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A Moment To Remember

민정규2008.09.05
조회118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

입술에 권세가 있다던데

고등학교 때 붕어라고 불린 탓일까.

그 어류의 기억력은 3초라고 들었다.

근묵자흑이라 하던데

평소 닭을 많이 복용한 탓일까.

그 조류의 아이큐는 7이라고 한다.

그저 덜렁거리는 성격이려니 하면서도

은근히 침울해지는 기분을 막을 길이 없다.


를 누른 뒤 바로 '레드썬'이 되어버리는 출력 원고들,

몇 시간 뒤 "이거 민대리 거예요?" 하며 전해주시는 부장님.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늘 그런 건 아니다.

고도의 집중을 하면 문제없다.

를 누른 뒤 냉큼 복사기 앞으로 뛰어가서

따끈따끈한 출력물을 한 손에 모아서 든다. 거봐, 성공!

일어난 김에 정수기 앞에서 물을 한잔 가득 받은 뒤

캐비넷 위에 물컵과 출력 원고들을 놓고 화장실까지 다녀온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에 돌아와 다시 열심히 일에 몰입한다.

한참 뒤 "이거 민대리 거예요?" 하며 물컵과 함께 전해주시는 부장님.

어쩌면 난 사람이 아닐 수도.


커피자판기에 식은 채로 매달려 있는 커피,

토스터기 안에서 타버린 우유식빵,

마지막 한 장만 더 보면 마무리되는 상태로 파묻힌 서류,

한날 한시에 홍길동이 되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이중 약속,

작년에 급히 빌린 40대 자매님의 쪼리 슬리퍼,

한 짝씩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중한 귀고리,

칫솔 하나만 챙겨 간 2박3일용 수련회 가방,

커피숍 쇼파에 잠깐 올려놓고 셀카 찍은 뒤 바로 깔고 앉은 새 안경,

파워포인트 시트를 한 다음 를 깜빡한 채

저장된 PPT자료, 5층 청년부실에서 1층 앞마당까지 내려온 뒤

문득 손의 허전함을 느낀 숄더백,

소낙비에 젖을지언정 안 들고 다니는 우산,


휴대폰은......우선 심호흡부터 해보자.

오이도 조개구이집 앞치마 속에,

(맞은편에 계신 분 덕에 오이도 돌아갈 일은 방지함)

가까운 음식점 테이블 티슈 박스 안에,

(꽂아놓고 기억 더 잘하려고 한 건데)

우리 동네 홈플러스 계산대 위에,

(밤 12시에 아빠에게 전화해준 고마운 아주머니)

볏집삼겹살 집 쓰레기통 속에,(이건 뭐 말하기도 참...)

바지 뒷주머니에서 변기 속으로,(오래전 일인데 잊자)

회사 건물 2층에 있는 스파게티집 창틀에서,(이 집은 신용카드를

찾으러 간 적도 있음, 이 집 매니저님은 이제 안 놀라심)

돌돌 말린 내 방 이불 속에,(전화 걸어봐도 들리지도 앉음),

심지어 이미 늦은 출근길에 휴대폰 놓고 온 걸 깨닫고

집으로 되돌아가 엄마 전화로 걸어보면 가방 한쪽 구석빼기에서

신나게 울리는 '이제 서른' 벨소리.

"난 괜찮아, 항상 새로운 하루~ 난 괜찮아!"

(으아, 그만 그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사방팔방 물건 놓고 오고, 잘 잃어버리고, 잘 까먹고,

잘 부딪히고, 걸려 넘어지고, 흰 티셔츠엔 매번 얼룩을 묻히고,

속치마는 뜯어지고, 모르는 사람한테 착각하고 포옹하며 인사하고.


아 혼란스럽다. 나도 잘살고 싶은데.

이 순간 골짜기에서 날 구원해준 방법을 알려준 한 천사.

자신도 건망증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며

아침마다 성경을 매일 하나씩 암송하면서 오라고

좋은 처방을 알려준다.


갑자기 머리가 쨍~ 하고 맑아진 느낌. 그래 바로, 이거야.

진심으로 눈물이 났다. 정말 고민이 많았구나. 정규.


두 달째 기침이 낫질 않아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비인후과로 달려갔다. 처방전을 손에 쥐고 5층에서 지하 1층 약국으로 입 내밀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쌀국수 먹자는 우리 팀의 문자가 왔다. OK 답신을 하며 쌀국수집으로 뛰어갔다. 3명 자리를 맡고 기분좋게 쌀국수를 주문한 뒤 문득 손에 쥔 처방전을 내려다보고, 엄마야!


다시 약국으로 뛰어가서 약을 받아온 뒤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게 차돌박이 쌀국수를 먹었다. 숙주를 너무 많이 넣어서 국물이 넘치려고 하지만, 올 때마다 늘 만족스러운 쌀국수집.


두 명의 돈을 받아 내 카드로 계산하고 나온 뒤 둘은 은행으로, 난 유유히 홍대 앞 놀이터로 걸어갔다. 걷다가 문득 겨드랑이 쪽에서 이물감을 느낀다. 이게 왜 여기....


쌀국수집 계산서보드판이 당당하게 내 겨드랑이에 세게 끼워져 있다. 낯선 풍경이다. 결코 이 팔을 펴고 싶지 않다. 노래방에서 문제집 대신 노래방책 들고 온 사람도 이런 기분이겠지.


9월부터는 정말 사람이 되고 싶다.

내일부터 쑥과 마늘 대신 성경암송을 꼭 복용할 테다.

 

ps. 이 계산서 보드판 소식이 전파된 후 곳곳에서 위로의 문자가 날아왔다. "누나, 난 저번에 메뉴판 들고 왔어" "언니, 이건 비밀인데, 나 화장실 열쇠 들고온 적 있어" 아,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더니. 이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