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이 조그만 무대 안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집 안 곳곳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막 세트'의 형식적 장치는 상징 미학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물에의 집중화'라는 전략적 의도에도 잘 복무하는 듯 보였다. 또 연극 설정의 차용과 내레이션을 통한 서사적 보완, 그리고 배우들을 향해 자유로이 다가갔다 멀어지는 헨드헬드 카메라의 조화로운 사용 등 형식상의 색다른 시도는 별 거부감 없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그레이스라는 당찬 여성 인물에게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쥐어준 채 현대의 인간 사회, 좀 더 들어가서 미국, 미국인의 초상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소품을 긴장감 있게 펼쳐나간다.
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그런대로 적합한 키워드는 '순수'였다. 인간의 알량한 시기심과 배려없는 욕망이 몰고 간 그레이스를 향한 폭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영화의 후반부에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레이스가 처음 도그빌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 사람들의 순수성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레이스는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을 지라도 그녀는 도그빌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을 남자 모두가 자기를 강간하고 모든 여성들이 질투와 미움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레이스가 끝까지 도그빌을 놓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순수함에 대한 일말의 희망. 그러나 그레이스는 믿었던 톰까지도 영악한 술수로 자신을 속이려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서야 순수 그 자체에 대한 모든 의미가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제 영화는 '용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두 번째 고민에 들어간다. 저 사람들을 이 황폐한 지경으로까지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레이스는 여전히 그것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순수한 본성 때문이라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저들을 그토록 악랄하게 만든 환경, 구조에 시선을 두려 애쓴다. 그녀에게 있어 마을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체(human being)'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오만한 시각이라 지적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강조한다.
물론 갱단의 두목인 아버지의 그 '응징'이 품고 있는 독재적 성격은 예컨대 히틀러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레이스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보기에, 도그빌 사람들이 이렇게 된 모든 이유는 결국 '나약함(frailty)' 때문이다. 순수한 두려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있는 두려움, 그 나약한 본성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복수심만을 갖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 문득 마을을 비추던 달빛의 각도가 조금 바뀌며 사람들을 비추자 그레이스는 이 마을을 '좋게 바꾸기 위한 방편'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을의 소멸'이다. 그녀에게 있어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모든 걸 없애는 것은 그녀가 그녀의 '힘'으로 내릴 수 있는 최상의 행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난하게' 니체를 떠올릴 만하다.
진리의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혼란스런 인간사에 대한 묘사도 그렇거니와 종국에는 아버지의 '권력(니체의 '힘'에 대한 조야한 해석이 바로 권력이다)'을 사용하여 도그빌을 최상의 상황으로 만들어보려는 그레이스의 '의지'가 영화 전면에 부각된다. 그리고 그것의 종착점은 짙은 허무주의이며, 그렇기에 감독의 개인적 반미성향과는 상관 없이 이 영화는 다분히 비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다.
'미국 삼부작("미국 - 기회의 땅")' 중 첫 번째 작품인 에 이어 두 번째 연작 또한 이러한 관점을 깊숙이 품고 간다. 노예제와 인종 문제를 끌어와 보다 역사적인 맥락 속에 감독의 관심을 투사시키고는 있지만, 실은 이 영화 역시 인간 사회 저변에 깔린 여러 '모호함'의 지층들을 이상주의에 대한 관념적 강박의 허울을 풀어내는 정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성장과 퇴보'라는 모순적이고도 모호한 주제를 다루어보려는 이 영화의 미덕은 딱 이 지점에 안주한다. 그레이스의 '민주주의'는 부시 행정부의 그것에 비유될 만큼 의도적이지 않을 뿐더러, 다분히 비정치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미국과 부시에 대한 강한 은유'로 판별하려하는 일부 리뷰어들의 시각은, 오히려 영화 자체가 가져야 할 제 몫을 원래의 지점으로부터 억지로 떼어놓도록 만들려는 과장된 강박에 다름 아니다.
결국 원래의 '복종적이지만 안락했던' 상황으로 모든 걸 되돌려버리는 '길들여진' 흑인들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상주의, 즉 치기 어린 민주주의에의 물리적 노력에 대한 대가로 파국을 맞게 된다. 여기서 관객이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그레이스의 민주적 사회에 대한 이상과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서로 혼돈하지 않는 것이다. 그레이스와 미국을 상호 비교한다는 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비유상의 맞물림을 통해 살짝 맛볼 수 있는 쾌감 따위 밖엔 제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인간 본성과 구조적 제도화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관념적으로 주물딱거려 만들어낸 감독의 우화는, 작금의 미국과 세계 곳곳의 지배권력자들이 욕망하고 통제하려 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나 그것의 작동 방식을 결코 그려내지 못한다. 의식의 식민화와 다수결의 폐해 따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서조차 얘기하기 힘들다. 그러니 전작보다 더욱 간결하고 명확해진 만덜레이 동네의 우화를 가지고 현실 정치상의 그 어떤 코드로 풀어내려는 것은 어리숙한 시도일 뿐이다.
는 이 가지고 있던 인간론에 대한 섬세한 고민의 흔적조차 적잖이 포기해버렸다. 주제를 보다 구체적인 영역으로 끌고 옴으로써 오히려 이 영화는 전작이 가지고 있던 다소 관념론적인 재미조차 폐기 처분시킨 것이다. 불필요한 비교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주의적 기교를 내세워 찍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스릴러 삼부작(, , )보다 이 미국 삼부작이 더 나은 프로젝트로 평가받을 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물론 2007년 개봉 예정인 마지막 연작 에서도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으로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Young Americans'가 흐를 가능성이 크지만, 과연 이처럼 일관된 음악의 사용만큼이나 영화의 내용적 측면에서 또한 얼마나 집중적이고 유기적인 '미국 삼부작'을 보여줄 지는 조금 우려스럽다.
만덜레이
관념론의 향연으로 남겨두기
PIFF상영작, 라스 폰 트리에의
오마이뉴스 / 김영진(blocan)
2005-10-16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이 조그만 무대 안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집 안 곳곳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막 세트'의 형식적 장치는 상징 미학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물에의 집중화'라는 전략적 의도에도 잘 복무하는 듯 보였다. 또 연극 설정의 차용과 내레이션을 통한 서사적 보완, 그리고 배우들을 향해 자유로이 다가갔다 멀어지는 헨드헬드 카메라의 조화로운 사용 등 형식상의 색다른 시도는 별 거부감 없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그레이스라는 당찬 여성 인물에게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쥐어준 채 현대의 인간 사회, 좀 더 들어가서 미국, 미국인의 초상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소품을 긴장감 있게 펼쳐나간다.
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그런대로 적합한 키워드는 '순수'였다. 인간의 알량한 시기심과 배려없는 욕망이 몰고 간 그레이스를 향한 폭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영화의 후반부에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레이스가 처음 도그빌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 사람들의 순수성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레이스는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을 지라도 그녀는 도그빌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을 남자 모두가 자기를 강간하고 모든 여성들이 질투와 미움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레이스가 끝까지 도그빌을 놓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순수함에 대한 일말의 희망. 그러나 그레이스는 믿었던 톰까지도 영악한 술수로 자신을 속이려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서야 순수 그 자체에 대한 모든 의미가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제 영화는 '용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두 번째 고민에 들어간다. 저 사람들을 이 황폐한 지경으로까지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레이스는 여전히 그것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순수한 본성 때문이라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저들을 그토록 악랄하게 만든 환경, 구조에 시선을 두려 애쓴다. 그녀에게 있어 마을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체(human being)'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오만한 시각이라 지적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강조한다.
물론 갱단의 두목인 아버지의 그 '응징'이 품고 있는 독재적 성격은 예컨대 히틀러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레이스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보기에, 도그빌 사람들이 이렇게 된 모든 이유는 결국 '나약함(frailty)' 때문이다. 순수한 두려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있는 두려움, 그 나약한 본성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복수심만을 갖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 문득 마을을 비추던 달빛의 각도가 조금 바뀌며 사람들을 비추자 그레이스는 이 마을을 '좋게 바꾸기 위한 방편'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을의 소멸'이다. 그녀에게 있어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모든 걸 없애는 것은 그녀가 그녀의 '힘'으로 내릴 수 있는 최상의 행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난하게' 니체를 떠올릴 만하다.
진리의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혼란스런 인간사에 대한 묘사도 그렇거니와 종국에는 아버지의 '권력(니체의 '힘'에 대한 조야한 해석이 바로 권력이다)'을 사용하여 도그빌을 최상의 상황으로 만들어보려는 그레이스의 '의지'가 영화 전면에 부각된다. 그리고 그것의 종착점은 짙은 허무주의이며, 그렇기에 감독의 개인적 반미성향과는 상관 없이 이 영화는 다분히 비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다.
'미국 삼부작("미국 - 기회의 땅")' 중 첫 번째 작품인 에 이어 두 번째 연작 또한 이러한 관점을 깊숙이 품고 간다. 노예제와 인종 문제를 끌어와 보다 역사적인 맥락 속에 감독의 관심을 투사시키고는 있지만, 실은 이 영화 역시 인간 사회 저변에 깔린 여러 '모호함'의 지층들을 이상주의에 대한 관념적 강박의 허울을 풀어내는 정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성장과 퇴보'라는 모순적이고도 모호한 주제를 다루어보려는 이 영화의 미덕은 딱 이 지점에 안주한다. 그레이스의 '민주주의'는 부시 행정부의 그것에 비유될 만큼 의도적이지 않을 뿐더러, 다분히 비정치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미국과 부시에 대한 강한 은유'로 판별하려하는 일부 리뷰어들의 시각은, 오히려 영화 자체가 가져야 할 제 몫을 원래의 지점으로부터 억지로 떼어놓도록 만들려는 과장된 강박에 다름 아니다.
결국 원래의 '복종적이지만 안락했던' 상황으로 모든 걸 되돌려버리는 '길들여진' 흑인들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상주의, 즉 치기 어린 민주주의에의 물리적 노력에 대한 대가로 파국을 맞게 된다. 여기서 관객이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그레이스의 민주적 사회에 대한 이상과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서로 혼돈하지 않는 것이다. 그레이스와 미국을 상호 비교한다는 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비유상의 맞물림을 통해 살짝 맛볼 수 있는 쾌감 따위 밖엔 제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인간 본성과 구조적 제도화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관념적으로 주물딱거려 만들어낸 감독의 우화는, 작금의 미국과 세계 곳곳의 지배권력자들이 욕망하고 통제하려 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나 그것의 작동 방식을 결코 그려내지 못한다. 의식의 식민화와 다수결의 폐해 따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서조차 얘기하기 힘들다. 그러니 전작보다 더욱 간결하고 명확해진 만덜레이 동네의 우화를 가지고 현실 정치상의 그 어떤 코드로 풀어내려는 것은 어리숙한 시도일 뿐이다.
는 이 가지고 있던 인간론에 대한 섬세한 고민의 흔적조차 적잖이 포기해버렸다. 주제를 보다 구체적인 영역으로 끌고 옴으로써 오히려 이 영화는 전작이 가지고 있던 다소 관념론적인 재미조차 폐기 처분시킨 것이다. 불필요한 비교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주의적 기교를 내세워 찍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스릴러 삼부작(, , )보다 이 미국 삼부작이 더 나은 프로젝트로 평가받을 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물론 2007년 개봉 예정인 마지막 연작 에서도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으로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Young Americans'가 흐를 가능성이 크지만, 과연 이처럼 일관된 음악의 사용만큼이나 영화의 내용적 측면에서 또한 얼마나 집중적이고 유기적인 '미국 삼부작'을 보여줄 지는 조금 우려스럽다.
2005-10-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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