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작됐다

김홍열2008.09.07
조회47
그렇게 시작됐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해줄까요?

우선 흰 도화지의 한 가운데를 눈대중으로 나눈 다음.

맨 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줄을 내려 그러요.

이 선은 뭘 의미하냐 하면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나누는 건데

우선 지금 당장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이 두 벽은 정확한 90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왼쪽 골목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가려면

90도, 몸을 회전해야 하는 'ㄱ자'벽인 거죠.

일단 왼쪽 벽에다가는 한 남자를 그려요.

벽 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오른쪽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살금살금 숨바꼭질 하듯 눈치를 보고 있는 옆 모습의 한 남자를요.

오른쪽 벽 역시, 마찬가지로 한 여자를 그려요.

여자 역시 벽 쪽에 붙어서 조심스레 누군가를 훔쳐보기라도 하듯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옆 모습 여자를요.

실제 거리는 몇 센티에 불과하지만 90도로 꺾인 벽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저 벽 뒤에 누군가를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죠.

그림은 그림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지해 있지만 1초 후,

만약 그 두 사람이 앞으로 조금만 움직인다면

코를 부딪치게 될 지도 몰라요.

그리고 다시 1초 후,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몸을 정반대로 되돌려 멀리 멀리 뛰어가버릴지도 몰라요.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의 주변을 맴돌아요.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된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짝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하지만 이 그림은 혼자서만 애태우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 때문에 애달파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치고 나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으면서 자신의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죠.

"사실, 난...오래 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이 말을 동시에, 둘이서, 상대방이 똑같은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두 사람 말이 골목 가득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거에요.

이제, 두 사람이 만났으니 서로를 훔쳐보기 위해

수도 없이 벽 모서리에 얼굴을 기댄 자리는 더 이상 닳지도 않겠죠.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그래요.

한 사람의 것만으론 가 닿을 수 없는 것.

그러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또 모자란 것.

그래서 약한 물살에도 떠내려가버리고 마는 것.

한 사람의 것만으론 이어붙일 수 없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자, 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를 했어요.

이 그림 제목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거에요.

근데 나는 과연 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끌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