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보다 어딘가에

박민진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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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버거운 청춘의 가능성.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청년 베르테르는 한 시골마을에서 우연히 본 법관의 딸 로테와 사랑에 빠진다. 아름답고 고운 그녀의 자체를 보고 홀딱 반한 베르테르는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로테는 떠난다. 잘난 청년 약혼자 로베르토와 결혼을 한 것이다. 신분의 차이인가? 얼굴이 못생겨서인가? 베르테르는 사랑을 잃은 슬픔에 절망한다. 베르테르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는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꽃다운 나이에 못난 녀석. 이 작품을 쓴 괴테는 희망 없는 사랑의 어리석음과 귀족사회에 대한 울분을 적절히 표현하며 위대한 작품을 완고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 작품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점은 젊음의 아름다운 숭고함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관적이고 충동적인 죽음으로 이어진 전개에도 젊은이들은 베르테르의 죽음에 열광했다. 이 작품을 따라서 자살하는 청년들이 수도 없었다니 그게 꽤나 멋져 보이긴 했나보다. 아름다운 청춘, 우울한 청춘. 청춘은 그래서 아름답다나?

 

 


 방황하는 청춘을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양이를 부탁해>라든지, 얼마 전 본 <내일의 나를 만드는 방법>같은 일본 영화에도, <키즈 리턴>과 같은 명작에도 시대가 주는 검열과 현실의 속박에 의해 자신을 찾지 못하고 유랑하는 젊은 친구들의 애틋한 고민이 녹아있다.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짜증나도 영화 속 젊음들은 장애물을 딛고 미래를 꿈꾼다. 쉽진 않지만 꿋꿋하게 견뎌낸다. 이유는 그들이 젊기 때문이다. 곧 꿈을 찾겠지... 그리고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겠지... 현실과의 타협에도 익숙해지겠지... 나이를 먹으며 젊음의 가능성을 모두 시험할 수 있겠지... 이런 막연한 기대와 안식이 이 시대의 청춘영화에는 꼭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것들이 참 아름다운 것인 듯 착각한다. 하지만 현실도 정말 그렇게 막연한 기대 속에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의구심은 허무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뀐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좋았던 때라고 추억하겠지만, 골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이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짓눌려 갈피를 못 잡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을까.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청년의 그 부분을 건드린다.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에는 현실을 그저 외면하고 저 멀리 떠나고픈 꿈꾸는 청춘들이 가득하다. 주인공 수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꿈은 리버풀에서 멋지게 피아노 연주를 하며 앨범작업을 하는 뮤지션이지만, 현실은 대학졸업 후 빈둥빈둥 노는 집안의 철부지일 뿐이다. 수연의 가족들은 맏딸인 그녀의 가출에도 아랑곳없이 외식을 가니, 수연은 더 오기가 나 피씨방 한자리의 라면에도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수연은 극중에서 동대문 옷 장사를 하는 그녀의 친구에게 이런 명언을 남긴다. “꿈 하나 지키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그래 알지. 너무도 힘든 일인 거. 그게 빈둥거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날카로운 현실의 마파람은 그녀의 옷깃을 움츠리게 할 뿐이다. 이리저리 떠돌아 매력적인 뮤지션 현의 꼬임에 대마도 해보고, 자신을 좋아하는 동철과 아주 우습게 성적인 순결을 없앤다. 젊음이란 그리도 아름답던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중독적인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녀의 귀를 울리지만, 현실의 시야는 한강둔치의 공허함처럼 2리터의 눈물을 양산할 뿐이다.

 

 

 


 독립영화에다 제작비가 1억원밖에 되지 않음에도 영화는 좋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두 청춘이 음악인을 꿈꾸기에 이 영화는 음악적 완성도가 상당하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음악과 이 영화에 깜짝 출연한 전설적인 밴드 ‘유 엔 미 블루스’출신의 영화음악감독 방준석이 바람둥이에 느끼한 뮤지션 ‘현’을 연기한 덕택에 그의 세련된 음악이 영화에 가득 배어 고독한 청춘들을 위로한다. 게다가 다양한 메이저 작품의 스텝들이 영화적 완성도를 끌어올려 가난한 독립영화를 든든히 지지하고 있다. 그 결과 <소녀X소녀>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이승영 감독은 자전적인 의미가 깃들여 있는 수준 있는 첫 장편 데뷔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영화의 막바지 수연과 동철의 마지막 뮤직 페스티벌이다. 상금 500만원으로 그녀는 수상과 함께 리버풀 목장에서 여유롭게 기타를 튕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시점이다. 젊음을 발산할까? 관객들은 기대한다. 그들의 노력과 꿈과 희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있는 영화의 마무리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포기한다. 꿈 앞에서 무너진다. 아름답던가? 젊은 베르테르의 자살처럼 극적이고 위대하던가. 현실은 눈물을 훔치고 나간 후미진 골목길의 습기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다. 카메라는 잔인하게 그 장면을 끝까지 따라다닌다. 우리의 모습이기에 처음엔 웃었고, 우리의 모습이기에 두 번째는 공감했다. 하지만 답답한 수연의 무기력에 우리는 수연과 동철을 결국 비웃는다. 현실과 타협에 익숙한 우리 자신을 포장해서 극장을 나선다. 구둣발소리, 웃음소리 재밌는 영화였다. 이 우스운 젊음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무책임한 말만을 남긴 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 어떤 청춘 영화보다 현실을 어둡게 표현한 이 작품은 진실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테가 표현했던 비극적 청춘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영화에서도 피해보려 했던 가능성의 소멸. 영화는 현실의 은유일까 아닐까. 내 젊음은 오늘도 정신을 차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언제 흘러가버릴지 모르는 정신없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젊기에 그저 견딘다. 그게 참 우습다. 사람노릇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비극적인 슬픔이 더욱 마음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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