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 2008년 04월 15일 (화) 18:00:38올댓뉴스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평양대부흥의 여파로 한국교회는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전체 기독교인이 3.5배 정도 증가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부흥이 있었던 평양은 현재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국가의 중심지가 됐으며, 한국은 남북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임을 자처하는 장로교는 해방 후 3차에 걸쳐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고, 이후 사분오열(四分五裂)을 거듭하여 지금은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뉘게 됐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근본원인에 신사참배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올해는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신사참배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한국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교회,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神社參拜)는 일제강점기(1910∼1945)에 신도(神道) 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한다. 신도는 일본 고유 종교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 이용했던 일본 국수사상의 핵심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 신앙을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해 천주교,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9월10일 장로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총회장은 부(否)를 묻지도 않고 만장일치로 가결을 선언했다.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성명서聲明書(성명서) 我等(아등)은 神社(신사)는 宗敎(종교)가 아니요 基督敎(기독교) 敎理(교리)에 違反(위반)하지 않은 本意(본의)를 理解(이해)하고 神社參拜(신사참배)가 愛國的(애국적) 國家儀式(국가의식)임을 自覺(자각)하며 또 이에 率先(솔선) 勵行(여행)하고 追(추)히 國民精神(국민정신) 總動員(총동원)에 參加(참가)하여 非常時局(비상시국) 下(하)에서 銃後(총후) 皇國臣民(황국신민)으로서 赤誠(적성)을 다하기로 期(기)함.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임에도 한국교회는 일제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야 만다. 죄(罪)임을 알면서도 물론 신사참배를 적극 거부한 인물들도 있다. 대표적 순교자는 소양 주기철 목사이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던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 1938~1940년까지 4번에 걸쳐 체포, 투옥되다 1944년 4월21일 순교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된 성도가 2천여명이며 2백여 교회가 폐쇄됐고 50여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3·1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섰던 기독교는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의 죄를 짓고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9년의 장로교 제28회 총회는 홍택기, 한경직, 조승제, 최지화 등이 주도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일본의 침탈전쟁을 위해 기도운동과 시국강연회, 모금운동을 벌였고, 헌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비행기를 천황에게 바치기도 했다. 장로교가 천황에게 바친 조선장로호 목사들은 일본 중들이 행하던 불교 세례인 ‘미소기 바라이’를 강과 바다에서 집단적으로 행했는데, 이 신도침례는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던 의식이다. 주일예배 중 12시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동쪽을 향해 90도로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드리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인식운동’과 ‘신사참배권유운동’을 전개하는 등 이 모든 것들이 우상숭배인 줄 알면서도 1938년말부터 1945년 여름까지 일본 태양신을 섬겼던 것이다. 형식적 회개뿐 해방 후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교인 20여명은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년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하고 한국교회 전체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선포한 홍택기 목사 등 친일파 목사들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반박하며 회개할 기회를 거부했다. 회개 대신 장로교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취소성명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진실한 참회의 모습은 없고 신사참배 결의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니 이를 취소한다는 형식적인 회개에 그쳤다. 이후 신사참배에 대한 개인적인 참회와 사죄는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회개 대신 신사참배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못하도록 결의해 해방 이후 60여년간 신사참배와 친일 행위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우상숭배, 남북분단 초래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와 같은 미온한 태도와 자기합리화 그리고 신사참배의 결과는 마치 구약시대 솔로몬 왕을 떠올리게 한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에 있어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그는 지혜로운 왕이었으며, 아버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으며(왕상11:1), 다른 신을 쫓지 말라는 명령 또한 지키지 못했다.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을 때마다 그 여인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을 들여왔기에 사실상 솔로몬 시대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이방신들이 난립하던 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하나님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방신을 섬긴 결과는 참혹했다. 결국 그로 인해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으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고 한경직 목사는 템플턴상 수상 소감에서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정바울(한국교회기독교영성총연합회) 박사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회개를 한 것은 1992년 종교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가 축하예배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발표한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나님 앞과 국민 앞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인적인 참회로 그치고 말았다. 분열에 분열 거듭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쟁론에 들어갔지만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눈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잘못을 비방하고 다투며 분열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1951년에 영적 순결을 지킨 고신파가 갈라져 나가게 됐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리돼 나갔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장로교회는 내분과 분열을 보이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 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 1959년에는 통합과 합동이라는 두 개의 교파로 총회가 나뉘게 되어, 불과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교회가 세 번씩이나 분열을 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분열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60년 합동측은 고신측과 한때 통합을 했으나 1962년에 호헌파와 성경장로회파가 갈라져 나갔고, 1963년에는 고신측도 다시 분열해 나갔다. 장로교회는 분열의 원인이 신사참배와 그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었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정통을 주장하며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장로교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소위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라 불리는 장로교가 신사참배와 같이 회개와 반성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입장만 취해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한국교회를 위한답시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들었지만 한기총의 발족은 한국교회를 연합하게 만들기보다는 서로를 비방하고 형제를 정죄하는 것에 일조를 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면 신사참배에 대한 일목요연하고 절실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자신들의 죄를 먼저 회개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평양대부흥 100주년이던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2회 총회에는 ‘장로교 제27회 총회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총회 차원의 공식회개와 사과표명 헌의의 건’이 올라왔다. 헌의안을 올린 사람은 경남노회와 총회 평화통일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는 김 성(남해 당항교회) 목사다. 다음은 그 헌의안의 일부다.“누구에게나 과오가 있을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신사참배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강요된 과오라 할지라도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난 다음 그 과오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일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후 신사참배의 과오를 바로잡고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는 데 실패했다.” 장로교는 1947년(33회 총회), 1948년(34회 총회), 1954년(40회 총회) 세 차례에 걸쳐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는 결의를 했다. 김 성 목사는 “취소결의를 세 차례나 거듭했다는 것 자체가 그 취소결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반증할 뿐”이라며 “잘못된 과오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취소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참회할 때 비로소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를 포함 그 어느 교단도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한 적이 없다. 김 목사는 헌의안을 제안한 이유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의 해라고 교회안팎으로 떠들썩하게 행사를 벌이는 와중에서 1907년 장대현교회를 촉발로 하여 일어난 이른바 회개대운동의 본질이 흐려지고 너무 부흥운동에만 기능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더구나 1937년 신사참배 총회결의 70년이 지나도록 장로교단 차원에서 변변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염치없는 짓이라 여겼으며, 부흥을 말하기 전에 우선 회개부터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총회차원의 공식회개 헌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기독교세력이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더라면 해방 후 재건과정에서 사회정치적, 윤리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매우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씁쓸해 하기도 했다. 기장총회는 작년 9월13일 경남노회가 헌의한 신사참배 공식회개 헌의안 건을 허락하고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도 발표했다. 고백문에는 “부당한 일제의 강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맞서지 못하고 신사에 머리 숙였던 부끄러운 죄를 통절한 마음으로 회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내년 3.1절을 전국교회가 참여하는 ‘신사참배 회개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추신:템플턴상은 종교노벨상이 아니라 프리메이슨들의 잔치입니다.국내교게지도자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며 이단입니다.-옮긴이 정현호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
[기획] 신사참배,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신사참배(神社參拜)는 일제강점기(1910∼1945)에 신도(神道) 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한다. 신도는 일본 고유 종교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 이용했던 일본 국수사상의 핵심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 신앙을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해 천주교,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9월10일 장로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총회장은 부(否)를 묻지도 않고 만장일치로 가결을 선언했다.
我等(아등)은 神社(신사)는 宗敎(종교)가 아니요 基督敎(기독교) 敎理(교리)에 違反(위반)하지 않은 本意(본의)를 理解(이해)하고 神社參拜(신사참배)가 愛國的(애국적) 國家儀式(국가의식)임을 自覺(자각)하며 또 이에 率先(솔선) 勵行(여행)하고 追(추)히 國民精神(국민정신) 總動員(총동원)에 參加(참가)하여 非常時局(비상시국) 下(하)에서 銃後(총후) 皇國臣民(황국신민)으로서 赤誠(적성)을 다하기로 期(기)함.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임에도 한국교회는 일제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야 만다. 죄(罪)임을 알면서도
물론 신사참배를 적극 거부한 인물들도 있다. 대표적 순교자는 소양 주기철 목사이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던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 1938~1940년까지 4번에 걸쳐 체포, 투옥되다 1944년 4월21일 순교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된 성도가 2천여명이며 2백여 교회가 폐쇄됐고 50여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3·1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섰던 기독교는 우상숭배인 신사참배의 죄를 짓고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9년의 장로교 제28회 총회는 홍택기, 한경직, 조승제, 최지화 등이 주도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일본의 침탈전쟁을 위해 기도운동과 시국강연회, 모금운동을 벌였고, 헌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비행기를 천황에게 바치기도 했다.
해방 후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교인 20여명은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년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하고 한국교회 전체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선포한 홍택기 목사 등 친일파 목사들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반박하며 회개할 기회를 거부했다. 회개 대신 장로교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취소성명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진실한 참회의 모습은 없고 신사참배 결의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니 이를 취소한다는 형식적인 회개에 그쳤다. 이후 신사참배에 대한 개인적인 참회와 사죄는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회개 대신 신사참배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못하도록 결의해 해방 이후 60여년간 신사참배와 친일 행위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우상숭배, 남북분단 초래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와 같은 미온한 태도와 자기합리화 그리고 신사참배의 결과는 마치 구약시대 솔로몬 왕을 떠올리게 한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에 있어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그는 지혜로운 왕이었으며, 아버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으며(왕상11:1), 다른 신을 쫓지 말라는 명령 또한 지키지 못했다.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을 때마다 그 여인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을 들여왔기에 사실상 솔로몬 시대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이방신들이 난립하던 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하나님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방신을 섬긴 결과는 참혹했다. 결국 그로 인해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으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고 한경직 목사는 템플턴상 수상 소감에서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정바울(한국교회기독교영성총연합회) 박사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회개를 한 것은 1992년 종교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가 축하예배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발표한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나님 앞과 국민 앞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인적인 참회로 그치고 말았다. 분열에 분열 거듭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쟁론에 들어갔지만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눈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잘못을 비방하고 다투며 분열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1951년에 영적 순결을 지킨 고신파가 갈라져 나가게 됐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리돼 나갔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장로교회는 내분과 분열을 보이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 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 1959년에는 통합과 합동이라는 두 개의 교파로 총회가 나뉘게 되어, 불과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교회가 세 번씩이나 분열을 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분열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60년 합동측은 고신측과 한때 통합을 했으나 1962년에 호헌파와 성경장로회파가 갈라져 나갔고, 1963년에는 고신측도 다시 분열해 나갔다. 장로교회는 분열의 원인이 신사참배와 그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었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정통을 주장하며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장로교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소위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라 불리는 장로교가 신사참배와 같이 회개와 반성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입장만 취해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한국교회를 위한답시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들었지만 한기총의 발족은 한국교회를 연합하게 만들기보다는 서로를 비방하고 형제를 정죄하는 것에 일조를 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면 신사참배에 대한 일목요연하고 절실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자신들의 죄를 먼저 회개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신사참배 공식회개 제안 올라와 평양대부흥 100주년이던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2회 총회에는 ‘장로교 제27회 총회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총회 차원의 공식회개와 사과표명 헌의의 건’이 올라왔다. 헌의안을 올린 사람은 경남노회와 총회 평화통일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는 김 성(남해 당항교회) 목사다. 다음은 그 헌의안의 일부다.“누구에게나 과오가 있을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신사참배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강요된 과오라 할지라도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난 다음 그 과오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일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후 신사참배의 과오를 바로잡고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는 데 실패했다.” 장로교는 1947년(33회 총회), 1948년(34회 총회), 1954년(40회 총회) 세 차례에 걸쳐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는 결의를 했다. 김 성 목사는 “취소결의를 세 차례나 거듭했다는 것 자체가 그 취소결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반증할 뿐”이라며 “잘못된 과오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취소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참회할 때 비로소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를 포함 그 어느 교단도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한 적이 없다. 김 목사는 헌의안을 제안한 이유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의 해라고 교회안팎으로 떠들썩하게 행사를 벌이는 와중에서 1907년 장대현교회를 촉발로 하여 일어난 이른바 회개대운동의 본질이 흐려지고 너무 부흥운동에만 기능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더구나 1937년 신사참배 총회결의 70년이 지나도록 장로교단 차원에서 변변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염치없는 짓이라 여겼으며, 부흥을 말하기 전에 우선 회개부터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총회차원의 공식회개 헌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기독교세력이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더라면 해방 후 재건과정에서 사회정치적, 윤리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매우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씁쓸해 하기도 했다. 기장총회는 작년 9월13일 경남노회가 헌의한 신사참배 공식회개 헌의안 건을 허락하고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도 발표했다. 고백문에는 “부당한 일제의 강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맞서지 못하고 신사에 머리 숙였던 부끄러운 죄를 통절한 마음으로 회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내년 3.1절을 전국교회가 참여하는 ‘신사참배 회개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추신:템플턴상은 종교노벨상이 아니라 프리메이슨들의 잔치입니다.국내교게지도자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며 이단입니다.-옮긴이 정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