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27화> 현장급습

바다의기억2006.08.11
조회7,438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땀띠가 전신의 관절을 뒤덮고 있습니다.

 

샤워 꼬박꼬박 하고 있는데 왜 이럴까요..

 

역시 에어컨을 질러야 하나?

 

======================= 더울 땐 은행에서 피서~ ============================

 

 

그런 일이 있고부터


정체되었던 안무 연습은 다시 활기를 찾았지만


내 마음 속의 의혹은 커져만 갔다.


처음 춤을 배울 때 죽어라 독학을 시도해봤던 만큼


그 한계를 명백히 알고 있는 나였다.


물론, 그 한계에도 개인차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처럼 하루 사이에 득도하듯 늘 수는 없다.



역시 안군인가? 안군이 수작을 부린 건가?



일단 생각할 수 있는 후보는


한나, 댄서윤, 안군 등... 몇 명이 있었지만


그 중 안군만큼 유력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 증거도 없는 지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내가 택한 건 옵저버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


한나 = 여보세요?


기억 - ... 나야.


한나 = 어머나~ 어쩐 일이세요? 오빠가 먼저 전화를 하고?


기억 -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한나 - 네~ 말씀하세요.


기억

- 당분간 주말이나 공휴일에


공주가 집 비우면 나한테 좀 알려줄래?


집 앞에 잠깐씩 나갈 때는 빼고... 좀 오래 나갈 때.



한나 - 어머~ 그럼 집엔 저밖에 없는데~. 찾아오시려고요?


기억 - 아니, 좀 짚이는 데가 있어서...


한나 - 흐음..... 맨입으로요?


기억 - 뭘 바라는데?


한나 - 다음주말에 여의도에서 불꽃놀이 하는 데 같이 가요.


기억 - ....... 알았어. 연락이나 바로 잘 해줘.



일단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니


느는 게 의심이고, 눈에 밟히는 것마다 꼬투리였다.


연습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며


안군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데 혼신을 다했다.


한나는 이런 나에게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되어 주었고


나 또한 그녀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성의를 보였다.



물론, 헛다리짚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일이 헛다리짚기였다.


연습실에 늘 갑작스러운 방문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가방을 놔두고


그녀가 집을 비웠다는 연락이 올 때 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들이닥치길 십수 번이었지만


일주일 째 성과는 0.


그래도 내 의심은 식을 줄 몰랐다.



혹시 다른 장소를 이용하는 건 아닐까?


안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 대체 무슨 수로 이 의혹을 푼단 말인가....



그리고 다가온 목요일.


대부분의 연습이 정상가도를 달리고 있는데다


간만에 연습이 없는 날이라


사람들은 다들 일찍 집으로 돌아갔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걸까.


이젠 그만둘 때도 됐는데...


오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것 같다.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그런 생각들로 날카로워진 신경을 애써 가라앉히며


갑갑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한나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나 = 저예요, 언니 지금 밖으로 나갔어요.


기억 - 그래? 알았... 아니, 아니다. 이제 그만 할래.


한나 = 예? 오늘은 무도화도 챙겨서 나갔는데요?


기억 - .....!!



제대로 걸렸다.


안군, 만약 연습실에 있기만 해봐라.


오늘 임종체험 한 번 제대로 시켜줄 테니...



단걸음에 달려간 연습실.


과연 문 밖으론 희미한 음악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기억 - .....



문고리를 꽉 부여잡고 망설이기를 1분.


난 과연 민아와 안군이 안에 있길 바라는 걸까? 없길 바라는 걸까?


..... 어느 쪽이건 확인은 해야만 한다.



=끼이이이이이.....=


포커의 마지막 카드를 확인하듯


천천히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을 때


난 내 마음이 어느 쪽이었는지 확신했다.



다행이다....


난...... 이런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민아 - ....!!


안군 - 어.....



아마 탱고 연습을 하던 중이었는지


맞잡은 손을 나를 향해 뻗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두 사람.



난 이 광경을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힐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머릿속은 차분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민아 - 기..... 기억아..... 어, 어쩐 일이야?


기억 - 어제 가방을 좀 놓고 가서....



일단 구석에 놔뒀던 가방을 가지고 나온 난


쭈뼛쭈뼛 할 말을 찾고 있는 민아에게 다가섰다.


왜 그랬어, 민아야.... 왜.....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난


일단 민아와 함께 이 자리를 나서려 했다.



안군 - 기억아,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빠악!! 쿠당탕탕...=


민아 - 꺅! 기억아!!



그 때 안군이 쓸데없이 입을 열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기억 - 어때요, 아프죠? 내가 말했잖아요. 100% 아프다고.


안군 - 아니, 잠깐, 내 말 좀...


기억 - 아, 걱정 마세요. 잘 듣고 있으니까.


=퍼어억!=


안군 - 어억?



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안군의 배에


있는 힘껏 발길질을 날렸고


연습실 바닥을 두 바퀴 구른 그는


잠시 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가 일어서길 기다리는 것 보다


내가 일으켜서 때리는 게 빠를 거란 생각이 든 난


성큼성큼 쓰러진 그를 향해 걸어갔지만


그런 내 몸을 민아가 붙잡았다.



민아 - 기억아!! 하지 마!! 내가... 내가 도와달라고 한 거야!!


기억 - ...... 아, 그랬어?


민아 - 응, 내가 불러낸 거야.... 안군오빠는 잘못 없어.


기억 - 아아~ 그랬구나.... 그럼 거절을 했어야죠, 선배.



민아는 내 옷깃을 잡았다가


허리를 붙잡고, 결국 다리까지 잡고 매달렸지만


그녀가 무슨 수를 쓴다한들


내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군 - 콜록, 콜록.... 아니.... 일단 대화를....


기억 - 네, 말씀을 하시라니까요.



족쇄처럼 붙어있는 민아를 끌고


안군에게 다가간 난 다시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하지만 돌아간 건 그의 얼굴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기억 - 허허.... 이것 참....


안군 - 일단... 내 말 좀 들으라니까.


기억 - 이제야 뭔가 이야기가 되네요.


=빠아악! 퍼억!=



난  손등으로 그의 턱을 후려친 뒤


남은 발로 그의 복부를 꿰뚫을 듯 걷어 찼다.


또다시 저만치 밀려가 바닥을 구르는 안군.



무력하다.


한없이 무력한 인간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력한 인간이다...



기억 - 민아야, 놔.


민아 - ...싫어! 못 놔! 제발... 제발 그만해 기억아.


기억 - ..... 놔. 빨리.



내가 처음으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게


고작 이런 날이 될 줄이야.....


이 모든 게 안군의 잘못이다.



민아 - 그만....그만해.... 기억아... 제발....


기억 - 왜... 안군이었어?


민아 - 응?


기억 - 왜.... 내가 아니라 안군이었어?


민아 - ........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대답도 별로 필요치 않았다.


당장은 속이 후련했고, 후회되는 것도 없었다.



기억 - .... 그만 놔, 얌전히 갈 테니까.



여전히 격정적인 탱고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연습실을 떠나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길.


문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뚜르르르르....뚜르르르르....=


한나 = 여보세요?


기억 - ...... 나야.


한나 = 아, 오빠. 어떻게 됐어요?


기억 - 지금..... 시간 돼?


한나 = 네.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인데요?


기억 - 잠깐... 볼 수 있을까?



내가 그녀를 불러낸 곳은


일전에 연습하던 스윙 댄스부 연습실이었다.


태권도부를 비롯한 여러 동아리에서


함께 쓰는 장소다 보니 연습실 문은 늘 열려있었고


잠겨있는 곳은 각 부별로 설치한 탈의실 정도였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조심스레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나 -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정말로...



오디오 바로 옆에 기대앉아있는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며 다가서는 그녀.


하지만 내가 그녀를 부른 건


이런 대화를 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기억 - ..... Shall we dance, Mademoiselle?


한나 - 예?


=쿵! 쿵! 쿵! 빠밤~ 빠바바바밤 빠밤 빠바바밤...=



당황한 그녀가 걸음을 멈춘 사이


난 미리 넣어놨던 탱고 음악을 틀었다.


연습실 전체의 공기가


박자에 맞춰 팽창-수축하는 듯한 강렬한 베이스.


불꽃처럼 강렬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멜로디....


지금 듣고 싶은 건 이 리듬뿐이었다.



난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마음 가는 데로 춤을 추어댔다.


내 멋대로 당겼다가, 밀었다가, 턴을 돌고,


듣도 보도 못한 스텝을 밟아댔다.


그건 아마도... 내 머릿속에 들어있던 탱고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탱고는 이래야 한다, 이렇게 추는 게 탱고다.



한나 - 오... 오빠, 잠깐....


기억 - .......


한나 - ...... 아니, 계속 춰요.



놀랍게도, 그녀는 이런 내 마음에 부흥하듯


순식간에 호흡을 맞춰왔다.


그녀의 붉은색 가디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 주위를 바람처럼 회오리치다 꺼질 듯 사그라지고


일순간 코앞까지 치솟으며 나를 위협했다.


찰랑이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눈은


내게 다음 순간 할 일들을 가르쳐주었다.



퀵, 퀵, 슬로우~ 퀵, 퀵, 퀵, 퀵, 퀵앤퀵, 퀵, 퀵....



스텝이 어지럽게 꼬이기 시작했다.


나 다리를 그녀의 다리가 휘어 감고


그녀의 다리를 내 다리가 끼고 돌았다.


주위는 점점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매 순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난 결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탱고다, 이것이.......




기억 - 하아.... 하아..... 하아....


한나 - ..... 하악.... 하악....



춤이 끝난 건 30분 이상이 지난 뒤였다.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난


그녀와 나란히 연습실 중앙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등 쪽으로 빙글 굴러


내 가슴 위에 머리를 얹으며 물었다.



한나 - .... 좋았어요?


기억 - 아.... 최고였어.



이번엔 정말로 가슴이 후련해진 기분이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념들 모두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이런 게 바로 카타르시스일까?



한나 - 킥.... 방금 그 말, 은근히 야하게 들리지 않아요?


기억 - 뭐? 무슨 말?


한나 - =좋았어요?= =아~ 최고였어.= 이거 말이에요.


기억 - ..... 그런가?


한나 - 에이~ 뭐야. 재미없어.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있었던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격정적인 춤 뒤에 찾아온 나른함에


노곤한 기지개를 폈을 뿐.



난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일까...


방금 전에 민아 앞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그 분을 한나에게 풀고 있으니...


하지만 이젠.... 뭐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