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8대 불가사의, 바나우에를 가다 - 2nd day 바나우에 / 코닥출사단

김보미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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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눈을 뜨자 여전히 바나우에로 달려가는 오토버스 안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필름을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잠든 기억도 없이 5시간이 부쩍 지나 있었다는 것. 이래서 일정에 마사지가 있었구나. 여유 좌석이라도 있으면 다리라도 편하게 뻗을 텐데 안타깝게도 차는 만차였고 거의 직각에 가까운 의자에 몸을 접어 넣어야 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부지런한 엄마가 탁탁 털어 햇빛에 말린 내 방 이불과 두 바퀴는 구를 수 있는 내 방 침대였다. 바스락거리는 햇빛 냄새와 병아리 앞가슴같은 보송보송함, 그리고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안락함. 엄마, 맨날 이불 가지고 유난 떤다고 구박해서 미안해요.

 

 5시간 잠을 자고 2번의 휴게소에 서고 한 봉지의 과자를 씹었지만 아직 바나우에는 멀기도 했다.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지만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는 빛이란 없어 산의 형태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간간히 맞은 편 차선으로 트럭이 내려온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불빛에 의지해 창밖을 보고자 애쓰던 중 절벽에 처박힌 차량 하나를 발견했다. 잠이 싹 달아나는 순간. 미안합니다, 그 때 저는 퍼뜩 제 이름으로 들어간 보험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버스는 사고없이 라가위Lagawe로 진입했다. 밝아지는 하늘과 비교적 평단해진 길, 조금씩 보이는 인적이 바나우에에 가까워지고 있구나 하는 설렘을 전해주었다. 오른쪽으로 태양이 떠올랐다. 나의 자리는 왼편이라 오른쪽 앞에 있는 손톱만한 창문을 통해서 간신히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승객들 모두 오랜 승차에 피곤한 건지 아니면 자주 봐서 무뎌진 건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컨츄리 음악과 창밖 풍경은 묘하게 어울려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찬란한 햇살, 복숭아 속살처럼 햇살에 물들어 발그레한 구름, 평탄치 못한 길마저 음악이고 즐거움이었다. 근원모를 충만함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려했다.

 

 

 

 

 

 필리피노의 하루는 일찍부터 시작된다. 6시 남짓 됐을까, 이미 길에는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난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웃음으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을 보자 내 마음도 풍요로워졌다. 꺄르르르. 그들의 웃음 소리는 낙엽이 구르는 소리만큼이나 유쾌하다.

 

 

 

 

 10시간을 달리고 달려 드디어 바나우에에 도착했다. 낡은 건물 두 개, 몇 대의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이 자리하고 있는 초라한 이 곳이 터미널이라고 했다. 매일 아침 8시에 도착하는 이 한 대의 오토버스가 그들에게는 몹시도 중요한 이동수단이겠지. 지프니 기사와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몰려들어 흥정을 한다. 갈만한 호텔 몇군데를 알려주며 가격을 내세웠다. 한 대의 지프니를 빌려 타서 바나우에 시내로 간 후 숙소를 잡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15분 정도면 바나우에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

 

 시설을 확인하고 가격을 맞춘 뒤 숙소를 결정했다. 인터넷에서 리뷰가 좋았던 곳인 피플즈로 결정했는데 화장실에 들어서자 벌레의 사체가 우리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벌레의 사체 주위에 늘어진 집개미의 행렬. 벌레라면 기절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나로서 그 광경이 몹시 강렬하게 눈에 박혔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뿌려 사체를 눈 앞에서 치웠다. 조금이지만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아니라구. 흑흑.

 

 

 

 

 

 집을 나선지 33시간 째라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후회감과 두려움은 잠시 접어두고 샤워를 했다. 아, 정말...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도 뻥이었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그 양도 콸콸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씻고 나오자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이 들었다. 낡고 더러워 보이던 방도 그럭저럭 괜찮네 란 느낌이었다. 역시 단순해. 그리고 방문을 나서고 밖을 바라보자, 와, 아름다운 산과 라이스테라스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다. 어떻게 이렇게 산을 깍아 논과 밭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자연 앞에 서면 말도, 생각도 잊게 되는데. 한 마리 새가 날개짓을 한다. 안녕? 돌아오지 않을 인사를 해 본다.

 

 비가 올 것 같다. 비가 오기 전에 재빨리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쉬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지프니에 몸을 싣고 빵과 초코렛으로 간단히 아점을 해결하고 1시간 여를 달려 바타드batad에 도착했다. 라이스 테라스 뷰포인트view point로 가기 위해서는 희안하게도 등산을 하는 게 아니라 하산을 한다. 1시간 반 정도 산을 내려가면 뷰포인트에 도달하고 조금만 더 가면 폭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땅보다 하늘에 가까운 바타드. 진득한 구름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이 곳을 거슬러 내려가야한다. 가파른 부분이 있긴 했지만 내려가는 계단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려가다 보니 슬슬 올라가는 일이 걱정되긴 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처럼 여겨지는 작은 건물들이 서있다. 음료를 팔기도 하고 가이드를 자처하기도 한다. 폭포까지 1/3 정도 남았을 때 300페소로 가이드를 부탁했다. 그녀는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어머니였다.

 

 

 

 

 

 산은 몹시 푸르렀고 구름은 비를 잔뜩 품고 회색 빛을 띄었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논은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을 모두 펼치면 지구 반바퀴에 이르는 길이가 된다고 했던가. 아찔한 높이를 바라보며 연신 셔터를 눌러보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눈으로 담자. 광활한 라이스 테라스를 그렇게 내 마음에 담았다. 익기 전의 벼는 새싹보다 따뜻하다.

 

 까슬까슬한 벼를 훝어보다 밑에 가득 깔려 있는 다슬기를 보았다. 이것이야 말로 유기농법! 모내기를 한 직후의 논에 물이 가득찬 모습이 보고 싶었었는데 벼로 가득찬 모습도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마지막 뷰포인트에 도착하자 비가 조금씩 떨어진다. 그냥 지나가는 비 같아 마지막 뷰포인트에서 잠시 기다려보지만 비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기념품으로 모자도 사고 단체 사진도 찍고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눈앞에 폭포를 두고 돌아서야했다. 산이 물을 먹으면 위험하다.

 

 지금에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내가 두려웠던 것은 버스 타고 10시간도 아니었고 허름한 숙소도 아닌 등산이었다. 저질체력인 나에게 등산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고 출발 직전 '숨이 턱 밑에 오를 때 쯤 도착' 이라는 리뷰를 읽었기에 두려움은 더욱 컸었다. 운동은 숨쉬기 운동으로 족하단 말이다! 비는 끈질기게 내렸고 몸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난 정말 농담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묵직한 침묵이 나를 짓누를 때면 헛소리를 해서라도 그 분위기를 종식시키고야 만다. 그런데 정말 농담 아니라, 올라가는 동안 농담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카메라,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바리바리 챙긴건가? (심지어 힘들다는 핑계로 찍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난 이 지역으로 오겠다고 했던 거지? 무엇인가 홀린 듯 끊었던 전화가 떠올랐다. 나를 향한 원망과 코닥을 향한 원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지못미 저질체력 ㅠㅠ

 

 결국 마지막 군인, 두환오빠에게 짐을 맡겨야했고 그 순간 미안함과 자괴감에 눈물이 났다. 난 워낙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그순간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면 큰 소리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눌렀다. 울면 지는 거다. 울어버리면 기운이 빠지겠지. 지금도 민폐민폐민폐인데 더 이상은 안돼. 이놈의 저질체력, 이놈의 산, 이놈의 라이스 테라스!!!!!!!!!!!!!!!!!!!! 마음 속에서는 산도 이미 내 손에 죽었다. 

 

 오르는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려가면 거기서 살아야 한다. 오르는 것만이 길이다.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고픈 욕망에 이를 악물고 간신히 도착한 정상. 그 곳에서 사 먹은 시원한 게토레이. 난 그 순간 개안開眼했다. 생명수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이 번뜩하고 돌아오는 것이 이거다 싶더라. 순간 떠오르는 말은 역시, 물보다 흡수가 빠르다. 살만 한가보다, 슬슬 농담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 발로 기어들어 오다시피한 날 반겨준 고양이. 숙소에서 키우는 고양이 같지는 않은데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먹을 것만 보이면 슬그머니 다가와서 코를 킁킁 거린다. 말랑말랑한 발바닥에 슬쩍 손을 대보지만 역시 피하지 않고. 뭐니 너, 정체가 뭐야?

 

 거지같은 몰골을 간신히 탈피하고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오늘 들어 처음으로 끼니다운 끼니를 먹었다. 한국이라면 주식인데 여기서는 컵라면을 에피타이저로 먹어주었다. 비오는 날 따뜻한 라면 국물, 눈물이 난다, 눈물이. 그리고 또 질세라 필리핀 현지 음식 섭취. 캬. 지쳐버린 나는 사진이고 뭐고 먹고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역시 라이스 테라스의 본고장인 바나우에답게, 그리고 동남아답지 않게 쌀이 정말 맛있었다. 숟가락을 대면 부스러질 촉감의 쌀을 예상했는데 쫄깃하고 끈기도 있고 심지어 잡곡도 섞여 있고! 음식도 짜지 않고 맛있었다. 감자 튀김도 단맛이 살짝 도는게 우왕ㅋ굳ㅋ, 닭고기도 킹왕짱. 필리핀에서는 채소 류를 만나기 어렵다는 데 여기서는 야채도 풍부! 맛있는 야채들을 듬뿍 먹어주었다. 좋아한다는 사람은 좋아한다는데, 나는 한국에서도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 시니강Sinigang은 아쉽게도 입에 맞지 않았다.

 

 산 오를 때 느꼈던 원망 따위 스르륵 녹아들었다. 아, 이 단순한 마음(벌써 두번째 단순해진다).

 

 

 

 

 

 후덜덜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거리 구경을 나갔다. 그리고 찾아낸 재래시장! 색깔 입힌 계란이 그냥 하얀 계란의 2배보다 더 비싸더라. 토마토도 날씬하고. 이리저리 물어보고 찔러보고 사진 찍어보고 결국 사온 건 망고와 바나나 뿐. 40페소짜리 쪼리 하나 사 신고 좋다고 나풀나풀 뛰어 다녔다. 내일 되면 다리 아프다고 후회할텐데.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잔씩 나누었다. 안주는 마닐라에서 사온 매운 새우깡과 망고 그리고 바나나. 파인애플이 아닌 과일은 그리 즐기지 않는데 여기 망고는 훔쳐가고 싶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망고가 원래 이런 맛이었나 싶을 정도로. 술이 술술 넘어간다. 달콤한 기분. 그렇게 바나우에의 밤은 깊어져만 갔다.

 

 ...그냥 자면 아쉽지, 호텔 피플즈 벽에 붙어 있던 마사지 전화번호 발견! 그냥 자면 내일 못 일어난다는 마음으로 낼름 연락했다. 그런데 문의를 전화가 아닌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필리핀에서는 전화보다 문자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일정 금액만 내면 무제한 문자 요금제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휴대 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잠시 후 도착한 마사시사. 침대에 누워 마사지를 받는데 피곤과 함께 잠이 스르륵 몰려왔다. 종아리를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아픈 듯 하면서 시원하다. 몇 번이나 잠이 드는 바람에 마사지하는 언니가 몇 번이나 나를 불러 깨우는 수고를 해야했다. 마사지 비용 300페소를 내고 인사를 한 뒤 불만 끄고 그대로 잠들었다. 내일 만나요. 꼬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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