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라킨 (Ryan Larkin)

류영주2008.10.05
조회1,324
라이언 라킨 (Ryan Larkin)

 

  그는 한때 가장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재능과 최고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만큼의 압박과 절망감 속에 그는 연필과 종이 대신 코카인과 알코올이라는 도피처를 찾았고 끝내 거리의 걸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이름은 '라이언 라킨'. 지난 1~2년간 안시와 아카데미 등 각종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휩쓸며 애니메이션의 미래로 각광받았던 크리스 렌드레스의 단편 은 바로 이 잊혀진 천재의 불우한 삶을 다룬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과 함께 '라이언 라킨'의 범상치 않았던 젊은 날의 재능과 이름 역시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몇 년 전 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크리스 랜드레스'가 '라이언 라킨'을 처음 만났을 때, 그저 거리의 부랑자 정도로 여겼던 것처럼 사실 우리에게도 '라이언 라킨'은 그다지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194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라킨'은 20대 초반인 1960년대 초반 캐나다 애니메이션의 대부 '노먼 맥클라렌'에게 발탁돼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의 일원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던 인물이었다. '맥클라렌'으로부터 "NFB의 가장 영민한 새로운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그는 애니메이션사에 길이 남을 몇 편의 대표작들을 남기며 1970년대 캐나다를 넘어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가장 새로운 재능으로 각광받았다. 당연히(?) NBFC가 추축이 돼 최근 캐나다와 미국에서 발매된 DVD에는 '크리스 랜드레스'의 단편 은 물론 그의 모델이 된 불우한 천재 '라킨'의 재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 3편을 함께 담고 있다.

  그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1965년작 은 지금 봐도 신선한 충격이다. 아카데미 후보로도 올랐던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사의 한 장을 기록할 만하다. 5분이 조금 넘는 짧은 상영 시간 동안 작품은 제목 그대로 오로지 순수하게 '걷는' 이미지와 인간의 움직임만을 담는다. '라킨' 자신의 움직임을 그린 셀프 드로잉에서 출발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거리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인간의 다양한 움직임과 걷는 모습들을 종이 위에 고스란히 재현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신체의 움직임, 지극히 자연스럽고 유연한 인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이 작품은 종종 실사를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로토스코핑'으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라킨' 스스로 직접 종이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그리고 또 그려 만들어낸 100% 수작업의 결과다.
  인간의 움직임을 계산해내는 그의 솜씨는 너무도 정교해서 마치 수학처럼 보일 정도였다. DVD에 수록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중 '라킨' 스스로 어느 순간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더 이상 머리 속에서 수학을 할 수가 없어서"라고 대답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지금 봐도 놀라운 시각적인 충격과 자극으로 가득한 은 라킨을 1970년대 가장 주목받는 애니메이터로 부각시켰지만 그의 재능을 감지케 한 작품은 1964년 작 이었다. 이 작품은 드로잉에 있어 천재적이었던 '라킨'의 재능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와 드비시의 '플루트 솔로를 위한 시링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작품은 목신(牧神), 판을 피해 달아나다 갈대로 변해버린 아름다운 님프 '시링스'의 모습을 담은 신화의 세계를 종이 위에 환상적으로 재현한다. '드비시'의 낭만적인 음악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들. 종이 위해 목탄을 이용해 한 장 한 장 그린 뛰어난 드로잉과 천천히 중첩되는 이미지의 디졸브를 통해 감독은 마치 한 편의 꿈과도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
  1972년 작인 은 인간 혹은 사물들의 움직임 자체에 대한 순수한 매료, 그리고 음악과 이미지의 완벽한 조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거리의 뮤지션들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실제 그들의 음악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라킨은 에스키모의 전통 미술에서부터 인상파, 팝아트, 수채화 등 다양한 미술적 기법을 총동원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다양한 사물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음악과 이미지의 완벽한 조화 속에 그는 추상적이며 초현실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꿈을 꾸듯 몽환적인 이 영화는 라킨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예술가로서 절정에 섰던 그는 이후 종이 대신 코카인과 알코올을 선택했다. 쇠락하고 늙은 거리의 노인, 처음 '크리스 랜드레스'의 작품 에서 만난 그 초라한 노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DVD와 함께 '크리스 랜드레스'의 단편 에서 시작해 재능과 희망으로 빛나던 젊은 날의 '라킨'을 만나는 여정은 잊혀졌던 천재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전해준다. 넘치는 재능과 그만큼의 두려움 속에 스스로 쇠락의 길을 찾아간 예술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 DVD에는 한 잊혀진 천재의 재능과 절망, 환희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