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를 주무르는 FRB는 미국정부기관이 아니다

이강율200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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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경제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부실로 인한 유동성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뉴스를 통해 미국정부가 부실금융자산을 인수하기 위한 구제금융법안을 곧 통과시킬 것이란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FRB(연방지급준비제도이사회)라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된다. 우리는 FRB가 막강선진국의 화폐인 달러의 통화량을 조정하고 금리를 좌우하는 정부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FRB가 미국 정부기관이 아닌 몇몇 개인들이 조정하는 일반회사라면 어떨까? 세계경제의 기축통화량이 몇 사람의 개인들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다는 것은 뒤바꿔 말하자면 세계경제가 몇 사람의 개인 손아귀에 놀아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소름끼치는 상상마저 들지 않는가? 다음의 글은 그것이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실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이다. [옮긴 이]

기축통화(Basic Currency)란?

 

금본위제도하에서는 금과교환성이 보장되고 타국통화의 평가지표가 되고 대외준비자산으로 보유될수있는 통화를 기축통화라고 한다. 그러나 금본위제도가 실시되지 있지않는 현재에 와서는 그개념이 변경되어 금과함께 해외준비자산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통화를 가르킨다.

 

1880~1914년까지는 영국파운드화,1918~1939년까지는 영국파운드와 함께 미국달러가 기축통화의 역활을 하였고 1944년 이후부터 미국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역활을 하고있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수지적자가 누적되면서 미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활이 약화되어가고 있으며 현재 SDR(국제준비통화-대내외은행간지급수단측정환율),유러화의 지위가 강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와 경제 좌지우지하는 금권 통치기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은행의 기능

 

은행이라는 사업의 기본 원칙은 은행에 예금한 고객의 돈을 다른 상대에게 더욱 높은 이자를 받고 융자해 주며, 예금했던 고객이 돈을 찾겠다고 할 때에는 미리 약속했던 이자를 계산해 돌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은행은 여기서 발생한 차액을 이익으로 갖는 것이다.

 

이처럼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인 은행은 고객이 예금한 돈을 그대로 은행 금고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객에게 빌려주므로, 은행에는 입금된 돈의 일부만 남아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는 입금한 총액의 약 20퍼센트 정도만 현찰로 예치해 두면 고객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돈을 찾는 일은 없으니 안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머지 80퍼센트는 높은 이자로 대출하거나 사업에 투자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해 은행을 망하게 하는 것도 그만큼 쉽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어느 은행이 투자한 돈을 손해봤다거나 돌려받지 못해 곧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속사정을 모르는 고객들은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들어 자기 돈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럴 때 아무리 정상적인 상황의 은행이라도 그 돈을 전부 돌려줄 수 없으니 결국 망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영어로 '런(Run)'이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란 묘해서, 한 은행에서 런이 생기면 비록 다른 은행에 예치한 돈이라도 불안한 마음에 예금한 돈을 인출하려 한다. 그래서 급기야 전국적으로 뱅크 런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은행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갑자기 너무 많은 고객들이 돈을 찾아갈 때에는 당연히 은행이 융자해 준 고객에게 돈을 상황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 언제든지 당장 갚을 수 있는 돈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돈을 빌려갈 때 저당 잡힌 자산을 헐값에라도 팔게 된다.

 

자산을 처분하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물건값은 더욱 떨어지게 되며,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이를 계획하고 있는 은행이나 금융가들은 이렇게 물건값이 떨어졌을 때 몽땅 사들였다가 다시 경제 상황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되팔아 엄청난 차액을 챙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은행들은 개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보다 여러 은행이 단합하여 운영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론을 펼치면서 중앙 은행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강력히 로비를 벌인 무리가 고의적, 상습적으로 런을 만들어 경제 공황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부분이므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한다.

 

 

1907년 미국 경제공황

 

1902년 T.루스벨트 대통령은 너무 빠르게 거대해지는 J.P.모건의 경제 독점을 견제하고자 1890년에 제정되었던 셔먼독점금지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금융가들의 힘을 약화시키지는 못하고 다만 다양화시켰을 뿐이다. 예를 들면, 스탠더드 오일 사의 시장 독점을 막으려 했으나, 존D.록펠러 혼자 7개의 석유회사를 소유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T.루스벨트가 재선된 다음해인 1907년 J.P.모건과 M.A.로스차일드는 미국에 중앙은행을 재설립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무렵 J.P.모건이 몇 달 동안 유럽에 머물며 런던과 파리의 두 로스차일드 가문을 번갈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J.P.모건 연구자들은 이때 그가 미국에서 일으킬 경제공황을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J.P.모건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뉴욕에 있는 니커보커(Knickerbocker) 은행이 넘어가게 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소위 부분지준은 제도 원칙에 따라 소규모 은행들 대부분이 과다하게 대출을 한 나머지, 심한 경우에는 지급준비금 1퍼센트도 안되는 자금을 보유한 실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객에게 100달러를 빌려준 은행이 실제로 갖고 있는 돈은 1달러도 안 되었다는 얘기다.

부분지준은 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 System)이란?

 

부분지준은 제도란 '부분지급준비금 보유 은행 제도'의 약자로서 은행이 실제로 갖고 있는 돈의 10배 이상을 고객에게 대출해주고 이자를 챙기는 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은행이 10퍼센트의 지급준비금을 갖고 있다고 할 때 이는 은행 자체의 자본금과 고객이 저금해 놓은 돈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따라서 어느 은행이 총 100만 달러를 융자해 주기 위해 실제로는 10만 달러만 갖고 있으면 족하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90만 달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돈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은행이 90만 달러의 위조 화폐를 발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세계에서는 정부의 허락하에 이러한 금융 제도를 엄연히 합법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은행이 누군가에게 8퍼센트의 이자로 돈을 빌려준다면 실제로는 80퍼센트의 수익을 올리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은행에서 돈을 꾼 사람이 1년 후에 일시불로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을 경우를 계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돈을 빌린 사람이 그 다음 달부터 매달 얼마씩 갚아나갈 테고, 은행은 또 이 돈의 10배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것이다. 그러니 은행업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기는 사업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어느 도시를 가나 제일 좋은 빌딩은 은행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1988년, 국제결제은행인 BIS는 자신들과 연계된 세계의 모든 은행에게 1992년까지 8퍼센트 이상의 지급준비금을 갖추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런데 일본이나 한국의 은행들은 전체 대출금의 10분의 1도 채 안되는 8퍼센트마저 마련하지 못해 쩔쩔맸던 것이다.

 

중세의 카톨릭교에서는 이러한 환전꾼들의 악행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회법인 '캐논 법률'에 이자놀이를 불법으로 명시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돈이라는 것은 사회의 공공이익과 상거래의 상품 교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카톨릭 측에서는 이자가 사용자에게 불공평한 의무를 부담시키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카톨릭이 세력을 잡고 있던 중세에는 돈을 빌려주는 데 소요되는 비용만 사용자가 부담하도록 허용되었다. 이러한 법률은 비단 카톨릭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다. 이렇게 볼 때 부분지준은 제도는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간 고객이 사회에 유통되는 돈을 긁어모아 은행에 바쳐야 하는 것으로, 사기성이 농후한 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 일반 대중을 가난하게 만드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남의 돈으로 부를 챙기는 매우 부도덕한 상행위인 셈이다.

 

한편 중세의 금거래상들은 이미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때때로 넘쳐나게 또는 부족하게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금거래상들은 돈을 많이 만들어 쉽게 빌려쓰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상업 행위를 활발히 하게끔 했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는 갑자가 돈을 거두어들이고 융자받기 어렵게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시중에 돈이 귀해지면 융자를 받은 이들은 장사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만큼 빚진 돈을 갚기도 어려워지므로 돈을 빌려준 금거래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금거래상은 약속 불이행을 문제 삼아 상대의 담보물을 헐값으로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일 은행에서 돈을 빌려썼다가 제때에 갚지 못할 경우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융자를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결국은 애당초 돈을 빌릴 때 담보로 잡은 부동산 등을 헐값으로 팔거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은행은 많은 이익을 챙기게 되고, 재산을 빼앗겨 가난해진 사람들은 차츰 늘어나게 되며, 공장의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고 실업자 수는 증가하게 된다. 돈이 귀하니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도 어려워진다. 이러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면 모든 물가는 내려가게 마련이어서, 돈 있는 사람들은 원래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부동산이나 동산을 사들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현상을 '경기순환'이라 부르며 의레 일어나는 일쯤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일들은 돈을 찍는 사람들이 임의로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플레와 디플레이고,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면 경제공황이 일어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소위 금융가라고 불리우는 환전꾼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곤 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로마의 시저나 영국의 헨리 1세는 환전꾼들로부터 돈을 조작하는 권리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런 실정에서 J.P.모건의 이야기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는데, 특히 J.P.모건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에는 일반인이 잘 모르는 어떤 숨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 은행에 예금을 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돈을 찾는 바람에 '런'이 시작되었고, 니커보커 은행의 런은 곧이어 전국 은행으로 번져나가 1907년의 경제공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J.P.모건은 곧 여론을 조작했다. 언론계, 학계, 정계, 경제계 인사들로 하여금 시중의 일반 은행들은 너무 불안하니 반드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이론을 주장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고는 공황을 일으킨 주범인 J.P.모건이 혜성처럼 나타나, 당시 돈으로 2억 달러를 찍어내 은행들을 도와주었다. 그가 발행한 2억 달러란 금액은 물론 금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종이 돈이었을 뿐이며, 이러한 일은 불법행위였다. 그러나 의회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다만 경제가 회복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J.P.모건은 그 돈으로 위급한 처지에 있는 작은 은행들을 지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자기 은행의 지점으로 돌려 이자를 받고, 융자도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중에는 다시 돈이 돌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현금을 집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돈을 융통시켰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몇 개의 거대 은행이 차압된 부동산 등을 거둬들이고 망해가는 은행들을 인수한 끝에 결국 미국의 금융은 몇 사람이 소유하는 체제로 재정비되었던 것이다.

 

다음해에는 경제 상황이 나아졌고, J.P.모건은 영웅이 되었다. 그 다음 단계는 1907년 당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있던 우드로 윌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윌슨은 소수 인사들이 J.P.모건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융가들의 공작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공황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J.P.모건 같은 사람 6~7명 정도로 위원회를 구성하면 쉽게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이 말은 공황을 일으킨 장본인인 J.P.모건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기라는 의미로,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더욱 강력한 중앙은행을 만들어 월스트리트 은행들의 만행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도 지배적이었다.

 

결국 의회의 입장은 강력한 중앙 통제 노력이 1907년의 공황과 비슷한 상황을 초래했다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국민들은 독립전쟁, 1812년의 전쟁, 잭슨 대통령과 미국 제2은행의 전투, 남북전쟁, 1873년-1893년-1907년의 공황 등 오랫동안 투쟁을 하다 지쳐버려 이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식으로 문제를 일으킨 장보인에게 해결을 의뢰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중앙은행의 재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대해 찰스 린드버그 하원의원은 1907년 공황은 '계획에 의한 공작'이었다고 하면서, 1863년 의회가 은행법을 제정한 이후로 금융가들은 경제의 부흥과 공황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들의 목적은 일반 대중의 자산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결론적으로 은행법이 아주 불안정하여 중앙은행을 창설하여 통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지금도 경제학 교과서에는 '연방지급준비제도'가 1907년 경제공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만들어졌으며, 다시는 공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름만 공공기관 성격을 띤 미국 연준은

 

1907년 공황을 맞게 된 미국 의회는 은행의 모든 문제를 조사하고 좋은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라는 특별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모두 J.P.모건 일파로 구성되었다. 우선 위원장으로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선출했는데, 그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 가문의 대표자였다. 올드리치의 딸이 존 D.록펠러 주니어와 결혼함으로써 그는 록펠러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딸은 5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중 둘째 아들인 넬슨은 1974년에 부통령이 되었고, 다섯째 아들인 데이비드는 사실상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문제협의회인 CFR의 회장과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회장을 역임했다.

 

여하튼 국가화폐위원회가 조직되자마자, 올드리치는 2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은행을 견학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 비용만도 자그마치 30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그가 유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1910년 11월 22일, 당시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재력가 7명이 특별열차에 올라 조지아 주 제킬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열차는 올드리치의 전용 기차였고, 그들이 묵은 제킬아일랜드의 '헌트 클럽'이란 대저택의 소유주는 J.P.모건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비롯, 앤드루 재무장관, 쿤롭 계열인 뉴욕의 내셔널 시티은행의 밴덜립, 쿤롭사의 동업자 와벅, J.P.모건의 동업자 데이비슨, 모건 계열인 뉴욕 퍼스트 내셔널 시티은행의 노턴, 역시 모건 계열인 뱅커스 트러스트사의 스트롱 등이었다.

 

그들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번 일은 절대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하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식당차에 갈 때도 2~3명씩 짝을 지어 움직였으며, 같이 식사하는 상대 외에는 서로 모르는 척 했다. 이처럼 극비리에 그들이 헌트 클럽에 모여 한 일은 연방지급준비제도, 즉 미국 중앙은행법에 해당하는 법을 헌법에 삽입하기 위한 법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 법안의 주요 골자는 새로 탄생할 중앙은행이 앞서 만들어졌던 사설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미국 화폐의 독점발행권을 차지하여, 금의 뒷받침 없이 신용을 근거로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참석자 중의 하나였던 밴덜립이 후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토함으로써 외부에 알려졌다. 그는 1935년 2월 9일자 신문에서 '퍼스트 네임 클럽'이라는 제목하에 "나는 여느 음모가와 마찬가지로... 마치 도주하는 범법자처럼 참으로 비밀스럽게... 우리의 결사가 발견된다는 것은 모든 노력과 시간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했다. 참석자들의 신분이 노출되고 우리가 모여 기안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법안은 절대로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참석자들 중에 은행가가 아닌 사람은 올드리치뿐이었는데, 1881년 당시 5만 달러였던 그의 자산이 1911년에 3000만 달러로 불어난 것은 당시 함께 했던 은행가들의 덕을 톡톡히 본 때문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국민들이나 다른 국회의원들 몰래 행동한 이유는 물론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회에 상정할 의안을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들이 작성한다는 것 자체도 상식 밖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회합의 참석자들은 모두 J.P.모건이 주동한 1907년 경제공황에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드이었던 것이다.

 

그 모임의 주요 안건 중 하나는 그들 소유의 중앙은행을 창설하는 데 장애가 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였고, 또 하나는 대형 은행들의 시장점유율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어떻게 반전시킬 수 있을까였다. 다음으로 제킬아일랜드 회합에서 다루어진 주요 안건은 새로운 중앙은행에 대한 대중의 인식 문제였다. 그리하여 금융가들은 중앙은행이란 이름 대신 연방지급준비은행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마치 연방정부의 기관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국을 12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서 전체의 연준은을 대표할 회장 1명을 선출하여 그에게 관리 책임을 맡겼다. 그 조직은 여느 회사처럼 주식을 갖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며, 금융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전 미국의 경제력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로 하여금 외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추겨 정부에 돈을 융자해 주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탄생한 연준은이 미국 정부의 기관인 줄 알고 있다. 미국 도서관에 가서 미국 워싱턴 D.C.의 전화번호부를 확인해 보라. 그러면 정부기관이 나열된 파란 페이지 쪽이 아닌, 일반 회사나 개인 이름이 실려 있는 흰 페이지 쪽에 택배회사인 '페데랄 익스프레스(Federal Express)' 아래 'Federal Reserve Bank(또는 Board)'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국 정부가 미국 돈을 발행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돈에 재무 장관의 서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는 다만 정부가 인가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제킬아일랜드 밀회에서 중앙은행의 이름을 결정한 뒤, 올드리치는 의회에 제출하는 법안 이름에 '은행'이란 단어 자체를 사용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와벅은 그 법안을 '국가지급준비금법안(National Reserve Bill)' 또는 '연방지급준비금법안(Federal Reserve Bill)'이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이 모든 이유는 그 법안이 은행의 '런'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위해서였고, 몇몇 개인이 연준은을 독점한다는 느낌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준은이 정부의 소관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해 그 은행의 이사진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은행가들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천하는 사람을 지명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은 그들로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은행가들은 돈으로 정치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고, 만약 대통령이 그들의 마음에 안드는 인물을 지명하면 대통령을 교체할 정도로 그들의 금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대통령이 그들이 원치 않는 사람을 이사로 임명한다 해도 중앙은행 운영에 영향을 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즉 워싱턴 본점에 7명의 이사가 있었고, 보스턴-필라델피아-뉴욕-클리블랜드-리치먼드-애틀랜타-시카고-세인트루이스-미니애폴리스-캔사스시티-댈러스-샌프란시스코 등 12곳에 지역 연준은이 있었다. 중앙의 이사 7명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임기는 14년이었다. 그리고 일단 임명된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도 해고시킬 수 없고, 그들의 임명 시기는 2년씩 격차를 두었으며 매 2년마다 새로운 이사를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간혹 색깔이 다른 사람이 이사가 되어도 전체의 합의 사항을 결정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976년,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지미 카터는 D.록펠러의 마음에 들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카터 대통령은 1980년대에 들어 볼커(Paul Volker)를 연준은 총재로 임명했는데, 볼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임명하라는 금융가들의 지시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카터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선거유세 동안 내내 자신이 당선되면 볼커를 해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당선된 뒤에도 볼커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는 대통령이 마음대로 연준은 총재를 갈아치울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볼커는 CFR, 빌더버그 그룹, 삼변회 등의 주요 멤버였다. 레이건은 혹시 그런 사실을 잘 몰랐거나 대통령의 권한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제킬아일랜드 밀회에서는 마지막으로 기안이 완료된 법안을 어떻게 의회에 상정시키느냐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명예욕이 많은 올드리치가 그 법안에 자기 이름을 붙이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올드리치안(Aldrich Bill)'으로 상정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9일 동안의 회동을 마치고 해산했다.

 

 

출처: 세계 경제를 조정하는 '그림자 정부' 경제편 中에서

 

그림자정부(경제편)-3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