께는 하지 없으심을 널리 알리리이다.(시편 91편 14-16)
1910년 8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1900년에 결혼한 니콜 브약스히야와 드라나 베르나이의 막내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나다. 언니 아가는 1905년에 태어나고, 오빠 나자르는 1907년에 태어나다.
1910년 8월 27일: 예수 성심 성당에서 아네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부모는 열성저인 가톨길 신자로,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었다.
1919년: 니콜 브약스히야는 정치적인 회의에 참석한 뒤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력한 국수주의자의 신념을 갖고 있는 시의원이었다.
1915-24년: 아녜스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빠 언니와 함께 아녜스는공립학교에 다닌다. 건강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본당 교리공부반에 나가는 한편 본당 성가대원으로, 마리아의 딸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청녀단체에 속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인들에 대한 책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마더 테레사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가족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우 화합된 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위해 살았으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단결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외아들ㅇ니 나자르는 어머니와 누이들의 종교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성당 바로 옆집에서 살았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와 누이들은 집에서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성가대나 봉사난 선교에 관한 토론 문네에 늘 관여하곤 했습니다." 또한 나자르는 어머니의 관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그 많은 가난한 사람을 빈손으로 가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우리와 피를 나눈 친척도 아니고 또 비록 저렇게 가난하지만 우리 형제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라.'"
아녜스는 열두 살 때 선교사의 삶에 대한 부르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후 몇 년 동안 이 소명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잠을 잔다. 그 사이에 그녀는 마리아의 딸들회의 활동당원으로 일한다.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님의 권유로 그녀는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녜스의 오빠 나자르는 기병장교가 되기 위해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옮겨 간다.
1928년: 아녜스가 스코페의 수호성인 재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의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명백한 소명임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의 성모님께서 나를 중재하시어 나의 소명을 찾도록 도와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유고슬라비아 예수회의 지도와 도움으로 아녜스는 (아일랜드의 성모라고 볼리는) 메리워드가 16세기에 설립한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입회를 신청한다. 그녀는 인도에서 하는 그들의 선교사업에 큰 매력을 느낀다.
1928년 9월 26일:입회 허락을 받고 아녜스는 더블린으로 간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을 거쳐 로게토 성모수녀회 본원에 도착한다.
1928년 12월 1일: 두 달 동안 집중적인 영어공부를 한 후 아ㅖ스는 배로 더블린을 떠나 37일 후인 1929년 1월 6일에 인도에 도착한다. 아녜스는 캘커다에 1주일만 머물고 곧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다질링으로 가 수련기를 시작한다.
1931년 5월 24일: 수련기 2년을 보내고 아녜스는 세례명을 테레사로 바꾸고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유기서원을 한다. "저는 수도서원을 할 대 테레사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석은 아빌라의 대 테레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나는 리지외의 소화 테레사를 택했습니다."
1931-37년: 유기서원을 한 후에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살면서 로테토 성모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선생님으로 일한다.
1937년 5월 24일: 몇 번에 걸쳐 유기서원을 갱신하고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그리고 마힘내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다. 마더 테레사는 수녀회에서의 삶을 이럿게 총망라한다. "나는 로페토에서 제일 행복한 수녀였습니다. 가르치는 에 나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으니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수행하는 진정한 사도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1946 9월 10일: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가난한 이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시다. 마더 테레사는 그날을 '영감의 날'이라고 부른다. "내가 대피정에 참석하려고 캘커다에서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선명하게 나의 소명 안에 또 다른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 메시지는 명백했습니다. 나는 우리 수오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가야 할 목적지는 알았지만 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1948년:로레토 성모수녀회를 떠나는 석은 테레사 수녀에게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그녀의 수도회로 보래주는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도 수녀로서 살도록 허락이 떨어진다.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복을 벗고 인다아에서 가장 가난한 여자들이 입는 흰 사리로 갈아입고 수도회를 떠난다. 사리에는 그녀가 동정 마리아를 닮고 캘커타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과장을 이수한 후 곧 돌아와 캘터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한는 열망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해 그녀는 인도의 시민권을 신청하는데, 곧바로 평생 인도 시민권을 받는다.
1949년 3월 19일: 첫번째 지원자가 마더 테레사와 합류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르치던 제자 슈바시니 다스가 어느날 예기치 않게 그녀를 방문해 함께할 것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번째 수녀가 된다.
1950년 7월 10일: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상당수의 젊은 여성들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1949년 이후 나는 젊은 여성들이 한 명씩 도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옛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싶어했고, 매우 신속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1950년 10월 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서는 사랑의 선교회를 승인한다. 10명의 수녀가 2년간의 수련기를 시작한다.
1952년: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수도회에 회원이 30여 명이 된다. 그 중에 12명은 종신서원자이고 12명은 수련자, 나머지는 청원자였다. 아직도 수녀들은 자기들의 수도원이 없었다. 그들은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에서 '손님'으로 지낸다. 구녀들은 빈민가에 버림받은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수도자 양성과 공부에 열중한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중심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 칼리하트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얻는다.
그 집은 8월 22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문을 여는데 열자마자 정원까지 꽉 들어찬다.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퇴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계속된다. 항상 새로운 지원자가 뒤를 이어온다. 그 집의 이름은 힌두어로 니르말 리다이인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이 힌두인이기 때문이었다.
1953년: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창립된다. 끊임없는 기도 덕택에 하늘의 선물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수도원을 위해 캘커타 54번가에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할 수있는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본원은 사랑의 선교회 총사령부가 된다. 수녀들은 버림받은 비민굴의 고아들을 위해 같은 거리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가 후에 그 집을 사게 된다. 고아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의 집에서 죽은 부모들의 어린이들이다. 수녀들은 자신들이 돌볼 나환우들의 집을 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우선 나환우들을 위한 '이동 병실'부터 시작한다. 후에 수녀들은 캘커타 외곽지대에 티타가르와 산티나가르라 불리는 나환우들이 자랍할 수있는 재활 센터를 연다.
1962년: 마더 테레사는 인도 정보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상을 받게 되며, 동남 아시아의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아시아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아직 서구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65년 2월 1일: 사라의 선교회가 더한층 인저을 받는다. 이제 15년이 된 이 수도회는 놀랄 만큼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3백 명의 수녀와 여러 개의 틈이 생긴다. 유럽 여러 나라 수녀들이 포함된다. 그때까지 사랑의 선교회 수녀회는 지역 주교의 관할하에 인도에만 위치하게 된다. 몇몇 주교의 후원으로,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칭찬교령을 내리낟. 이 교령은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 대주교 초청과 아울러 사랑의 선교회 선교 사업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1965-71년:존세계에 새로운 분원이 문을 열게 된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분원이 마더 테레사의 첫버째 해외 분원이 된다. 그 다음해 지역 바톨릭 주교들의 초청으로 더 많은 분원이 아프리카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애들레이드, 유럽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문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 로마 분원이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의 주교 자격으로 일을 찬미하고 그녀의 후원자가 되며, 선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바타칸 시민권을 수여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1년에 50여 개의 분원를 갖게 된다.
1969년 3월 3일:교황 바오로 6세가 협조자의 회칙을 인정하여 그들도 사랑의 선교회에 공식적으로 병합된다.
1969년 3월 26일: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마더 테레사의 협조자들은 국제적으로 일반 평신도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들이 영성의 실체이며 사랑의 선교회 일을 더 넓혀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 그 수는 매년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 파악조차 힘들 정도이다.사랑의 선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래 협조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1970년:마더 테레사는 국제적인 중요한 상을 받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펜과 전파를 통해 마더 테레사를 서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상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종교의 진보상인 템플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에서는 요한 바오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2년 7월 12일: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가 알바니아에서 영면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칠리아에 있는 아들과 마더 테레사를 보고 싶어했지만, 알바니아 정부에서 그녀의 출국 허가를 거절한다.
1974년:마더 테레사의 언니 아가 브약스히야가 오빠의 여동새을 보지 못한 채 알바니아에서 죽다.
1979년 10월 17일: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의 단순성이나 겸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 10일: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삶을 모두 헌신한 가난한 사람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 올리프 5세로부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980-85년: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 곳에 새로운 분원을 열고, 많은 새로운 성소자의 축복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레바논, 서독,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브라질 ,페루,케냐,아이티, 스페인,에티오피아, 벨기에, 뉴기니아,아르헨티나 등 14군데에 분원을 연다.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뒤로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롤 뻗어 나간다. 1981년 한 새만도 8군데난 새로운 분원을 열고, 82년에는 12군데, 83년에는 14군데로 늘어난다. 사강의 선교회는 축복 속에 지원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시기에 참으로 예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89년:사라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에게는 닫혀 있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의 선교회는 에테오피아와 남예맨에 분원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또 그들은 나카라과와 쿠바와 러시아에서도 분원 허가를 받았느데, 이들 국가는 정책에 의해 무신론주의가 활발한 나라다. 소련의 경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결실의 하나로 마더 테레사가 모스크바에 분원 허가를 받는다.
1986년 2월:요한 바오로 2세가 캘커타를 방문한다. 마더 테레사를 방문한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이룬 여러 가지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1988년 5월 21일:사랑의 선교회는 로마의 바타칸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를 연다. 마리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의 선물'이라고 이름지어진 보호소에는 어른을 위한 72개의 침상과 2개의 식당이 있는데 한 식당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한 식당은 잠깐 들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요양소에는 휴게실과 진료실이 각각 하나씩 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알현실 쪽으로 난 정원이 있다.
1988-89년:마더 테레사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입원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과로해 입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황님조차도 건가에 좀더 유의할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주치의들은 그녀에게 전기 자극으로 심장 박동을 지속시키는 페이스메이커를 장치한 후 6개월 동안 안정을 취하도록 권한다.
1990년 4월 16일:건강을 이유로 마더 테레사는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책임에서 자유로원지자 그녀는 여러 수녀원을 방분하며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90년 9월:마더 테레사는 80고령인데다가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정년퇴직에 기각되어 다시 사랑의 선교회 총장직에 재선출된다.
1991년 1월:마더 테레사는 걸프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두 정상에게 호소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죄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정열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테레사의 요처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두 팀의 수녀들이 전쟁으로 약탈당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바그다드로 간다.
1991-93년:마더 테레사의 건강이 또다시 약화되어 처음엔 멕시코의 티후주아나에서, 다음엔 인도 델리에서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1993년 10월에 베이징의 초청에 응한다.
1993년 8월 30일:건강이 약화되자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만을 협조자로 부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 외에 사랑의 선교회에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해체된다.
1994년 2월 3일:미국 워싱턴 DC의 조찬 기도회에서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옆에서 마더 테레사는 수천 명의 관중이 넋을 잃고 듣고 있는 메시지에서 생명의 중시와 평화를 촉구한다. 후에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에게 '그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의탁의 삶'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1996년 4월: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 침대에서 떨어져 골절상으로 병원에 잠깐 입원한다.
1996년 8월:마더 테레사는 캘커타에 있는 병원에 말라리아로 입원한다. 장기간의 열벼이 심장 상태를 약화시킨데다 오랫동안 인공호흡용 마스크르 사용해 폐에까지 감염된다.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일터로 되돌아온다.
1996년 10월: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를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한다. 헌장에 서명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전세계 수백만 명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한다.
마더 데레사의 말씀
가,정,과,가,족,
부모들은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고 다정하게 보살피지요.
언젠가 열 두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인도인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이들 가운데 막내는 정말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흉측한 기형이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우리 집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그 어머니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수녀님, 제발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 온갖 사랑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만일 이 아이를 데려가시면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초연한 척하며 피상적인 차원에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 모범이신 예수님은 순종하는 일에서도 모범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의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 즉 나자렛의 성가족은 우리가 닮아야 할 훌륭한 모델입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부양하기 위하여 양식이나 의복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인 마리아 역시 아들과 남편을 보살피기 위하여 평범한 주부로서 자신의 일을 겸손하게 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자라면서 평범한 생활, 즉 자신과 남편과 함께 가정에 안주하게 될까 봐 염려했습니다. 그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했으며, 서로 다정하게 대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족은 우리의 훌륭한 모델입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활동을 하면서 가끔씩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우선,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빵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 본질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또 다른 형태의 가난도 존재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이들이나 부모님에게 부족한 것은 음식이나 좋은 옷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언제 시작되나요?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시작됩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함께 머뭅니다.
가끔 이기적인 부모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 사람들도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여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굶주림이 없는 세상을 꿈꿀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식구들이 느끼는 가난과 굶주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 굶주림과 가난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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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우리는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일하고 또 희생과 참화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성 빈센치오 아 바울로는 그의 수도회는 입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주인입니다. 우리가 존경심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
요.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만한 쓰레기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먹기 싫은 음식이나 상하려고 하는 음식을 그들에게 줍니다. 유효 기간이 지난 음식., 그래서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유행이 지난 옷, 이제는 입고 싶지 않는 옷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 주인으로 여기면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열등하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죠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한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몇 해 전, 캘커타에 설탕이 대단히 부족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네 살 정도 된 소년이 부모와 함께 나를 찾아왔습니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설탕 그릇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나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사흘 동안 먹지 않고 모아 둔 설탕이에요. 아이들이게 주세요."
그 어린 소년의 사랑은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소년은 서너 살밖에 안된 것 같았습니다.
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소년을 몰랐습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니까요. 그 부모 역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른들로부터 나의 처지에 대해 들은 다음 그런 결정을 내린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힌두교도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그런데 남은 것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서서히 주시는 사랑에 마음을 여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다정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분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은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보관해 두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서로 나누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되지요.
무언가 원하실 때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그런 후한 마음을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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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알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비난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비난한 그 나환자, 그 병자, 그 술 취한 사람이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사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비난한 그들, 병자, 알코올 중독자, 도둑이 바로 내 형제 자매입니다.
그들이 거리에 버려진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에 빠져들었다고 한 얘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겸손은 진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거든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가정이 조금만 더 사랑과 화합, 평화의 행복으로 충만했더라면 알코올 중독자와 약물 중독자들이 이렇데 많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은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의 그물입니다.
만일 불친절로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지나친 친절이 실수가 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나는 비록 실수가 될지언정 지나친 친절을 택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워지려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태오 11 :29)
겸손 만이 우리를 일치시키고, 일치만이 우릴를 평화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다가가 겸손과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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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어떤 상류층의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혁명입니다. 사랑의 혁명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참된 행복에 대해여 설명하시기 전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음식을 먹여 주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후에야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체하는 태도나 동정심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다정함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요,
비추고 싶은 빛이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요,
내가 나누고 싶은 기쁨이요,
내 주위에 퍼뜨리고 싶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됨 믿음을 원한다면 너그럽게 자신을 내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오늘날 국가들은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국경선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국경을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피난처, 안식처와 의복을 나누어주려 노력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선교회 수도자들은 사회사업가로서가 아니라 관상가로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으로 돕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자신은 나환자를 만지지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돈으로 친다면, 2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꺼이 할 수 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요.
내가 신뢰하는 것은 단 하나,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내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 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그 분의 다정한 손길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마태오 25: 40).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덕분에
고통이 위대한 사랑과 엄청난 관용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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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죽,음,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젊은이든, 늙은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누구라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하느님께 봉헌합시다.
누군가 버림받는 걸 목격하게 되면 그 즉시 를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려 주십시오. 그 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버림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일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생명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이들의 비명이 하느님의
귀에까지 들렸다고 확신합니다.
전쟁은 인간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누가 전쟁을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환영하고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실패했다고 낙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성공했다고 큰소리 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영예를 돌려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돌보겠습니다. 우리의 고아원이 항상 어린이들로 가득 차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캘커타에서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유행중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자연 피임을 강조하시는데도
그 주위에는 점점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밤에도 일합니다. 몇 달 전에 우리는 캘커타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버려진 사람 대 여섯 명을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에 데려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는 작고 나이 든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몸은 이미 망가졌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직접 그 분을 돌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을 침대에 옮겨 놓을 준비를 다하자 그 여인은 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그 여인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감사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잠시 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나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을 것입니다.
계속 소리쳤을 거예요. "배고파 죽겠어요. 목말라 죽겠어요. 나는 죽어 가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인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고 자신만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너그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이롭습니다.
이 얘기는 자꾸자꾸 해도 전혀 싫증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눈길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언뜻 소용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언젠가 나는 쓰레기 더미에서 나이 든 여성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두 팔에 안고 왔습니다.
그녀는 계속 비통한 목소리로 외치기만 했습니다.
"내 자식이 내게 이런 짓을 했어요.!"
그녀는 배고파 죽겠다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
다. 그녀는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내 아들이 이랬습니다.!"
그녀가 내 아들을 용서한다고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에야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눈길 아래 평화롭게 죽는 것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절정의 순간입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절망하거나 저주하면서 죽어간 이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발견한 남자를 캘커타의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
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를 침대에 눕히고 막 일어나려는데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천사처럼 죽어 가고 있습니다
. 저는 웃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 가난의 위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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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애착 때문에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한번 살펴보세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적게 가질수록 좋지요.
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6세가 주신 자동차를 봄베이에서 추첨을 통해 판매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돈으로 나환자를 위한 센터를 크게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요한 23세 상을 받을 때 생긴 상금으로는 나환자를 위한 재활 센터를 지어 '평화의 선물'이라고 이름지었지요.
노벨 평화상에서 생긴 상금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해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에 의존하거나 돈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진정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돈을 쓰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정말 엄청난 부자이지요.
돈을 주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됩니다.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우리가 손수 한 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 풍요로운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표현 방식입니다.
돈을 벌어 아주 안락하고 호사롭게 살 수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