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둡고 추운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주머니에서 MP3플레이어를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랜덤으로 플레이된 노래는 ‘뮤즈Muse’의 언인텐디드(Unintended)였다. “……가능한 한 빨리 너에게 갈게. 그런데 지금은 너 이전의 내 인생, 그 부서진 조각들을 바로잡아야 돼……. 너는 내 인생의 예정에 없던 사람. 내가 영원히 사랑하게 될 사람일지도……” 나는 매튜 벨라미의 음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도 그런 예기치 않은 사랑(my unintended)이 있을까? 이런 나를 구원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더는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나는 고시원으로 돌아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는 몇 번의 클릭을 거쳐 어느새 그리운 퀴즈방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조금 전까지 듣고 있던 록 그룹 ‘뮤즈’에 대한 문제를 냈다. “1. 뮤지션.” 다음 힌트를 준비하는 사이, ‘벽 속의 요정’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2번과 3번 힌트를 잇따라 냈다. 막 4번 힌트를 나가려던 찰나 조금 전에 들어온 ‘벽속의 요정’이 문제를 맞혔다. (여자) “뮤즈……아니에요?” 사람들은 답을 맞힌 그녀를 축하했고 출제권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모두가 그녀의 문제를 기다리는 사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문제를 출제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귓속말을 보내온 것이었다. “귓속말: (여자) 지금 그거 들으세요?” 그녀는 한편으론 퀴즈를 출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내게 은밀히 귓속말을 건네는, 고난도의 멀티태스킹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귓속말 아이콘을 클릭했다. “귓속말: (남자) 아, 네. 듣고 있어요. 뮤즈, 좋아하세요?” “귓속말: (여자) 죽음이죠.” “귓속말: (남자) 무슨 곡 좋아해요?” “귓속말: (여자) 언인텐디드요. 실은 지금 듣고 있어요.” 바로 그 시각, 젊은이들이 잠들기엔 조금 이른 그 시각에, 인기 있는 이 뮤지션의 음악을 함께 듣고 있을 사람이 아마 전 세계에 수십만 명은 될 것이다. 서울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벽속의 요정’과 내가,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세계의 어느 구석, 작은 퀴즈방에서 귓속말을 주고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똑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 이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혹은 부자연스런 일이었을까? 어쨌든 그 순간 같은 음악을 동시에 듣고 있다는 것, 하나의 노래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불러일으킨 느낌은 대단했다. 감정의 강풍주의보랄까. 내 감정은 기압골 사이를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역시 인간은 외롭지 않구나.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구나. MP3플레이어와 이어폰, 달팽이관과 대뇌 그리고 뉴런, 손가락의 관절과 키보드와 마더보드의 기판들과 인텔의 CPU, 랜카드와 랜선, 지하의 광케이블을 따라가면 그곳에 나와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누군가가 역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다. - 김영하 '퀴즈쇼'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구나
나는 어둡고 추운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주머니에서 MP3플레이어를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랜덤으로 플레이된
노래는 ‘뮤즈Muse’의 언인텐디드(Unintended)였다.
“……가능한 한 빨리 너에게 갈게.
그런데 지금은 너 이전의 내 인생,
그 부서진 조각들을 바로잡아야 돼…….
너는 내 인생의 예정에 없던 사람.
내가 영원히 사랑하게 될 사람일지도……”
나는 매튜 벨라미의 음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도 그런 예기치 않은 사랑(my unintended)이 있을까?
이런 나를 구원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더는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나는 고시원으로 돌아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는 몇 번의 클릭을 거쳐 어느새
그리운 퀴즈방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조금 전까지 듣고 있던
록 그룹 ‘뮤즈’에 대한 문제를 냈다.
“1. 뮤지션.”
다음 힌트를 준비하는 사이, ‘벽 속의 요정’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2번과 3번 힌트를 잇따라 냈다.
막 4번 힌트를 나가려던 찰나
조금 전에 들어온 ‘벽속의 요정’이 문제를 맞혔다.
(여자) “뮤즈……아니에요?”
사람들은 답을 맞힌 그녀를 축하했고 출제권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모두가 그녀의 문제를 기다리는 사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문제를 출제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귓속말을 보내온 것이었다.
“귓속말: (여자) 지금 그거 들으세요?”
그녀는 한편으론 퀴즈를 출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내게 은밀히 귓속말을 건네는,
고난도의 멀티태스킹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귓속말 아이콘을 클릭했다.
“귓속말: (남자) 아, 네. 듣고 있어요. 뮤즈, 좋아하세요?”
“귓속말: (여자) 죽음이죠.”
“귓속말: (남자) 무슨 곡 좋아해요?”
“귓속말: (여자) 언인텐디드요. 실은 지금 듣고 있어요.”
바로 그 시각, 젊은이들이 잠들기엔 조금 이른 그 시각에,
인기 있는 이 뮤지션의 음악을 함께 듣고 있을 사람이
아마 전 세계에 수십만 명은 될 것이다.
서울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벽속의 요정’과 내가,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세계의 어느 구석,
작은 퀴즈방에서 귓속말을 주고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똑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
이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혹은 부자연스런 일이었을까?
어쨌든 그 순간 같은 음악을 동시에 듣고 있다는 것,
하나의 노래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불러일으킨 느낌은
대단했다.
감정의 강풍주의보랄까.
내 감정은 기압골 사이를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역시 인간은 외롭지 않구나.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구나.
MP3플레이어와 이어폰, 달팽이관과 대뇌 그리고 뉴런,
손가락의 관절과 키보드와 마더보드의 기판들과 인텔의 CPU,
랜카드와 랜선, 지하의 광케이블을 따라가면
그곳에 나와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누군가가
역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다.
- 김영하 '퀴즈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