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환, 아슬아슬해요?

민정규200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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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집에 오는 길.

내게 집은…

신발 벗는 곳, 가스 빼는 곳, 옷 갈아입는 곳,

샤워하는 곳, 지구 표면 위에 허리 펴는 곳.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

내 남동생에게 집은…

들것, 은신처, 도피처, 동굴, 사회범죄 연구소,

몸 만드는 곳, 인터넷 되는 곳.


이어폰을 한쪽 귀에 끼우고, 굳게 다문 입술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

아쉽다, 집에 들어가기.

남동생에게 ‘뭐해?’ 문자를 보내보니

‘생수 사와’ 하고 답장이 온다.

이어서 한 통이 더 온다. ‘맛있는 걸로’

그래, 피는 물보다 진하지.


편의점에 들어가 냉장고를 훑어보았다.

문득 냉장고에 비친 내 모습.

묵직한 몸, 지친 어깨, 미소가 사라진 얼굴, 초점 없는 눈.

이게 진짜 나인지 알 수가 없다.

삼다수, 아이시스, 에비앙, 동원샘물,

그리고 해양심층수 블루마린.

나의 선택은 1500원짜리 블루마린.

비쌀수록 잘 팔리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 때문이 아니다.

이것 때문이다.

 

“블루마린을 사면 박태환 브로마이드를 드립니다”


그래, 매일 역기 들며 몸 만드는 남동생 주면 좋아하겠네.

계산서에 블루마린 한 병을 올려놓고, 지갑을 뒤적이는 동안

새로운 알바 여학생이 단골손님인 나를 파악하려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같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줄 힘이 없다.

말없이 2천 원을 내고 말없이 5백 원을 받았다. 1초. 2초. 3초…

나도 가만히 서있고, 그녀도 가만히 서 있은 지 7초 경과.

난 큼직한 입술을 힘없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박태환 브로마이드 주세요.”


갑자기 이곳 분위기, 전복됐다.

내 눈 먼저 보고 진심을 확인하던 알바생 수다 시작.

“어머, 박태환 브로마이드요? 킥킥킥, 점장님~

이 손님 박태환 브로마이드 달라고 하시는데요? 푸히히.

아~ 이거 안 되는데, 이거 드려도 되나 몰라.”

어, 왜 그러지?

순간 브로마이드 수량이 얼마 안 남았나 싶었다.

계산대 밑에서 브로마이드 한 개를 조심스레 꺼내든 그녀에게

나는 차분히 물어보았다.

 

“왜요, 아슬아슬해요?”

앗, 이 말을 뱉은 순간 사태는 절정이 되었다.

“꺅, 어머, 하하하 그럼요, 아슬아슬하죠. 얼마나 아슬아슬한데요.”

브로마이드를 펼쳐보이며 그녀는 난리가 났다.

“보세요. 옷도 거의 안 입고 수영복만 아슬아슬하게

입고 있는데, 이런 거 방에 붙여놓으시면 안되는데,

이거 오늘밤에 잠이 오시겠어요? 손님, 하하하”

 

그저 난 묵묵부답과 미소로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오직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읊조리며.


근데 너무 웃네. 조그맣게 “동생 주려고”라고 해보았다.

망했다. 완전 궁색했다. 참으로 변명 같은 진실이다.

온갖 놀림을 받고 손에 꼭 쥔 박태환 브로마이드.

막상 받고 나니 왠지 욕심이 난다. 두근두근.

 

“동생아, 생수 사왔어. 그럼 나 이만 피곤해서 잘게.”

동생은 모른다. 내 방에 왜 박태환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