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이서원200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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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영국 디자인에 녹아 있는 보수와 현실

영국의 디자인 잡지 <크리에이티브 리뷰>는 영국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90% 이상이 5명 이하의 인원으로 운영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가 빅 클라이언트도 곧잘 얻는다는 사실이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소규모 스튜디오는 큰 프로젝트를 맡아서 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런 이유로 영국이 디자인 혁신의 나라, 크리에이티브의 수도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차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영국의 디자인계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등 공신, 규모는 작아도 블록버스터급으로 활약하는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버티고 있다.

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독립성으로 무장한 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방문은 거의 대부분 리버풀 역에서 시작되었다. 일단 리버풀 역에서 내린 다음 지도를 보면서 걸어가거나 좀 멀다 싶으면 효율을 생각해 블랙캡을 탔다.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런던 동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런던 역시 비싼 월세로 악명 높은 곳이라 디자인 스튜디오들은 소호부터 올드 스트리트, 클라큰웰, 쇼디치, 달스톤, 해크니 등으로 옮겨 갔다. 특히 요즘 뜨고 있는 해크니는 본래 런던의 골칫거리이자 최고의 빈민가였으나, 값싼 월세로 많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들로 인해 예술과 디자인의 메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현재 많은 디자인 회사들이 주로 쇼디치에 몰려 있으며, 와이낫어소시에이츠 같은 대규모 회사들은 아직까지 클라큰웰에 버티고 있는 중이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 비싼 월세와 오래된 건물 탓인지 대부분의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명성에 비해 가난해 보일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작업을 선보이는 일련의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많아야 3명을 넘지 않는 절대적으로 작은 스튜디오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영국에서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가 발달한 데는 일찍부터 외부의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로부터 크리에이티브를 수혈받는 영국 특유의 디자인 발달 과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협업의 전통으로 인해 규모에 대한 선입견 없이 빅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다. 최소한 규모가 작다고 클라이언트에게 무시당하거나 대출을 못 받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항상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영국 디자이너들의 성향도 한몫했다. 영국의 디자인 평론가 릭 포이너는 이러한 기질에 대해 “한마디로 영국의 디자인 문화 자체가 항상 독립성을 유지하길 원했다”고 말했는데, 항상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이너가 되라고 가르치는 영국의 디자인 교육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부러 몸집을 작게 유지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고 싶어서 스튜디오를 굳이 늘리지 않는다고 답했다. 소규모 스튜디오의 장점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규모가 작으면 둔중한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공장’식으로 디자인을 찍어내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고, 심지어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쉴 수도 있다. 규모가 작으면 창조적인 접근에서 시도한 변화가 금방 가시화되며, 교감 역시 빠른 속도로 이뤄진다. 쓸데없는 회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니저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모두 손을 대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적인 기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스튜디오를 지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매니저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독립성과 에고가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단점은 문서 작성부터 영수증 처리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점과, 어떤 클라이언트는 작은 스튜디오와 일하기를 주저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주목되는 것은 문화 산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소규모 스튜디오가 활개를 친다는 점이다. 빅 클라이언트의 일도 하지만 대부분의 포트폴리오가 뮤지엄, 갤러리 같은 문화 단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니까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혁신하는 것보다는 미술관 브로슈어를 혁신하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그늘은 있다. 디자이너 개인의 지명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스튜디오가 빅 클라이언트를 얻는 것은 아니며, 영국 특유의 항상 새롭고 신선한 ‘다음’을 찾아 나서는 경향으로 인해 디자이너들은 ‘소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이 점이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국 디자인계에서는 수많은 루키들이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유행이 다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져버리는 일도 흔하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존경받는 디자이너로 남기가 무척 어렵다는 뜻이다.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대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도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는 디자인계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비타민이자 크리에이티브의 자양분 같은 존재다. 혁신은 대개 이들로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글/ 전은경 기자

치킨 티카 마살라를 닮은 오늘날 영국의 디자인 문화
영국 하면 생각나는 게 많다. 이를테면 언더그라운드라 불리는 지하철, 국회의사당, 이층 버스, 축구, 비틀스, 전설적인 펑크록 밴드 클래시 등. 물론 그런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국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국 하면 인도 음식 ‘치킨 티카 마살라’도 생각난다. 왜 하필 영국에서 머나먼 나라 인도의 음식이 생각날까.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치킨 티카 마살라는 영국 음식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쉽게 그 답을 알 수 있는데,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선보였다고도 하고 영국령 인도 뉴델리에서 개발한 음식이라고도 한다. 어디에서 먼저 선보였든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한’ 음식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돈가스나 카레처럼 말이다. 게다가 오늘날 영국에서 제일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하니, 국가 대표 음식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지 않나? 영국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음식은 ‘피시 앤드 칩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생소한 음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영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치킨 티카 마살라인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도시가 바로 런던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들은 초호화 펜트하우스에서 지낼 때, 어떤 이들은 단칸방에서 대가족과 함께 지내며, 온갖 인종이 온갖 언어를 내뿜으며 부대끼는 곳이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오늘날의 런던이다.

디자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느 도시든 마찬가지겠지만, 런던의 디자인은 딱히 특정한 스타일이나 유행과 연관 짓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래픽,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제품, 아이덴티티, 패션, 넓게는 음악과 영화까지 어느 분야를 생각해도 런던 출신 혹은 런던에 거처를 둔 이들이 빠지는 일이 없다. 런던 전역에 있는 크고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런던에는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신화 GTF(Graphic Thought Facility)를 필두로 제임스 고긴의 1인 스튜디오 프랙티스, 논 포맷, 멀티스토리, 이미 디자인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 스핀(Spin) 같은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진을 치고 있다. 물론 대규모 브랜딩 회사인 인터브랜드나 디자인 컨소시엄을 지향하는 펜타그램 같은 곳도 있지만 이들은 이미 지리적 한계를 뚫고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니 굳이 런던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런던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들도 아마 치킨 티카 마살라를 좋아할 것 같다. 더 이상 ‘차를 마시는 신사의 나라, 대영제국’과 같은 구시대적 발상으로 런던을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런던은 이미 전혀 다른 생물체로 진화했다. 다양성,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런던이기 때문이다. 런던은 전 세계에서 모여들어 승부를 가리겠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의 포부가 곧 런던 디자인의 활력소가 된다. 다양성으로 무장하고 강한 의지로 버티는 이들이 모여 런던의 디자인 풍경을 만드는 것이다. 글/ 박경식 디자인 애호가

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영국 디자인에 녹아 있는 보수와 혁신

기본적으로 영국은 속속들이 보수적인 나라라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도대체 옛날 것이 왜 나쁘다는 건가?”라는 말도 자주 한단다. 비싸기로 유명한 블랙캡은 꼭 1950년대 모델인 오스틴이어야 하고 전화 부스는 반드시 빨간색이어야만 한다. 예전에 브리티시 텔레콤이 전화 부스의 색깔을 바꾸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나 영국인의 격렬한 항의로 포기한 일도 있었다. 뭐든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 깊은 보수성 속에서도 모든 전통을 속속들이 깨고자 했던 펑크 같은 저항 정신과 놀라운 진보성이 있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반되는 특성은 속속들이 디자인에 녹아 있다. 변화를 바라는 열망은, 실은 크리에이티브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1960년대 영국 대중문화가 그랬던 것처럼. 흔히 영국 디자인의 힘은 정부의 정책에서 나온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프랙티스의 제임스 고긴은 “그게 만약 정부 정책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원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유명한 작업은 대부분 대처 총리에 대한 반동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녀가 외친 유명한 말 “디자인을 하지 않으면 사퇴하라(Design or Resign)”로 대변되는 강력한 디자인 정책으로 인해 영국이 오늘날 전 세계의 디자인 공장이 되었다고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의외였다. 어떤 디자이너는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디자이너가 벌어들인 돈에 세금을 붙이는 것뿐이라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 디자인 수출을 위해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혁신과 크리에이티브는 미국으로 건너가 산업화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영국은 크리에이티브를 발전시키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본격적인 산업화를 위한 기반은 약한 곳이라는 말도 했다.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영국의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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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 10월호 -

기자/에디터 : 기획 전은경 진행 전은경, 정선주
속표지 그래픽 디자인/ 윤석민 아트디렉터, 인물 일러스트레이션/ 김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