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걷는 말』은 한 소년이 하루 1달러를 벌기 위해 ‘말’로 변해간다는 충격적인 영화다. 이제껏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1987)', ‘천국의 아이들(1997)’과 같은 따뜻한 이란 영화를 접해온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화였다. 반면, 서사 구조가 무척 단순하다거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린 아이들의 단순한 내면세계를 잘 포착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란 영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란 영화는 80년대부터 간결한 이야기 구조, 아름다운 대사와 영상미, 이슬람 세계관 등으로 세계 영화계에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흐말바프 家’ 감독들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들도 배출해 냈다. 특히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부인, 딸, 아들 할 것 없이 모든 가족이 영화를 찍어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영화를 찍기 위해 집을 팔고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등 소신 있고 독특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두 발로 걷는 말』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각본을 쓰고, ‘칠판’으로 칸느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그의 첫째 딸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이 찍은 영화다.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 만든 영화라 기대가 됐다.
영화는 반복의 반복을 거듭한다. 첫 장면과 끝 장면이 동일하기에 의미심장하다. 하루 1달러를 벌 수 있는 일을 할 아이를 구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마치 공장과도 같은 지하 굴속에서 아이들이 우르를 몰려나오고 많은 아이들이 너도나도 그 일을 하고 싶어 안달복달이다. 그 중 정신지체를 가진 키가 크고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 다리가 없는 도련님을 학교까지 업고 데려다준다. 소년은 학교 구석 마구간에서 도련님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같은 장소인지 알 수 없고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어미의 자궁에서 갓 나온 새끼 말이 일어서는 행위를 하고 어미 말은 그런 새끼 말을 핥고 일어설 수 있도록 계속 발로 톡톡 차는 장면이 나온다. 어미 말과 새끼말의 이런 행위는 소년이 본격적으로 말이 되기 전까지 계속 반복된다. 또한 소년의 달리는 모습과 소년이 소리치는 모습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영화는 소년의 뛰는 행위와 절규의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다 결국 처음의 하루 1달러를 버는 일을 할 소년을 구한다는 장면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돈은 있지만 다리가 없는 소년과 다리는 있지만 머리가 없는(정신지체를 가진 소년이므로) 소년의 유대관계와 사회관계의 구조인 것 같다. 둘의 유대는 처음에는 1달러라는 매개체로 시작해서 다리가 없는 주인과 다리가 있는 하인의 관계로 갔다가 결국 하인은 인간도 아닌 말로 변해버린다. 주인공 말이 된 소년인 ‘지아’가 계속 신고 있던 장화를 벗는 행위를 한 것은 그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주인과 반목했을 때와 주인과 화해하고 친구 같은 관계로 목욕을 함께 할 때뿐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계속 장화를 신고 있으며, 심지어 발에 말발굽까지 하게 된다. 돈은 있지만 다리가 없는 소년은 어쩌면 권력은 가지고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기득층을 대변하고 기득권에게 희롱당하는 다리가 있지만 머리가 없는 소년은 일반 국민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사회관계이다. 처음 둘의 관계는 함께 저항하는 사이였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항상 달리기 경주를 하고, 우리나라의 씨름과 비슷한 몸싸움을 벌이던 도련님이 어느 순간 반목하던 아이들과 말(=지아)을 탄다는 명목으로 친해져 지아를 돈을 주면 탈 수 있는 말로 전락시켜 버린다. 결국 지아는 도련님의 친구들에 의해 안장을 차더니, 말발굽을 하고, 마구간에서 소와 함께 풀을 먹고 머리에 말의 탈까지 쓰게 된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지아’가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도련님이 적선하면서 그 소녀도 돈에 의해 집 안으로 끌어 들인다. 결국, 둘의 유대는 돈을 주고받는 상행위를 계기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를 다 보고 허무함과 많은 생각이 겹쳤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궁금해졌고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말이 된 소년 ‘지아’의 끝없는 절규는 감독의 의도였는지 묵음처리로 들리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 말이 된 지아는 말을 하지 못한다. 지아를 말로 만든 도련님 역시 지뢰를 밟아 어머니를 잃고 두 발을 잃은 상실자다. 나중에는 누나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까지 잃는다. 이 모든 상황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감독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아버지의 각본을 보고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왜 이런 각본을 썼냐고 묻자, 고통받는 자신의 현실에서 쓸 수 있는 각본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말이었을까? 영화에서 말은 두 소년을 제외하고 정말 많이 등장한다. 말은 중동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수탈하는 존재인 것 같다. 중간에 새끼 말이 어른들의 경주에서 죽는 모습이 나오는데 일어서려는 새끼 말이 상징하는 것은 ‘지아’일 것이다. 또한 말이 된 ‘지아’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다만, 현재 끝없는 내전으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르카를 쓴 여자들, 버려진 아이들, 전쟁의 고통을 간직한 사람들을 보면서 끝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언제라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두 발로 걷는 말
PIFF초청작 - 두 발로 걷는 말(2008)
비참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담은 영화
『두 발로 걷는 말』은 한 소년이 하루 1달러를 벌기 위해 ‘말’로 변해간다는 충격적인 영화다. 이제껏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1987)', ‘천국의 아이들(1997)’과 같은 따뜻한 이란 영화를 접해온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화였다. 반면, 서사 구조가 무척 단순하다거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린 아이들의 단순한 내면세계를 잘 포착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란 영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란 영화는 80년대부터 간결한 이야기 구조, 아름다운 대사와 영상미, 이슬람 세계관 등으로 세계 영화계에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흐말바프 家’ 감독들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들도 배출해 냈다. 특히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부인, 딸, 아들 할 것 없이 모든 가족이 영화를 찍어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영화를 찍기 위해 집을 팔고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등 소신 있고 독특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두 발로 걷는 말』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각본을 쓰고, ‘칠판’으로 칸느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그의 첫째 딸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이 찍은 영화다.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 만든 영화라 기대가 됐다.
영화는 반복의 반복을 거듭한다. 첫 장면과 끝 장면이 동일하기에 의미심장하다. 하루 1달러를 벌 수 있는 일을 할 아이를 구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마치 공장과도 같은 지하 굴속에서 아이들이 우르를 몰려나오고 많은 아이들이 너도나도 그 일을 하고 싶어 안달복달이다. 그 중 정신지체를 가진 키가 크고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 다리가 없는 도련님을 학교까지 업고 데려다준다. 소년은 학교 구석 마구간에서 도련님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같은 장소인지 알 수 없고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어미의 자궁에서 갓 나온 새끼 말이 일어서는 행위를 하고 어미 말은 그런 새끼 말을 핥고 일어설 수 있도록 계속 발로 톡톡 차는 장면이 나온다. 어미 말과 새끼말의 이런 행위는 소년이 본격적으로 말이 되기 전까지 계속 반복된다. 또한 소년의 달리는 모습과 소년이 소리치는 모습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영화는 소년의 뛰는 행위와 절규의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다 결국 처음의 하루 1달러를 버는 일을 할 소년을 구한다는 장면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돈은 있지만 다리가 없는 소년과 다리는 있지만 머리가 없는(정신지체를 가진 소년이므로) 소년의 유대관계와 사회관계의 구조인 것 같다. 둘의 유대는 처음에는 1달러라는 매개체로 시작해서 다리가 없는 주인과 다리가 있는 하인의 관계로 갔다가 결국 하인은 인간도 아닌 말로 변해버린다. 주인공 말이 된 소년인 ‘지아’가 계속 신고 있던 장화를 벗는 행위를 한 것은 그가 짝사랑하는 소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주인과 반목했을 때와 주인과 화해하고 친구 같은 관계로 목욕을 함께 할 때뿐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계속 장화를 신고 있으며, 심지어 발에 말발굽까지 하게 된다. 돈은 있지만 다리가 없는 소년은 어쩌면 권력은 가지고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기득층을 대변하고 기득권에게 희롱당하는 다리가 있지만 머리가 없는 소년은 일반 국민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사회관계이다. 처음 둘의 관계는 함께 저항하는 사이였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항상 달리기 경주를 하고, 우리나라의 씨름과 비슷한 몸싸움을 벌이던 도련님이 어느 순간 반목하던 아이들과 말(=지아)을 탄다는 명목으로 친해져 지아를 돈을 주면 탈 수 있는 말로 전락시켜 버린다. 결국 지아는 도련님의 친구들에 의해 안장을 차더니, 말발굽을 하고, 마구간에서 소와 함께 풀을 먹고 머리에 말의 탈까지 쓰게 된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지아’가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도련님이 적선하면서 그 소녀도 돈에 의해 집 안으로 끌어 들인다. 결국, 둘의 유대는 돈을 주고받는 상행위를 계기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를 다 보고 허무함과 많은 생각이 겹쳤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궁금해졌고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말이 된 소년 ‘지아’의 끝없는 절규는 감독의 의도였는지 묵음처리로 들리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 말이 된 지아는 말을 하지 못한다. 지아를 말로 만든 도련님 역시 지뢰를 밟아 어머니를 잃고 두 발을 잃은 상실자다. 나중에는 누나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까지 잃는다. 이 모든 상황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감독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아버지의 각본을 보고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왜 이런 각본을 썼냐고 묻자, 고통받는 자신의 현실에서 쓸 수 있는 각본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말이었을까? 영화에서 말은 두 소년을 제외하고 정말 많이 등장한다. 말은 중동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수탈하는 존재인 것 같다. 중간에 새끼 말이 어른들의 경주에서 죽는 모습이 나오는데 일어서려는 새끼 말이 상징하는 것은 ‘지아’일 것이다. 또한 말이 된 ‘지아’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다만, 현재 끝없는 내전으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르카를 쓴 여자들, 버려진 아이들, 전쟁의 고통을 간직한 사람들을 보면서 끝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언제라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