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무장한 일본군 한명이 나를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부모님은 딸에게 무슨일이 일어 났는지 전혀 모르시고 계실 겁니다. 트럭에 실려 주재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여러 명의 헌병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내 입에 양말을 쑤셔 넣고는 계속 그 짓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울자 주재소장이 내 왼쪽 눈을 갈겼고,
그 후로 왼쪽 눈은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지요. 열흘 쯤 지나서 혜산시의 군부대 막사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에는 약 400명의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있었고 우리는 매일 성 노예로
일본군 5,000명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40명까지.... 저항하면 그 놈들은 두들겨 패고 입에 넝마를 집어 넣었습니다. 한 놈은 내가 굴복할 때 까지 내 성기에 성냥을 그어 댔습니다. 밑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지요. 한 조선소녀는 왜 하루에 40명까지 되는
많은 병사를 상대해야 하는지 물었는 데, 그 벌로 야마모도 일본군 사령관은
그녀를 칼로 벨 것을 명령하였지요.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소녀는 발가 벗겨진 채,
손발이 묶여 못이 밖힌 판이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그 위에 몸을 굴렸습니다. 결국에는 그 소녀의 목을 베었지요. 다른 야마모또는 우리들에게
' 너희들을 죽이는 건 개를 죽이는 거 보다 쉬운 일이야' 라고 말했지요. 그놈이
'배가 고파서 너희들이 울고 있으니 인간 살점을 끓여서 먹여라'
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다른 조선 소녀는 수차례의 강간으로 인해
성병에 걸려 50명 이상의 일본군에게 전염이 되었지요.
병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놈들은 뜨겁게 달구어진 쇠막대를 소녀의 성기에 집어 넣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들은 40명을 트럭에 태워
멀리 뱀이 들어 있는 웅덩이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씩 웅덩이에 빠뜨리고
흙으로 덮어서 생매장을 하였지요. ‥‥‥‥‥‥‥‥‥‥■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2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 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철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일본군들은 문신은 여성등의 온 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
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
우리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히고 머리도 일본식으로 잘라버렸으며 나에게 우타마루라는 일본 이름을 달아줬다"며
"우리들을 한 사람씩 따로따로 방에 밀어넣고 얼마 지나서 왜놈 군대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친 듯이 나에게 달려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영심 할머니는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때리고 치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 면서
"그 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셨다"
고 말했다. 또 정옥순 할머니는
"하루는 일본군 장교 8명이 벌거벗고 나타나 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며 " 놈들은 나에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갖은 짓을 다 했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빨로 놈들을 물어뜯었다"
고 치를 떨었다. 정옥순 할머니는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물고문을 당한 뒤 나체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가혹한 응징을 당해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입 안에 쇠몽둥이를 넣고 휘둘러 이빨이 모두 부러졌고 입술을 뒤집어 바늘 도장으로 입묵(문신)을 하기 시작해
온몸에 흉한 그림을 그렸다. 김대일 할머니가 증언한 장면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싶은,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여자가 임신을 했는데
하루는 다나카라는 자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를 쓰러뜨렸다.
놈은 사정없이 그녀의 배를 걷어찬 다음 군도로 배를 쭉 갈라 태아를 꺼내 내동댕이쳤다." 다나카는 이어 다른 위안부를 모아 놓고는 여자의 내장을 칼 끝으로 끄집어 낸 뒤 목에 걸고 방바닥에 낭자한 피를 핥으라고 지시했다. 김대일 할머니는
"이때 많은 여자들이 기절했고
심장이 파열돼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동신문은 또한 "일제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들을 동물적인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서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인체실험 대상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육체를 식료품으로, 전략물자로까지 대치하는 전대미문의 살인만행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요코스카(橫須賀) 해군병원에서 일했다는 한 노인은 "병원에서 매독에 걸린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자주 진행됐다"며 "살인귀들은 인체실험이 끝나면 더는 쓸모가 없게 된 위안부의 명줄을 끊고 내장은 내장대로 드럼통에 담고 몸체는 토막을 내 밀차(손수레)에 실어 적재장으로 날랐다"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그것을 싣고 어디론가 갔다가 다음날이면 기름이 든 드럼통을 실어 오곤 했다" 면서 "그것은 사람의 기름이었다, 놈들은 그것을 항공유에 섞어 전쟁에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에 더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남방전선에서 식량보급이 중단되자 '식인작전'까지 감행했다며 당시 적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희생됐다고 지적했다. "일제 침략군 야수들은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일본도로 토막내 나눠먹는 상상 밖의 몸서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동신문은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이었다"며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제목없음
" 나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에서
1920년 12월 28일에 태어 났어요.
13세 였던 6월 어느 날 논에 나가서 일하시는
부모들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물을 길러 마을로 갔습니다
이때 무장한 일본군 한명이 나를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부모님은 딸에게 무슨일이 일어 났는지 전혀 모르시고 계실 겁니다.
트럭에 실려 주재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여러 명의 헌병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내 입에 양말을 쑤셔 넣고는 계속 그 짓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울자 주재소장이 내 왼쪽 눈을 갈겼고,
그 후로 왼쪽 눈은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지요.
열흘 쯤 지나서 혜산시의 군부대 막사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에는 약 400명의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있었고 우리는 매일 성 노예로
일본군 5,000명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40명까지....
저항하면 그 놈들은 두들겨 패고 입에 넝마를 집어 넣었습니다.
한 놈은 내가 굴복할 때 까지 내 성기에 성냥을 그어 댔습니다.
밑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지요.
한 조선소녀는 왜 하루에 40명까지 되는
많은 병사를 상대해야 하는지 물었는 데,
그 벌로 야마모도 일본군 사령관은
그녀를 칼로 벨 것을 명령하였지요.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소녀는 발가 벗겨진 채,
손발이 묶여 못이 밖힌 판이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그 위에 몸을 굴렸습니다.
결국에는 그 소녀의 목을 베었지요.
다른 야마모또는 우리들에게
' 너희들을 죽이는 건 개를 죽이는 거 보다 쉬운 일이야'
라고 말했지요. 그놈이
'배가 고파서 너희들이 울고 있으니 인간 살점을 끓여서 먹여라'
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다른 조선 소녀는 수차례의 강간으로 인해
성병에 걸려 50명 이상의 일본군에게 전염이 되었지요.
병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놈들은 뜨겁게 달구어진 쇠막대를
소녀의 성기에 집어 넣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들은 40명을 트럭에 태워
멀리 뱀이 들어 있는 웅덩이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씩 웅덩이에 빠뜨리고
흙으로 덮어서 생매장을 하였지요.
‥‥‥‥‥‥‥‥‥‥■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2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 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철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일본군들은 문신은 여성등의 온 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
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
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
■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3
"위안소에 도착하자 놈들은
우리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히고 머리도 일본식으로 잘라버렸으며
나에게 우타마루라는 일본 이름을 달아줬다"며
"우리들을 한 사람씩 따로따로 방에 밀어넣고 얼마 지나서 왜놈 군대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친 듯이 나에게 달려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영심 할머니는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때리고 치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 면서
"그 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셨다"
고 말했다.
또 정옥순 할머니는
"하루는 일본군 장교 8명이 벌거벗고 나타나 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며 "
놈들은 나에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갖은 짓을 다 했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빨로 놈들을
물어뜯었다"
고 치를 떨었다.
정옥순 할머니는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물고문을 당한 뒤 나체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가혹한
응징을 당해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입 안에 쇠몽둥이를 넣고 휘둘러 이빨이 모두 부러졌고 입술을
뒤집어 바늘 도장으로 입묵(문신)을 하기 시작해
온몸에 흉한 그림을 그렸다.
김대일 할머니가 증언한 장면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싶은,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여자가 임신을 했는데
하루는 다나카라는 자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를 쓰러뜨렸다.
놈은 사정없이 그녀의 배를 걷어찬 다음 군도로 배를 쭉 갈라
태아를 꺼내 내동댕이쳤다."
다나카는 이어 다른 위안부를 모아 놓고는 여자의 내장을 칼 끝으로 끄집어 낸 뒤 목에 걸고
방바닥에 낭자한 피를 핥으라고 지시했다.
김대일 할머니는
"이때 많은 여자들이 기절했고
심장이 파열돼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동신문은 또한 "일제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들을 동물적인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서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인체실험 대상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육체를 식료품으로,
전략물자로까지 대치하는 전대미문의 살인만행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요코스카(橫須賀) 해군병원에서 일했다는 한 노인은 "병원에서 매독에 걸린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자주 진행됐다"며 "살인귀들은 인체실험이 끝나면 더는 쓸모가 없게 된
위안부의 명줄을 끊고 내장은 내장대로 드럼통에 담고 몸체는 토막을 내 밀차(손수레)에 실어
적재장으로 날랐다"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그것을 싣고 어디론가 갔다가 다음날이면 기름이 든 드럼통을
실어 오곤 했다" 면서 "그것은 사람의 기름이었다, 놈들은 그것을 항공유에 섞어 전쟁에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에 더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남방전선에서 식량보급이 중단되자
'식인작전'까지 감행했다며 당시 적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들이 희생됐다고 지적했다.
"일제 침략군 야수들은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일본도로 토막내 나눠먹는 상상
밖의 몸서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동신문은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이었다"며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