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회 [미디어 포커스]를 보면서

박종구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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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디어 포커스]의 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언론 매체 비평 프로그램으로써는 유일하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서로 비평을 하지만 그것은 단발성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디어 포커스]가 가진 지속성이며 명확성이다. 그에 따라 제작에 여러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얻을 수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첫 번째 주제는 "폭력을 보는 이중 잣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現, 촛불집회에 이은 일부 과격 시위자들의 폭력과 그들을 막아서는 전.의경들의 폭력을 아울러 말한다. 보수언론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조선.중앙.동아' 신문사와 진보언론의 대명사로 급부상한 '한겨레.경향' 신문사의 보도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중 잣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회색연필의 첫 번째 [딴생각]이다. 이중 잣대는 이들 신문사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우리의 시선도 이중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많은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고(思考)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그 사고(思考)를 이용하는 세력들로 말미암아 심각한 분열에 빠져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이 세력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惡이다.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조중동'의 시선은 크게 이러하다.

 

1. 특정 배후(친북좌파) 세력의 조종에 의한 정치적 불법 시위.

2. 法 위에 선 시위대, 폭력의 해방구, 무법천지.

3.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폭도이자 테러집단.

 

-> 이와 함께 1면에 실린 사진은 진압전경을 폭행하는 시위대의 모습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똑같았다. 하나의 사진을 공유하는가? 해당 기자는 도대체 어느 신문사 소속인가!

 

 

 

 

'경향'과 '한겨레'가 바라보는 촛불집회는 크게 이러하다.

 

1. 비폭력 끝까지 지킨 시민정신.

2. 양측 간의 대치 상황에 대한 설명.

3. 강경 진압에 의한 부상당한 시민들에 대한 설명.

 

-> 이와 함께 1면에 실린 사진은 '한겨레'는 사진 촬영하다 소화기에 맞는 시민. '경향'은 시위대의 행렬 사진이었다.

 

 

 

 

--여기서, 어린아이도 갖게 될 의문이 생긴다. 촛불집회는 두 곳에서 열린 것이 아니다. 하나의 집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쩌면 이렇게 상반될 수 있을까? '조선.중앙.동아일보' 기자나 '한겨레.경향신문' 기자 대부분, 같은 대학에서 같은 언론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자 시험에 합격하고 어느 신문사 소속이냐에 따라 기사내용은 확연히 달라지고 만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제는 기사나 사진만 보고서도 어떤 신문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용기는 어디에서든 필요하다. 기자들은 부디 용기를 내어, 소속에 따른 편향적 기사는 더는 쓰지 말기를 바라며 소신 있는 기사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해도 '참, 편한 소리 하고 있네.'다. 그러한 용기를 내다가는 밥줄이 끊길 테니 말이다.

 

두 번째 주제는 "광고 압박운동이 불법? 칼 빼든 검찰"이다. 이른바 '조중동' 신문사에 광고를 싣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불매운동에 대한 검찰의 전담반 꾸리기에 대한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각 신문사마다 극과 극이다. 여기서 회색연필은 두 번째 [딴생각]을 품는다.

 

 

 

 

--'조중동'이야 당사자요 피해자(?)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불법임을 분명히 밝혔고 동시에, 조선일보는 한 인터텟 요리 카페 운영자에게 광고주 압박운동 게시물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응하지 않을 시에는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문서를 보낸다. 대한민국 제1의 신문사(물론, 판매부수 기준이다)라 스스로 자부하는 조선일보가 평범한 주부를 상대로 보낸 공문이라니, 웃음 밖에는 나오질 않는다. 그들의 아내가 회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한겨레와 경향의 반응은 정반대다. 광고주 압박운동은 소비자의 권리이며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는 기업은 '조선일보'라는 언론 상품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협력업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논하고자 한다. 광고주 압박운동을 펼치는 소비자들은 '조중동'이라는 언론 상품을 불량 상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식품은 맛과 영양, 그리고 무엇보다 안정성으로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신문은 사진과 기사, 사설, 무엇보다 전체적인 논조로 역시,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조중동'은 이미 수많은 독자에게 팔린 오래된 상품이다. 이것은 무작정 '조중동'이라는 상품을 불량 취급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제는 '조중동'이 불량 신문이라는 여론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급속한 결속력을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의 의도된 계획으로 지금의 광고주 압박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중동'을 불량 언론으로 평가한 소비자들은 많았으나 그런 의견을 하나로 결집해 줄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자, 그럼 왜! '조중동'이라는 신문 자체만의 불매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조중동' 신문에 광고를 내는 기업의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협력업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자. 신문사들의 재정 대부분은 광고수익에 의존한다. 따라서 '조중동' 신문사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그 신문사들의 재정을 늘려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광고주 압박운동의 근본 취지다. 불량상품의 유통을 막고자 하는 소비자의 운동이다. 이것이 불법인가? '조중동'에 광고를 내는 기업은 '조중동'이라는 불량 언론이 계속해서 생산, 유통되는 데 한몫하는 협력업체가 되는 것이다. 고로, 해당 기업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 역시 정당하다. 왜냐하면 '조중동'에 지급한 광고비는 고스란히 해당 기업 상품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소비자 입장에서는 소비의 절대적 기준인, 가격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다. '조선.중앙.동아일보'에 제발 광고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불량 언론을 퇴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現 광고주 압박운동의 실체이자 본질이다. 부디, 왜곡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도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는 많은 지방신문사들이 있다. 차라리,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신문사들에 더 많은 광고를 내어 달라. 그리하여 좀 더 공정하고 균형 있는 언론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조중동'에 광고 내는 것보다 기업 이미지는 더 좋아질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검찰이 발빠르게 나서는 모습이 수상하다. 독립성과 공정성이 생명인 검찰이 방송통신위원회와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것은, 검찰 스스로 "우리는 정치 검찰이자 MB 검찰, 더 나아가 조중동 검찰입니다."라고 밝히는 꼴이다. 검찰의 독립성은 이 정권하에서는 물 건너간 것 같다. 앞으로 검찰 수사를 지켜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명제 앞에서 보는 결과는 뻔하다. 한 편으로는 권력과 국민 사이에 끼어 진땀 흘리는 검찰이 안쓰럽기도 하다. 지금 남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아, 두 번째 [딴생각]은 이쯤에서 접고자 한다.

 

회색연필의 [덧생각]이다. '조중동'은 '경향'과 '한겨레'뿐만 아니라 'KBS'에 대해서도 편파 보도라며 생떼를 쓰고 있다. 내가 하는 것은 바르고 남이 하는 것은 삐뚤어진 건가? [미디어 포커스]라는 건전한 언론 비평 프로그램 존재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언론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타 언론으로부터의 비난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한 마디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언론이야말로 이 시대를 정도(正道)로 이끌어갈 진정한 국민의 언론으로 사랑받을 거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 번째 주제는 "법 위에 상품권 일보"이다. 이 주제문 작성하신 작가님의 센스가 일품이다. 앞서, 전경 버스 위에서 깃발 흔드는 시위대를 "법 위에 시위대"라 정의한 조선일보 1면 기사 제목에 맞불을 놓은 듯하다. 속이 후련하다. 바로 '조중동'의 불법판촉 행위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한 광고주 압박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협박성 공문까지 발송한 신문사들이 자행하는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불법의 현장을 지켜보고자 한다. 심한 분노를 억누르며,

 

회색연필은 세 번째 [딴생각]을 한다. 은평, 뉴타운 입주자들을 겨냥한 '조중동'의 불법판촉 행위에 대해서 '조중동'은 자사 신문에 불법사실을 인정하는 기사와 더불어 사과성명을 내야 한다.

 

 

 

--인도 위에 불법으로 천막까지 쳐 놓고 그 앞에는 자전거를 보란 듯이 진열해 놓았다. 당연히 판촉물이다. 신문지 팔려고 자전거를 판촉물로 준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대단한 신문사들이다. 자전거 구입 비용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지국장들 주머니에서? 국장급 간부들 주머니에서? 논설위원 주머니에서? 설마, 사장님 주머니에서? 이게 끝일까? 당연히 아니다. 여기에다 솔깃한 제안까지 한다. 5만 원 상품권에 7개월 무가지에다, 경제신문까지 덤으로 준단다. 정말, 지심(紙心) 한번 좋은 신문사들이다. 이따위 불법으로 구독자 수를 늘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뻔하다. 많은 구독자 수를 자랑하며 많은 기업들의 광고 주문을 유도하는 것이리라. 앞에서 다룬 광고주 압박운동이 왜! 꼭 필요한 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저질스러운 모습니다. '조중동'에 광고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악순환의 출발이기도 하다. 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공정한 잣대로써 기사가 작성된다면, 이따위 불법판촉 행위는 필요없지 않은가! 벌과 나비는 꿀을 얻기 위해 꽃으로 날아든다. 그러나 진짜 꿀이 아닌, 꿀과 비슷한 빛깔과 향기, 맛으로 속인다면 곤충인 벌과 나비도 그 꽃을 미련없이 떠나 버린다.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순리 아닌가! '조중동' 고위급 간부들의 '나는 몰랐다'라는 대답은 너무도 뻔하다. 왜냐하면, 불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불법판촉 행위를 스스로 할 지국장은 없을 것이다. 불법판촉 행위를 해서라도 구독자 수를 늘려야만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은 분명히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일 것이다. '조중동'만이 펼칠 수 있는 불법판촉 행위의 힘에 필자의 두 주먹에도 알 수 없는 힘이 가해졌다.

 

 

 

 

--조선일보 판촉요원 중 한 명은 오히려 취재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경찰에 신고했다. 자수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취재진이 신분을 밝히지 않고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이유를 든 것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조선일보를 꼭 빼닮았다. 믿음을 강조하는 어느 판촉요원의 인터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거래하자는 것이다. 자신들의 불법판촉 내용을 문서로 남길 만큼 어리석지는 않은 모양이다. 또한, 혹하여 신문구독을 마음먹은 구독자가 도중에 절독을 요구할 때, 그들은 안면몰수한다. 그리고 선행물의 반납 없이는 절대 구독정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야비하고 치사한 수작이다. 이들 '조중동'의 구독자 수가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여기서 잠깐, 어느 토론 프로그램에 나왔던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일보 광고주 압박운동에 관한 토론 중에 나왔던 말이다. 상대편에서 신문의 논조가 자신의 견해와 다를 때, 거기에 실리는 광고 상품이 고스란히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가니, 해당 기업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합법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진성호 의원의 말이다. "그럼 100만, 200만 되는 독자들은 뭡니까? 그들은 조선일보가 좋아서 봅니다. 그리고 그에 딸린 식구들을 합하면..." 여기서 또 잠깐, 진성호 의원의 이력을 살펴본다. 초선 의원으로서 전직 조선일보 기자였으며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인터넷 팀장이었다. 발끈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자, 그럼 세 번째 [딴생각]을 마무리 짓겠다. 결국, 그 많은 구독자 수를 들먹이며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고 항변하는 조선일보. 알고 보니 상당수의 구독자를 불법판촉물로 유혹하였으며, 절독 요청은 처음의 친절함에서 돌변하여 양의 탈을 벗고서 거절한다. 당연히 엄청난 구독자 수를 유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야비하게 늘린 구독자 수는 미끼가 되어 기업 광고 수주에 일등공신이 된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글 쓰면서 이렇게 속 뒤집어 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면서 회색연필의 [딴생각]을 끝장내고자 한다.

 

 

 

 

--회색연필의 [덧생각]이다. 어느 분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언론이 권력의 도구였는데, 지금은 언론 자체가 스스로 거대한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언론에 던진 말이다. "앞으로는 '촛불집회'라는 단어 사용은 자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 답은 역시 조선일보에서 찾을 수 있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에 재빨리 발맞춘 조선일보의 '촛불집회'에 대한 달라진 표현은 바로, '폭력집회'이다. 일부 시위대의 폭력을 앞세워 민주와 정의의 촛불을 든 국민 모두를 폭도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조선일보는 또 다른 단어 사용도 해야 한다. 그래야 형평성에 맞고 중립의 정도를 걷는 바른 언론이 될 테니까. 바로, '폭력경찰'이다. 경찰의 폭력은 정당하고 시민의 폭력은 불법이며 국가 정체성을 부인하는 친북좌파 성향의 폭도인가? 정몽준 의원의 버스요금 70원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강부자 내각에서 봤듯이 現,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과는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소통도 끊은 채로 살고 있다. 언론 문제로 돌아간다. 현재 논란이 되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절대 안 된다. 그리된다면, '조중동'은 아마도 청와대 기왓장 위에 올라앉을 것이다. 조선방송이 조선일보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중앙일보가 중앙방송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이에 동아방송과 동아일보까지 가세한다면, 그야말로 미디어 권력이라는 '괴물'이 등장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찰의 피해를 1면 기사로 올리는 '조중동'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생각해 보라! 중무장한 훈련받은 전.의경들의 피해가 그러하다면,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피해는 어떠하겠는가! 쇠 파이프와 각종 흉기로 무장한 시민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경찰의 강경진압은 일부 극력 시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촛불 들고 경찰의 강경진압에 도망치던 한 여성이 넘어졌다. 경찰 눈에는 촛불도 흉기로 보였나 보다. 무차별 구타 모습이 이미 전파를 탔다. 내 여동생이, 내 누나가! 경찰 군홧발에 짓밟히고 곤봉에 맞아 신음하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오빠와 동생이 어디 있겠는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경찰은 법질서 확립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앞세워 이성을 잃은 야수와 같이 달려든다. 지금 서울 광장 일대는 무법천지가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으로 절규하는 국민 분노의 소리로 가득 차버린, 법으로 가장한 야만적인 초원의 풍경이다. 경찰도 시위대도 모두 사람이다. 감정이라는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있다. 왜! 그것은 뒤로하고 자꾸 법만 앞세우는가. 민심을 달래야 한다. 법 위에 있는 민심을 헤아려야 한다. 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폭력집회라고 규정하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정부가 할 소리인가! 소 사육 농가 뿐만 아니라, 이제는 양돈 사육 농가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머지않아 미국산 쇠고기가 대한민국 수많은 서민의 가슴에 거친 뿔을 들이댈 것이다. 촛불집회에는 평범한 국민이 대다수다. 부유층들이 비 맞으면서 물대포 맞으면서 곤봉과 방패에 찍히면서까지 촛불집회에 참여하겠는가. 서민들을 위한다는 역겨운 변명은 졸속 쇠고기 협상문과 함께 불태워야 하리라. 민심은 곧 천심이다. 정치의 기본 인식 아닌가? 천심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은 정치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대한민국의 참 민주주의를 밝힌 후에, 국민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촛불이 되기를 바란다. 결국, 불의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한,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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