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누가 봐도 최고다. 잭 니콜슨도 팀 버튼의 영화에서 조커를 연기했지만 거기서는 좀 더 코믹하고 괴팍한 사이코패스랄까. 그래서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다. 조커의 과거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버젼이 있다. 알란 무어의 그래픽 노블 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3류 코미디언으로,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인물이자 화학약품탱크에 빠져 늘 웃는 표정이 된 인물로 그려진다. 놀란 감독의 조커는 가정폭력의 결과로 태어난 사이코패스로 묘사된다]
1. 배트맨, 그 공간에 대한 사유
존 카메론 미첼의 에서는 플라톤의 그러니까 의 내용이 노래로 나온다. 제목하여 '사랑의 기원'. 이 세상에 어떻게 세 가지 성이 존재하게 되었는지가 영화에서는 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세 가지 성이란 남성과 여성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나머지는 다 알 것이다. 노래는 어떻게 세 가지 성이 존재하게 되었나에 관한 것이지만 이것을 변용시켜 배트맨에 적용해 보면 인간은 어떻게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을 거다. 정말로 등에 동성이나 이성의 누군가를 달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플라톤은 같이 붙어 다니던-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이 어느날 분리되면서 잃어버린 짝을 찾아 나선 게 사랑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양면성을 지닌 인간은 잃어버린 짝을 찾기는 커녕 등에다 자신의 이면을 달고 다녀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니 그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유대인들의 지혜가 담긴 에서는 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사건을 언급하면서 모든 것이 쌍을 이뤄 타게 되어 있는 방주에 선(善)이 짝이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게 악(惡)이었다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둘이 짝을 이뤄 방주를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이 있는 곳에 항상 악이 따라 다니는 거라고 이 책은 전한다. 성서에는 없는 얘기이나 흥미롭다.
[맨하탄의 야경은 바다를 보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센트럴 파크와 도시 경관을 보려면 라커펠러 센터 꼭대기인 탑 오브 더 락에서 봐야 한다고 한다. 2년전 뉴욕 탑 오브 더 락에서 찍은 맨하탄 야경. 시간대별로 서서히 건물마다 불을 밝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으나 고층빌딩군이 밀집한 모습이 뉴욕을 대표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휘트먼은 이 곳의 빌딩군들을 '날렵한 철제식물들' 이라고 표현했으나 렘 쿨하스의 말을 떠올리자니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가 빡빡한 일상을 의미하며 발 디딜 틈없이 들어찬 빌딩은 그런 점을 드러내 주는 것만 같다. 놀란 감독의 아캄 정신병원이 고담시 중심에 위치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다]
양면성에 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일단 배트맨의 공간적 배경으로 에둘러서 가보자.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 뉴욕이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인 고담시의 모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래된 문학작품에서는 뉴욕시를 고담시로 묘사했다고도 하고, 'DC 유니버스'라고 명명된 히어로들의 세계에 이곳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여기서 'DC 유니버스' 란 배트맨 시리즈를 펴낸 DC코믹스를 말한다. 마블 코믹스와 대립되는 DC 코믹스는 꽤 괜찮은 수퍼히어로 캐릭터들을 보유하고 있고 마블이나 DC는 자사의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설명한 백과사전을 펴냈을 정도다. 국내 대형서점에 가면 가끔 볼 수 있다. 값이 비싸서 아직 안 팔린 것 같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이르러서야 고담시=뉴욕이라는 공식은 깨지는데, 그가 와 에서 촬영장소로 택한 곳은 바람의 도시 시카고다. 비록 시카고라 할지라도 여전히 고담시와 뉴욕시가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놀란 감독은 그 유명한 아캄 정신병원을 에서는 고담시의 중심부에 놓기까지 했으니. 배트맨의 주요 정적들은 모두 다 이 곳에 수감된다. 에서는 배트맨이 조커에게 하는 말이나 나중에 투페이스가 되는 검사 하비 덴트의 대사를 통해 잠깐 언급되지만, 감옥에 가지 않고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악당들은 그 전력을 보자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악당이 된 것이니 약간의 연민마저 일기도 한다. 뉴욕의 중심인 맨하탄을 건축가 렘 쿨하스는 정신분열증적이라는 말을 써가며 묘사했더랬다. 코믹스와 영화 속 도시인 고담시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고담시의 정신병원이 놀란이 그려낸 세계에서는 그 중심부에 위치하니 렘 쿨하스가 뉴욕에 대해 한 말이 겹쳐 보인다. 게다가 악당들이 수감되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니! 이것이야말로 배트맨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코믹스의 세계에서는 배트맨도 이 곳에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한다. 식으로 말하면 악당들은 모종의 계기로 어두운 포스에 잠식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스 베이더가 처음에는 어땠는지 스타워즈 시리즈를 본 관객이라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퍼맨의 어린 시절을 다룬 TV 시리즈 에서 나중에 그의 숙적이 되는 렉스는 악인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 서서히 악에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커는 아캄 정신병원에 미친 척하고 일부러 수감되는데 그를 상담하던 의사는 그의 과거를 듣고 연민을 갖는다. 조커는 이를 이용해 아캄을 탈출하고 상담의는 조커의 애인인 할리 퀸으로 재탄생한다]
2. 양면성과 정의
알란 무어가 쓴 그래픽 노블 를 샀다. 처음에 서점에서 봤을 때보다 값이 많이 내렸다. 요즈음 배트맨에 빠져서 이 시리즈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래픽 노블의 세계를 알고자 간간이 잘 알려진 작품 위주로 사 모으고 있다. 알란 무어는 미국에서는 내년 3월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등의 원작을 쓴 작가다. 팀 버튼은 (1989)를 제작했을 때 이 그래픽 노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직접 이 그래픽 노블에 대한 찬사도 바친 바 있다. 표지 그림은 사악한 조커의 악행을 보여주기에 딱 알맞지만 조커의 악행과 그의 과거가 교차되어 나오는 부분에서는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수퍼히어로물들 중에 배트맨은 비교적 정형이 없는 편이라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모양이다. DC 코믹스 측에서 자사 수퍼히어로들의 얘기를 현대에 맞게 쓰고자 한 것이 배트맨과 수퍼맨의 대결(), 수퍼히어로들의 연합과 반목(), 은퇴한 배트맨의 복귀(), 배트맨의 초년기( 등과 배트맨 정적들의 집합소(?)() 등의 얘기로 가지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많은 작가들과 영화가 그린 조커의 전사(前史)는 그를 절대 악인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데, 그건 배트맨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의 수호자이지만 그도 때로는 사적인 일을 개입시키며 뒤에서 밝히겠지만 그의 힘은 그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캄 정신병원과 배트맨의 정적들.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적은 조커란다. 포이즌 아이비, 투페이스, 조커, 할리 퀸, 허수아비, 리들러 등이 보인다]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이 아닌 사적인 복수를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원래 정의라는 개념이 사적인 복수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가 행하는 건 원초적(?) 정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퍼히어로들의 활약이나 만화 차원을 넘어 철학으로 비약한 그래픽 노블을 쭉 늘어놓고 자경주의 등에 대해 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법을 초월해서 활약하는 건 정당한지에 대해서부터 밝혀야 한다. 사실, 자경주의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법을 신뢰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집단(혹은 자기 자신)의 정의를 독자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법 제도에 대한 강력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배트맨도 고든 경감을 도와 활약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쓰러져 가는 고담시에서 희망이 있다고 믿지만,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기능도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놀란 감독의 시리즈에서는 초법적 존재로 군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경주의에 논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자경주의를 검색하다가 보니 목록에 어릴 때 재밌게 봤던 조차 여기에 포함된다니 말이다. 많은 수퍼히어로들이 자경주의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수퍼맨만은 예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농담같지만 정의를 수호하느라 사유재나 공공재 등을 어쩔 수 없이 부수는 건 배트맨이나 수퍼맨이나 똑같지 않나. 수퍼맨의 행적이 예수와 등치되기 때문에 그런 굴레를 벗겨준 건가. 배트맨도 망토 두른 십자군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알란 무어의 과 . 자경주의의 대표작들이다. 이외에 자경주의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웬만한 수퍼히어로물들은 다 이 범주에 들어가며 수퍼맨과 스파이더맨은 예외에 속한다]
3. 서양과 동양, 그리고 박쥐인간
배트맨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박쥐인간이 된다. 박쥐는 원래 밤쥐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데, 어원을 따지니 배트맨이 왜 '다크 나이트' 인지를 알겠다. 조류와 포유류 사이에 낀 이 동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정신적 미성숙을 상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무언가 결핍된 존재다. 라캉이 인간은 결핍된 존재라고 말했다지만 어릴 적에 부모가 살해당하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 이후에 10년 넘게 각지를 떠돌며 방황한 그는 낮에는 고담시의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으로 밤에는 배트맨으로 활약하지만, 낮에 보여주는 모습은 알아주는 플레이 보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떠나서라도 스크린에 옮겨진 배트맨 시리즈 중 제대로 된 로맨스는 늘 그의 양면성-여기서는 선악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가면쓴 수퍼히어로의 존재로서의 양면성- 덕에 꽃도 펴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포이즌 아이비와 캣우먼 등과의 로맨스는 스릴있지만 바람둥이의 면모는 영화에서 그리 많이 부각되지 않은 것도 같다. 애정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어서 그가 플레이보이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은 건 충실한 하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같기도 한 알프레도가 있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요,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을 끝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로 만든다. 그러니 천하의 배트맨이라도 이런 면에서는 결핍된 존재라는 것이고 박쥐의 상징성과 그의 이미지는 잘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악마를 상징한다고 해서 기독교에서 배척당하기도 했던 배트맨의 심볼. 그런데 웬걸, 동양에서는 오복을 상징하니.....]
또한, 박쥐는 죽음과 공포 혹은 악마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브루스 웨인이 부모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기 보다 오히려 거기서 오는 공포로 자신을 포장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죽음의 전조나 지옥의 힘으로 풀이되는 날개는 어떠한가. 그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그리했다면 당장 체포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의 가면 덕에 그는 그러한 행위를 용납 받는다. 에서는 그의 행동이 시민들에 의해 용인된다기 보다 고든 경감이 봐줘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의 망토가 날개에 해당하니 이를 자신이 늘 달고 살아야 하는 공포를 악당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달리 해석하면 그가 정의라는 사명 아래 휘두르는 폭력은 그의 어두운 면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4. 덧붙이는 말, 혹은 사족
서양에서 박쥐가 갖는 상징으로 배트맨의 속성을 해석하자면 이렇게 되지만 동양에서는 전혀 다르다. 동양에서 박쥐는 편복(蝙蝠)이라고 하며, 여기서의 '복' 이 '복(福)' 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고 보니 곽부성과 구숙정이 나왔던 이라는 영화에서 구숙정의 이복오빠(?)로 나왔던 캐릭터가 편복공자였는데 박쥐처럼 차려입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동양에서는-주로 중화권, 도상의 해석은 우리도 중국 것을 따라간다- 박쥐가 오복을 상징하는 존재란다. 서양에서도 박쥐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로, 생식력(?) 강한 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날 수 있다는 게 왜 생식력으로 연결되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여성을 상징한다는 건 종종 오래 살아서 교활한 80세 노파로 묘사되기도 한다는 것과 연계되지만 배트맨을 도상학적으로 풀이할 때 이 부분은 빼는 게 좋을 것 같다.
[90년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꼽히는 배트맨 TV시리즈.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5. 글맺음과 정리되지 않은 얘기들.
배트맨의 공간은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주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놀란 감독이 영화 속에서 창조한 고담시에서의 아캄의 위치, 그리고 배트맨이 어떤 변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혹독한 수련을 거쳐 탄생한 수퍼히어로라는 점에서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수퍼맨의 경우라면 인간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겠지만 배트맨의 고민은 내적인 면에 있다. 그의 정의 구현은 트라우마를 출발점 삼아 이루어진 것이고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적에게 전가 시킨다. 에서 조커를 심문하는 배트맨 모습은 복수의 화신이지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법 위에 놓여 있다. 여전히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고민케 하는 건 카오스 자체인 조커다. 정적이 존재하는 한 그는 계속 그런 고민을 해야 하며 폭력의 강도가 더해 갈 때마다 그의 어두운 면 또한 강해진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에서는 악당일지라도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배트맨의 면모가 보이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조커를 닮아간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며 정신적 갈등을 겪는 그의 모습은 프랭크 밀러의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나의 미국인 친구가 해준 말이다. 50대의 은퇴한 배트맨을 다룬 프랭크 밀러의 작품에서 그런 고민이 지속된다면 수퍼히어로서의 배트맨은 여전히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의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새로운 배트맨의 연대기를 쓰고 있는데 3부작으로 완결될 그의 시리즈는 결국은 자경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그의 정적은 존재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배트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 도 그런 면이 보이지만 곱씹어 보면 이런 문제는 에서나 이번 작품에서나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국은 적이 없으면 배트맨도 없다는 게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였을까?
[다크 나이트]영웅의 양면성과 공간, 그리고 그의 존재에 관한 도상학적 고찰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누가 봐도 최고다. 잭 니콜슨도 팀 버튼의 영화에서 조커를 연기했지만 거기서는 좀 더 코믹하고 괴팍한 사이코패스랄까. 그래서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다. 조커의 과거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버젼이 있다. 알란 무어의 그래픽 노블 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3류 코미디언으로,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인물이자 화학약품탱크에 빠져 늘 웃는 표정이 된 인물로 그려진다. 놀란 감독의 조커는 가정폭력의 결과로 태어난 사이코패스로 묘사된다]
1. 배트맨, 그 공간에 대한 사유
존 카메론 미첼의 에서는 플라톤의 그러니까 의 내용이 노래로 나온다. 제목하여 '사랑의 기원'. 이 세상에 어떻게 세 가지 성이 존재하게 되었는지가 영화에서는 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세 가지 성이란 남성과 여성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나머지는 다 알 것이다. 노래는 어떻게 세 가지 성이 존재하게 되었나에 관한 것이지만 이것을 변용시켜 배트맨에 적용해 보면 인간은 어떻게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을 거다. 정말로 등에 동성이나 이성의 누군가를 달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플라톤은 같이 붙어 다니던-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이 어느날 분리되면서 잃어버린 짝을 찾아 나선 게 사랑의 시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양면성을 지닌 인간은 잃어버린 짝을 찾기는 커녕 등에다 자신의 이면을 달고 다녀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니 그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유대인들의 지혜가 담긴 에서는 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사건을 언급하면서 모든 것이 쌍을 이뤄 타게 되어 있는 방주에 선(善)이 짝이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게 악(惡)이었다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둘이 짝을 이뤄 방주를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이 있는 곳에 항상 악이 따라 다니는 거라고 이 책은 전한다. 성서에는 없는 얘기이나 흥미롭다.
[맨하탄의 야경은 바다를 보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센트럴 파크와 도시 경관을 보려면 라커펠러 센터 꼭대기인 탑 오브 더 락에서 봐야 한다고 한다. 2년전 뉴욕 탑 오브 더 락에서 찍은 맨하탄 야경. 시간대별로 서서히 건물마다 불을 밝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으나 고층빌딩군이 밀집한 모습이 뉴욕을 대표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휘트먼은 이 곳의 빌딩군들을 '날렵한 철제식물들' 이라고 표현했으나 렘 쿨하스의 말을 떠올리자니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가 빡빡한 일상을 의미하며 발 디딜 틈없이 들어찬 빌딩은 그런 점을 드러내 주는 것만 같다. 놀란 감독의 아캄 정신병원이 고담시 중심에 위치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다]
양면성에 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일단 배트맨의 공간적 배경으로 에둘러서 가보자.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 뉴욕이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인 고담시의 모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래된 문학작품에서는 뉴욕시를 고담시로 묘사했다고도 하고, 'DC 유니버스'라고 명명된 히어로들의 세계에 이곳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여기서 'DC 유니버스' 란 배트맨 시리즈를 펴낸 DC코믹스를 말한다. 마블 코믹스와 대립되는 DC 코믹스는 꽤 괜찮은 수퍼히어로 캐릭터들을 보유하고 있고 마블이나 DC는 자사의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설명한 백과사전을 펴냈을 정도다. 국내 대형서점에 가면 가끔 볼 수 있다. 값이 비싸서 아직 안 팔린 것 같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이르러서야 고담시=뉴욕이라는 공식은 깨지는데, 그가 와 에서 촬영장소로 택한 곳은 바람의 도시 시카고다. 비록 시카고라 할지라도 여전히 고담시와 뉴욕시가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놀란 감독은 그 유명한 아캄 정신병원을 에서는 고담시의 중심부에 놓기까지 했으니. 배트맨의 주요 정적들은 모두 다 이 곳에 수감된다. 에서는 배트맨이 조커에게 하는 말이나 나중에 투페이스가 되는 검사 하비 덴트의 대사를 통해 잠깐 언급되지만, 감옥에 가지 않고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악당들은 그 전력을 보자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악당이 된 것이니 약간의 연민마저 일기도 한다. 뉴욕의 중심인 맨하탄을 건축가 렘 쿨하스는 정신분열증적이라는 말을 써가며 묘사했더랬다. 코믹스와 영화 속 도시인 고담시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고담시의 정신병원이 놀란이 그려낸 세계에서는 그 중심부에 위치하니 렘 쿨하스가 뉴욕에 대해 한 말이 겹쳐 보인다. 게다가 악당들이 수감되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니! 이것이야말로 배트맨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코믹스의 세계에서는 배트맨도 이 곳에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한다. 식으로 말하면 악당들은 모종의 계기로 어두운 포스에 잠식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스 베이더가 처음에는 어땠는지 스타워즈 시리즈를 본 관객이라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퍼맨의 어린 시절을 다룬 TV 시리즈 에서 나중에 그의 숙적이 되는 렉스는 악인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 서서히 악에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커는 아캄 정신병원에 미친 척하고 일부러 수감되는데 그를 상담하던 의사는 그의 과거를 듣고 연민을 갖는다. 조커는 이를 이용해 아캄을 탈출하고 상담의는 조커의 애인인 할리 퀸으로 재탄생한다]
2. 양면성과 정의
알란 무어가 쓴 그래픽 노블 를 샀다. 처음에 서점에서 봤을 때보다 값이 많이 내렸다. 요즈음 배트맨에 빠져서 이 시리즈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래픽 노블의 세계를 알고자 간간이 잘 알려진 작품 위주로 사 모으고 있다. 알란 무어는 미국에서는 내년 3월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등의 원작을 쓴 작가다. 팀 버튼은 (1989)를 제작했을 때 이 그래픽 노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직접 이 그래픽 노블에 대한 찬사도 바친 바 있다. 표지 그림은 사악한 조커의 악행을 보여주기에 딱 알맞지만 조커의 악행과 그의 과거가 교차되어 나오는 부분에서는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수퍼히어로물들 중에 배트맨은 비교적 정형이 없는 편이라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모양이다. DC 코믹스 측에서 자사 수퍼히어로들의 얘기를 현대에 맞게 쓰고자 한 것이 배트맨과 수퍼맨의 대결(), 수퍼히어로들의 연합과 반목(), 은퇴한 배트맨의 복귀(), 배트맨의 초년기( 등과 배트맨 정적들의 집합소(?)() 등의 얘기로 가지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많은 작가들과 영화가 그린 조커의 전사(前史)는 그를 절대 악인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데, 그건 배트맨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의 수호자이지만 그도 때로는 사적인 일을 개입시키며 뒤에서 밝히겠지만 그의 힘은 그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캄 정신병원과 배트맨의 정적들.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적은 조커란다. 포이즌 아이비, 투페이스, 조커, 할리 퀸, 허수아비, 리들러 등이 보인다]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이 아닌 사적인 복수를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원래 정의라는 개념이 사적인 복수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가 행하는 건 원초적(?) 정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퍼히어로들의 활약이나 만화 차원을 넘어 철학으로 비약한 그래픽 노블을 쭉 늘어놓고 자경주의 등에 대해 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법을 초월해서 활약하는 건 정당한지에 대해서부터 밝혀야 한다. 사실, 자경주의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법을 신뢰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집단(혹은 자기 자신)의 정의를 독자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법 제도에 대한 강력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배트맨도 고든 경감을 도와 활약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쓰러져 가는 고담시에서 희망이 있다고 믿지만,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기능도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놀란 감독의 시리즈에서는 초법적 존재로 군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경주의에 논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자경주의를 검색하다가 보니 목록에 어릴 때 재밌게 봤던 조차 여기에 포함된다니 말이다. 많은 수퍼히어로들이 자경주의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수퍼맨만은 예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농담같지만 정의를 수호하느라 사유재나 공공재 등을 어쩔 수 없이 부수는 건 배트맨이나 수퍼맨이나 똑같지 않나. 수퍼맨의 행적이 예수와 등치되기 때문에 그런 굴레를 벗겨준 건가. 배트맨도 망토 두른 십자군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알란 무어의 과 . 자경주의의 대표작들이다. 이외에 자경주의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웬만한 수퍼히어로물들은 다 이 범주에 들어가며 수퍼맨과 스파이더맨은 예외에 속한다]
3. 서양과 동양, 그리고 박쥐인간
배트맨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박쥐인간이 된다. 박쥐는 원래 밤쥐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데, 어원을 따지니 배트맨이 왜 '다크 나이트' 인지를 알겠다. 조류와 포유류 사이에 낀 이 동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정신적 미성숙을 상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무언가 결핍된 존재다. 라캉이 인간은 결핍된 존재라고 말했다지만 어릴 적에 부모가 살해당하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 이후에 10년 넘게 각지를 떠돌며 방황한 그는 낮에는 고담시의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으로 밤에는 배트맨으로 활약하지만, 낮에 보여주는 모습은 알아주는 플레이 보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떠나서라도 스크린에 옮겨진 배트맨 시리즈 중 제대로 된 로맨스는 늘 그의 양면성-여기서는 선악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가면쓴 수퍼히어로의 존재로서의 양면성- 덕에 꽃도 펴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포이즌 아이비와 캣우먼 등과의 로맨스는 스릴있지만 바람둥이의 면모는 영화에서 그리 많이 부각되지 않은 것도 같다. 애정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어서 그가 플레이보이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은 건 충실한 하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같기도 한 알프레도가 있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요,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을 끝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로 만든다. 그러니 천하의 배트맨이라도 이런 면에서는 결핍된 존재라는 것이고 박쥐의 상징성과 그의 이미지는 잘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악마를 상징한다고 해서 기독교에서 배척당하기도 했던 배트맨의 심볼. 그런데 웬걸, 동양에서는 오복을 상징하니.....]
또한, 박쥐는 죽음과 공포 혹은 악마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브루스 웨인이 부모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기 보다 오히려 거기서 오는 공포로 자신을 포장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죽음의 전조나 지옥의 힘으로 풀이되는 날개는 어떠한가. 그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그리했다면 당장 체포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의 가면 덕에 그는 그러한 행위를 용납 받는다. 에서는 그의 행동이 시민들에 의해 용인된다기 보다 고든 경감이 봐줘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의 망토가 날개에 해당하니 이를 자신이 늘 달고 살아야 하는 공포를 악당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달리 해석하면 그가 정의라는 사명 아래 휘두르는 폭력은 그의 어두운 면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4. 덧붙이는 말, 혹은 사족
서양에서 박쥐가 갖는 상징으로 배트맨의 속성을 해석하자면 이렇게 되지만 동양에서는 전혀 다르다. 동양에서 박쥐는 편복(蝙蝠)이라고 하며, 여기서의 '복' 이 '복(福)' 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고 보니 곽부성과 구숙정이 나왔던 이라는 영화에서 구숙정의 이복오빠(?)로 나왔던 캐릭터가 편복공자였는데 박쥐처럼 차려입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동양에서는-주로 중화권, 도상의 해석은 우리도 중국 것을 따라간다- 박쥐가 오복을 상징하는 존재란다. 서양에서도 박쥐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로, 생식력(?) 강한 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날 수 있다는 게 왜 생식력으로 연결되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여성을 상징한다는 건 종종 오래 살아서 교활한 80세 노파로 묘사되기도 한다는 것과 연계되지만 배트맨을 도상학적으로 풀이할 때 이 부분은 빼는 게 좋을 것 같다.
[90년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꼽히는 배트맨 TV시리즈.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5. 글맺음과 정리되지 않은 얘기들.
배트맨의 공간은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주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놀란 감독이 영화 속에서 창조한 고담시에서의 아캄의 위치, 그리고 배트맨이 어떤 변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혹독한 수련을 거쳐 탄생한 수퍼히어로라는 점에서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수퍼맨의 경우라면 인간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겠지만 배트맨의 고민은 내적인 면에 있다. 그의 정의 구현은 트라우마를 출발점 삼아 이루어진 것이고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적에게 전가 시킨다. 에서 조커를 심문하는 배트맨 모습은 복수의 화신이지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법 위에 놓여 있다. 여전히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고민케 하는 건 카오스 자체인 조커다. 정적이 존재하는 한 그는 계속 그런 고민을 해야 하며 폭력의 강도가 더해 갈 때마다 그의 어두운 면 또한 강해진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에서는 악당일지라도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배트맨의 면모가 보이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조커를 닮아간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며 정신적 갈등을 겪는 그의 모습은 프랭크 밀러의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나의 미국인 친구가 해준 말이다. 50대의 은퇴한 배트맨을 다룬 프랭크 밀러의 작품에서 그런 고민이 지속된다면 수퍼히어로서의 배트맨은 여전히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의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새로운 배트맨의 연대기를 쓰고 있는데 3부작으로 완결될 그의 시리즈는 결국은 자경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그의 정적은 존재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배트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 도 그런 면이 보이지만 곱씹어 보면 이런 문제는 에서나 이번 작품에서나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국은 적이 없으면 배트맨도 없다는 게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