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자주 온다. 크게 오는 비는 아니지만 기상대가 예측할 수 없도록 ‘국지성 혹은 열대성’이라고 수식어가 붙는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 이상으로 기상관측자들이 여느 때보다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도시에 내리는 비가 승용차 지붕이나 아스팔트, 빌딩들까지 깨끗하게 보일 정도로 고마운 청소부처럼 느껴진다. 지구위에 많은 지역이 몇 년 동안 가뭄에 시달려 초목도 자라지 않아 일부는 흙탕물을 먹는 것을 볼 때 상대적으로 우리는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난 7월 9일부터 구례에서 모교 재학 중인 취업생 들을 상대로 오석점(25회) 교장님은 워크샵을 실시했다. 후배 학생들에게는 전에 없던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그곳 2박3일 일정 중 둘째 날에 정총길(28회) 동문이 휠체어에 탄 채 강단에 서게 됐다. 강사의 프로필을 잘 알지 못 했던 후배들은 누가 지적도 안했지만 실내 분위기를 밀물 같은 침묵을 스스로 만들어 갔다.
2시간 동안 자기 인생의 역경을 토해내듯 이어 갔다. 자기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실타래를 풀어내듯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의 마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함열 다송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육상 특기 장학생으로 이리 동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학년 2학기 체육대회에서 그의 특기종목 육상을 제외한 축구를 선택하게 되었다.
운동선수의 꿈
이후 지도 선생님이 육상보다 축구를 하는 편이 낫겠다며 왼쪽 윙 자리에 배치되었고, 2학년 때인 63년 10월 자매학교였던 전주혜성학교와 친선게임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치료비가 없어 ‘전주예수병원’에 가지 못하고 무면허 침술사에게 침을 잘못 맞아 치료는커녕 어린나이에 중풍까지 오게 되었다. 전혀 걷지 못한 총길은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당시 이리고등학교 3학년이던 형의 자전거 뒤에 매달려 12km의 먼 거리 이리 시내까지 등하교 하게 된다.
넓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당시 등굣길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형은 양쪽 핸들에 가방 한 개씩을 매달아야 했고 동생은 등 뒤에서 형에게 우산을 씌워 주어야 했다. 돌멩이 때문이었는지 형제와 자전거가 함께 넘어진 것이다.
희 망
때마침 옆을 지나 던 검정색 짚차가 이 광경을 보고 정지한 후, 누군가 차량 문을 박차고 내려왔다. 형과 동생에게 “다친 곳이 없느냐?”며 확인 후 형을 칭찬했고, 동생이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후 “내가 너희에게 도와 줄 일이 있겠느냐?”며 물어왔다. 형은 동생이 불편한 몸이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동생의 꿈’이라 하였다. 그 분이 당시 유교육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듬해 장애인 최초로 이리공업고등학교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커트라인 20점을 감점하고 1965년에 전기과학생이 되었다. 다시 1학년 2학기에 수업을 받던 중 다리는 재발되어 2년을 휴학하기도 했으나 4년이 지난 후에야 다리상태가 호전되었다. 학교에 찾아가 복학을 해야겠다고 하니 “너무 오래휴학해서 복학이 어렵다”는 학교 측 입장에 다시 시험을 치러 1969년 전자과(신설1회) 재입학 후 3년을 마쳤다. 기독교방송, 우진계기 등에서 경력을 쌓던 중 더 공부를 하고 싶어 한양공대에 입학하고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 공무부장 표준실장을 거쳐 23년을 마감했다.
2006년에는 다시 식당에 가던 중 다리 아래위가 모두 부러져 깁스를 6개월을 한 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2007년 그는 수원에 p회사을 설립 경영하고 있다. 지식경제부(전, 산자부) 기술표준원 KOLAS 평가 전문위원을 겸하고 있으며, 수원지부 동문회장직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가 대기업 재직 때는 휴가를 내어 모교를 방문 직접 이력서를 받아 입사하기까지 힘이 되어주고 동문 상호간 결속을 다지게 해 소문난 선배이기도 하다. 아직도 도움 받은 많은 후배가 수원지역에서 잘살고 있다. 유난히 정이 많고 따뜻한 성품과 동문들에게 쏟는 정성이 맏형 같은 인상을 준다. 활성화 시켜야 한다며 수원지역 100여명 동문들에게 편지봉투작업과 휴대폰문자, 직접전화통화 등을 하는 일을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딸 하나와 함께 수원병무청 옆 도로변에 2층집을 지어 아래층은 사무실 위층은 살림집으로 불편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의 꿈이 고향근처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이며 땅 매입 작업이 거의 끝났으며 친구들은 무료로 봉사하기로 약속을 했다.
오늘따라 늦여름 장맛비가 울타리 끝 하나 남은 장미꽃에 앞이 보이지 않도록 장대같이 내리고 있다.
1968년 함열가는 황토 먼지 길에서 울던 그 소년은 환갑이 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또 다시 일어나리라.
저를 일으키소서
저를 일으키소서
휠체어에 희망을 싣고
비가 자주 온다. 크게 오는 비는 아니지만 기상대가 예측할 수 없도록 ‘국지성 혹은 열대성’이라고 수식어가 붙는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 이상으로 기상관측자들이 여느 때보다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도시에 내리는 비가 승용차 지붕이나 아스팔트, 빌딩들까지 깨끗하게 보일 정도로 고마운 청소부처럼 느껴진다. 지구위에 많은 지역이 몇 년 동안 가뭄에 시달려 초목도 자라지 않아 일부는 흙탕물을 먹는 것을 볼 때 상대적으로 우리는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난 7월 9일부터 구례에서 모교 재학 중인 취업생 들을 상대로 오석점(25회) 교장님은 워크샵을 실시했다. 후배 학생들에게는 전에 없던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그곳 2박3일 일정 중 둘째 날에 정총길(28회) 동문이 휠체어에 탄 채 강단에 서게 됐다. 강사의 프로필을 잘 알지 못 했던 후배들은 누가 지적도 안했지만 실내 분위기를 밀물 같은 침묵을 스스로 만들어 갔다.
2시간 동안 자기 인생의 역경을 토해내듯 이어 갔다. 자기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실타래를 풀어내듯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의 마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함열 다송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육상 특기 장학생으로 이리 동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학년 2학기 체육대회에서 그의 특기종목 육상을 제외한 축구를 선택하게 되었다.
운동선수의 꿈
이후 지도 선생님이 육상보다 축구를 하는 편이 낫겠다며 왼쪽 윙 자리에 배치되었고, 2학년 때인 63년 10월 자매학교였던 전주혜성학교와 친선게임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치료비가 없어 ‘전주예수병원’에 가지 못하고 무면허 침술사에게 침을 잘못 맞아 치료는커녕 어린나이에 중풍까지 오게 되었다. 전혀 걷지 못한 총길은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당시 이리고등학교 3학년이던 형의 자전거 뒤에 매달려 12km의 먼 거리 이리 시내까지 등하교 하게 된다.
넓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당시 등굣길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형은 양쪽 핸들에 가방 한 개씩을 매달아야 했고 동생은 등 뒤에서 형에게 우산을 씌워 주어야 했다. 돌멩이 때문이었는지 형제와 자전거가 함께 넘어진 것이다.
희 망
때마침 옆을 지나 던 검정색 짚차가 이 광경을 보고 정지한 후, 누군가 차량 문을 박차고 내려왔다. 형과 동생에게 “다친 곳이 없느냐?”며 확인 후 형을 칭찬했고, 동생이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후 “내가 너희에게 도와 줄 일이 있겠느냐?”며 물어왔다. 형은 동생이 불편한 몸이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동생의 꿈’이라 하였다. 그 분이 당시 유교육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듬해 장애인 최초로 이리공업고등학교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커트라인 20점을 감점하고 1965년에 전기과학생이 되었다. 다시 1학년 2학기에 수업을 받던 중 다리는 재발되어 2년을 휴학하기도 했으나 4년이 지난 후에야 다리상태가 호전되었다. 학교에 찾아가 복학을 해야겠다고 하니 “너무 오래휴학해서 복학이 어렵다”는 학교 측 입장에 다시 시험을 치러 1969년 전자과(신설1회) 재입학 후 3년을 마쳤다. 기독교방송, 우진계기 등에서 경력을 쌓던 중 더 공부를 하고 싶어 한양공대에 입학하고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 공무부장 표준실장을 거쳐 23년을 마감했다.
2006년에는 다시 식당에 가던 중 다리 아래위가 모두 부러져 깁스를 6개월을 한 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2007년 그는 수원에 p회사을 설립 경영하고 있다. 지식경제부(전, 산자부) 기술표준원 KOLAS 평가 전문위원을 겸하고 있으며, 수원지부 동문회장직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가 대기업 재직 때는 휴가를 내어 모교를 방문 직접 이력서를 받아 입사하기까지 힘이 되어주고 동문 상호간 결속을 다지게 해 소문난 선배이기도 하다. 아직도 도움 받은 많은 후배가 수원지역에서 잘살고 있다. 유난히 정이 많고 따뜻한 성품과 동문들에게 쏟는 정성이 맏형 같은 인상을 준다. 활성화 시켜야 한다며 수원지역 100여명 동문들에게 편지봉투작업과 휴대폰문자, 직접전화통화 등을 하는 일을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딸 하나와 함께 수원병무청 옆 도로변에 2층집을 지어 아래층은 사무실 위층은 살림집으로 불편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의 꿈이 고향근처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이며 땅 매입 작업이 거의 끝났으며 친구들은 무료로 봉사하기로 약속을 했다.
오늘따라 늦여름 장맛비가 울타리 끝 하나 남은 장미꽃에 앞이 보이지 않도록 장대같이 내리고 있다.
1968년 함열가는 황토 먼지 길에서 울던 그 소년은 환갑이 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또 다시 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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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Raise Me Up - Josh Grob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