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으로 모두가 들떠있던 2002년 명성황후의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보고서'를 일본서 입수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되어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월드컵에 들떠있었고 이 기사는 자연히 묻히고 말았죠.. 올해는 조선의 마지막국모인 명성황후께서 44살의 젊은나이로 일본낭인들에게 시해당한지 111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즉 일본의 조선침략에 방해가되는 인물인 왕비(명성황후)를 시해할 작전을 짭니다 이 작전의 이름은 '여우사냥'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왕세자이척의 증언에의하면 왕비는 일본인 흉한들에게 내동댕이치고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한다 주목해 볼만한것은 왕세자의말을 뒷받침해주는 한 영국인의 보고서이다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에의하면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라고전한다
왕세자와 증언과 영국영사관의보고서가 일치하는것이 눈여겨볼만하다 참으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그후 일본흉한들에게 불태워지며 일국의 국모는 그렇게 한많은 생을 마감한것이다
(이 외에도 왕비와 나이대가 비슷한 궁녀들의 옷을벗겨 유방을 잘라내고 정말 흉학한짓 많이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를 묻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일본은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을 하며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지적입니다.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끝내 버립니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겁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에탄 뼈조각과 숯덩어리 뿐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명성황후는 죽은뒤 2년이지나서야 명성이라는 칭호를받고 장례를 치룰수있었다.
명성황후의모습은 남아있는자료를 통해 추론해볼수있지만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비듬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고종은 이런 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일을 의논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고종이 왕비를 얼마나 사랑했나면... '충주 사람 성강호란 자는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 없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작고한 명성황후가 어떻 게 지내고 있는지 보기를 명했다. 삭망 차례를 지내고 있는데 성이 갑자 기 당황하며 단 아래 엎드리기에 임금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황후께서 지금 다락을 오르시고 계신다 하자 황제는 계단 난간을 붙들고 통곡 을 했다.
통곡이 심하시면 신령은 두 번 다시 오기를 꺼려한다 하자 억지로 눈 물을 삼키곤 했다. 그 후로 제사가 있을 때마다 성을 불러서 입회시키는 데 더러는 하강하고 하강하지 않기도 했다 한다.
이 귀신 본다는 사기꾼은 황제의 여린 마음을 악용하여 1년 안에 협판-곧 차관 벼슬을 얻었고 그의 문전에는 벼슬 부스러기 얻으려는 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선 안됩니다 다만 잠시묻어둘뿐이지요...
조수미 - 나가거든
월드컵으로 모두가 들떠있던 2002년 명성황후의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보고서'를 일본서 입수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되어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월드컵에 들떠있었고 이 기사는 자연히 묻히고 말았죠..
올해는 조선의 마지막국모인 명성황후께서 44살의 젊은나이로
일본낭인들에게 시해당한지 111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즉 일본의
조선침략에 방해가되는 인물인 왕비(명성황후)를 시해할 작전을 짭니다
이 작전의 이름은 '여우사냥'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왕세자이척의 증언에의하면 왕비는 일본인 흉한들에게 내동댕이치고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한다 주목해 볼만한것은 왕세자의말을 뒷받침해주는 한 영국인의 보고서이다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에의하면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라고전한다
왕세자와 증언과 영국영사관의보고서가 일치하는것이 눈여겨볼만하다 참으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그후 일본흉한들에게 불태워지며 일국의 국모는 그렇게 한많은 생을 마감한것이다
(이 외에도 왕비와 나이대가 비슷한 궁녀들의 옷을벗겨 유방을 잘라내고 정말 흉학한짓 많이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를 묻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일본은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을 하며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지적입니다.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끝내 버립니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겁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에탄 뼈조각과 숯덩어리 뿐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명성황후는 죽은뒤 2년이지나서야 명성이라는 칭호를받고 장례를 치룰수있었다.
명성황후의모습은 남아있는자료를 통해 추론해볼수있지만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비듬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고종은 이런 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일을 의논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고종이 왕비를 얼마나 사랑했나면... '충주 사람 성강호란 자는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 없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작고한 명성황후가 어떻 게 지내고 있는지 보기를 명했다.
삭망 차례를 지내고 있는데 성이 갑자 기 당황하며 단 아래 엎드리기에 임금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황후께서 지금 다락을 오르시고 계신다 하자 황제는 계단 난간을 붙들고 통곡 을 했다.
통곡이 심하시면 신령은 두 번 다시 오기를 꺼려한다 하자 억지로 눈 물을 삼키곤 했다.
그 후로 제사가 있을 때마다 성을 불러서 입회시키는 데 더러는 하강하고 하강하지 않기도 했다 한다.
이 귀신 본다는 사기꾼은 황제의 여린 마음을 악용하여 1년 안에 협판-곧 차관 벼슬을 얻었고 그의 문전에는 벼슬 부스러기 얻으려는 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선 안됩니다 다만 잠시묻어둘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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