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Moam Collection, Korea) 홈페이지를 미흡하나마 오픈한 후, '문화읽기'라는 게시판을 열었습니다. 연지 약 한달가량 된것 같은데 이제서야 첫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올리는 글도 4년 전 시카고 대학원 시절 썼었던 글을 재편집하여 올리는것 입니다. 앞으로 이 게시판에 올리는 글들은 제가 현재 기획하고 있는 시리즈 간행물을 위한 사전조사와 준비가 될 것 입니다.
로메어 비어든의 예술과 그의 인종적 정체성의 영향 1
오늘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였던 로메어 비어든(Romare Bearden, 1911 -1988)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로메어 비어든은 비록 몇 번의 외면적 형식(기법)상의 변화가 있었지만, 한결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힘든 삶을 동료애(인류애)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혹, 잘못된 부분이나 오타가 눈에 뜨인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비어든의 삶과 예술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Lee, Yong-Su, “The Influence of Ethnic Identity on Romare Bearden’s Works,” Chicag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4)
“Art should be understood and loved by the people.” – Bearden, Opportunity vol. 12 (Dec., 1934), p.372
17세기 초 미국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오게되면서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국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된 지 4세기가 지나가고 있고 지금까지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미술사를 포함한 역사는 미국역사에서 마이너(minor)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미술사내에서는 18c 중반 초상화(Portrait painting)로 유명했고 최초로 기록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였던 Joshua Johnston을 시작으로 이들 예술역사의 서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후로 다양한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Julian Hudson, Robert Duncanson, 그리고 가장 위대한 흑인예술가로 평가되고 있는 Henry Ossawar Tanner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비어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술사에서 뿐 아니라 미국 현대미술사 내에서도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비어든은 1911년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주의 샤를롯(Charlotte, NC)에서 태어났습니다. 샤를롯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던 비어든은 가족들이 북쪽으로 이주를 함에 따라 가족과 함께 미대륙의 동북부 지역인 뉴욕 할렘가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비어든의 예술세계는 그 주제와 사용기법에 따라 크게 현실주의적 만화가(cartoonist), 사회 현실주의적 화가(socio-realistic painter), 종교화가(religious painter), 추상표현주의(abstract e-pressionistic painter), 그리고 입체주의 화가(cubistic painter)의 다섯 시기로 분류 될 수 있습니다.
As a Cartoonist
청년기 보스턴대학(Boston Uiversity)에서 야구선수로 활약을 하던 비어든은 유색인종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의 관심이 변하게 되어 뉴욕대학으로 편입을 하였고 그 곳에서 졸업을 하게 됩니다.(Bachelor of Science) 뉴욕대학 시절과 졸업 후에 비어든은 당시의 미국 사회상을 풍자한 리얼리즘 계열의 만화를 그리며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1933). 이 당시의 작품들로 월간으로 발행되던 뉴욕대학 잡지인 '메들리(The Medley)'에 게재되었던, “Dis Razor Ain’t Been a Bit of Good…, April 1934”, “Shall This Continue to Be the Plight of Colored Labor?, 1937”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당시 미국의 사회상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풍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s a social realistic painter
만화가로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던 비어든은 1937년 사회사실주의적 대표작 중 하나인 “Soup Kitchen, 1937”을 그립니다. 세명의 흑인들이 원근에 따라 캔버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 앞에 끓고 있는 스프가 있고 이 남자는 자신의 그릇에 스프를 막 담으려 하고 있습니다. 뒷면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두 남자들은 자신의 그릇들에 담겨진 수프를 먹고 있고, 그림에 나타나는 세 명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처럼 배경도 매우 무겁고 어둡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당시 할렘가의 노동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비어든은 당시 대공황으로 인한 노동자들 특히 흑인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의 모습을 잘 담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비어든은 “The Visitiation, 1941”, “The Family, c.1941”, “Presage, c.1942” 그리고 “Folk Musicians, 1941 – 1942”과 같은 많은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을 남깁니다. 이중 “Folk Musicians”을 살펴보면, 세 명의 음악인들이 화면에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과장된 코, 입술 그리고 손 등으로 미루어 흑인 재즈 뮤지션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이 그림도 사회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지만 표현형식에 있어서 그의 이전 작품인 “Soup Kitchen”과 구분이 됩니다. “Soup Kitchen”이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Folk Musicians”은 원시주의, 입체주의, 그리고 멕시코 화가들인 Diego Rivera와 Orozco의 영향이 크게 나타납니다. 더 이상 학술적으로 그 영향에 관하여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비어든은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ethnic identity)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As a religious painter who has social realistic eyes – Passion of Christ Series
1942 – 1945년 까지 군복무를 한 후, 비어든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종교적인 시리즈인 “He is Arisen, 1945”, “Christ’s Entry into Jerusalem,1945”, “He Walks on the Water, 1945”, “Golgotha, 1945”, “The Annunciation, 1946” 등을 포함한 “Passion of Christ”를 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비어든은 이 당시 이러한 종교적인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고, 또 왜 특별히 입체주의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이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던 걸까요? 시카고의 한 미술사가는 최근 논문, “Deep Waters: Rebirth, Transcendence and Abstraction in Romare Bearden’s Passion of Christ”에서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적인 혼란(Chaos)에 의하여, 사람들은 다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어든도 마찬가지였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당시 비어든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변화를 지적하며, 이 변화가 비어든이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에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변함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이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어든의 종교적 관심에는 동의를 하지만 단순한 형식적인 변화를 이유로 비어든이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변했다는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글의 제목과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 비어든은 처음부터 자신의 마지막 생애까지 자신의 인종적 동료애로써의 사회적 사실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입체주의적 표현기법을 사용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이 당시 비어든의 글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ministers gave long-winded sermons to prove that the Negro was a creature driven by animal spirits, possessing only limited capacities, and best suited to a servile existence… It is the ironical that white men, like those in the Christy and Virginia ministers, made up in black-face, with wholly wigs and thickly painted lips, did so much in establishing the Negro stereotype in America…” (Romare Bearden, “The Negro artist’s Dilemma,” Critique; a review of Contemporary art Vol.1 (Nov. 1946), pp.20-22)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비어든은 미국 백인들의 이중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소재들의 얼굴들이 두개로 나뉘어 있거나 가면을 쓴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미스터 하이드와 지킬박사와 같은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양면성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 입체주의적 기법이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말씀드린것과 같이 큐비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던 면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Golgotha, 1945”를 보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백인이 아닌 흑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As an abstract e-pressionist and a cubist artist
이 후, 1950년 비어든은 G.I. Bill 장학금으로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철학을 공부하러 가게 됩니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Jean Dubuffet, Nicholas de Stael, William De Kooning, Helen Frankentellar, Jackson Pollock, Mark Rothko 등의 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당시 큐비즘 창시자 중 한명인 George Braque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이 브라크와의 만남은 이 후 비어든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로메어 비어든의 예술 1
* www.moamcollection.org
* (The Moam Collection, Korea) 홈페이지를 미흡하나마 오픈한 후, '문화읽기'라는 게시판을 열었습니다. 연지 약 한달가량 된것 같은데 이제서야 첫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올리는 글도 4년 전 시카고 대학원 시절 썼었던 글을 재편집하여 올리는것 입니다. 앞으로 이 게시판에 올리는 글들은 제가 현재 기획하고 있는 시리즈 간행물을 위한 사전조사와 준비가 될 것 입니다.
로메어 비어든의 예술과 그의 인종적 정체성의 영향 1
오늘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였던 로메어 비어든(Romare Bearden, 1911 -1988)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로메어 비어든은 비록 몇 번의 외면적 형식(기법)상의 변화가 있었지만, 한결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힘든 삶을 동료애(인류애)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혹, 잘못된 부분이나 오타가 눈에 뜨인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비어든의 삶과 예술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Lee, Yong-Su, “The Influence of Ethnic Identity on Romare Bearden’s Works,” Chicago;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4)
“Art should be understood and loved by the people.”
– Bearden, Opportunity vol. 12 (Dec., 1934), p.372
17세기 초 미국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오게되면서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국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된 지 4세기가 지나가고 있고 지금까지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미술사를 포함한 역사는 미국역사에서 마이너(minor)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미술사내에서는 18c 중반 초상화(Portrait painting)로 유명했고 최초로 기록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였던 Joshua Johnston을 시작으로 이들 예술역사의 서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후로 다양한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Julian Hudson, Robert Duncanson, 그리고 가장 위대한 흑인예술가로 평가되고 있는 Henry Ossawar Tanner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비어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술사에서 뿐 아니라 미국 현대미술사 내에서도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비어든은 1911년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주의 샤를롯(Charlotte, NC)에서 태어났습니다. 샤를롯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던 비어든은 가족들이 북쪽으로 이주를 함에 따라 가족과 함께 미대륙의 동북부 지역인 뉴욕 할렘가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비어든의 예술세계는 그 주제와 사용기법에 따라 크게 현실주의적 만화가(cartoonist), 사회 현실주의적 화가(socio-realistic painter), 종교화가(religious painter), 추상표현주의(abstract e-pressionistic painter), 그리고 입체주의 화가(cubistic painter)의 다섯 시기로 분류 될 수 있습니다.
As a Cartoonist
청년기 보스턴대학(Boston Uiversity)에서 야구선수로 활약을 하던 비어든은 유색인종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의 관심이 변하게 되어 뉴욕대학으로 편입을 하였고 그 곳에서 졸업을 하게 됩니다.(Bachelor of Science) 뉴욕대학 시절과 졸업 후에 비어든은 당시의 미국 사회상을 풍자한 리얼리즘 계열의 만화를 그리며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1933). 이 당시의 작품들로 월간으로 발행되던 뉴욕대학 잡지인 '메들리(The Medley)'에 게재되었던, “Dis Razor Ain’t Been a Bit of Good…, April 1934”, “Shall This Continue to Be the Plight of Colored Labor?, 1937”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당시 미국의 사회상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풍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s a social realistic painter
만화가로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던 비어든은 1937년 사회사실주의적 대표작 중 하나인 “Soup Kitchen, 1937”을 그립니다. 세명의 흑인들이 원근에 따라 캔버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 앞에 끓고 있는 스프가 있고 이 남자는 자신의 그릇에 스프를 막 담으려 하고 있습니다. 뒷면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두 남자들은 자신의 그릇들에 담겨진 수프를 먹고 있고, 그림에 나타나는 세 명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처럼 배경도 매우 무겁고 어둡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당시 할렘가의 노동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비어든은 당시 대공황으로 인한 노동자들 특히 흑인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의 모습을 잘 담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비어든은 “The Visitiation, 1941”, “The Family, c.1941”, “Presage, c.1942” 그리고 “Folk Musicians, 1941 – 1942”과 같은 많은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을 남깁니다. 이중 “Folk Musicians”을 살펴보면, 세 명의 음악인들이 화면에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과장된 코, 입술 그리고 손 등으로 미루어 흑인 재즈 뮤지션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이 그림도 사회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지만 표현형식에 있어서 그의 이전 작품인 “Soup Kitchen”과 구분이 됩니다. “Soup Kitchen”이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Folk Musicians”은 원시주의, 입체주의, 그리고 멕시코 화가들인 Diego Rivera와 Orozco의 영향이 크게 나타납니다. 더 이상 학술적으로 그 영향에 관하여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비어든은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ethnic identity)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As a religious painter who has social realistic eyes – Passion of Christ Series
1942 – 1945년 까지 군복무를 한 후, 비어든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종교적인 시리즈인 “He is Arisen, 1945”, “Christ’s Entry into Jerusalem,1945”, “He Walks on the Water, 1945”, “Golgotha, 1945”, “The Annunciation, 1946” 등을 포함한 “Passion of Christ”를 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비어든은 이 당시 이러한 종교적인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고, 또 왜 특별히 입체주의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이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던 걸까요? 시카고의 한 미술사가는 최근 논문, “Deep Waters: Rebirth, Transcendence and Abstraction in Romare Bearden’s Passion of Christ”에서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적인 혼란(Chaos)에 의하여, 사람들은 다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어든도 마찬가지였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당시 비어든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변화를 지적하며, 이 변화가 비어든이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에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변함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이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어든의 종교적 관심에는 동의를 하지만 단순한 형식적인 변화를 이유로 비어든이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변했다는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글의 제목과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 비어든은 처음부터 자신의 마지막 생애까지 자신의 인종적 동료애로써의 사회적 사실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입체주의적 표현기법을 사용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이 당시 비어든의 글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ministers gave long-winded sermons to prove that the Negro was a creature driven by animal spirits, possessing only limited capacities, and best suited to a servile existence… It is the ironical that white men, like those in the Christy and Virginia ministers, made up in black-face, with wholly wigs and thickly painted lips, did so much in establishing the Negro stereotype in America…” (Romare Bearden, “The Negro artist’s Dilemma,” Critique; a review of Contemporary art Vol.1 (Nov. 1946), pp.20-22)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비어든은 미국 백인들의 이중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소재들의 얼굴들이 두개로 나뉘어 있거나 가면을 쓴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미스터 하이드와 지킬박사와 같은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양면성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 입체주의적 기법이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말씀드린것과 같이 큐비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던 면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Golgotha, 1945”를 보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백인이 아닌 흑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As an abstract e-pressionist and a cubist artist
이 후, 1950년 비어든은 G.I. Bill 장학금으로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철학을 공부하러 가게 됩니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Jean Dubuffet, Nicholas de Stael, William De Kooning, Helen Frankentellar, Jackson Pollock, Mark Rothko 등의 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당시 큐비즘 창시자 중 한명인 George Braque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이 브라크와의 만남은 이 후 비어든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