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심아름200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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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獨島)

                            김종식 엮음.

1, 독도의 유래


울릉도를 빼고서는 독도를 말할 수가 없는데,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 0.186㎢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와 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이고  길이 330m이다. 동도는 해발고도 98m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m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성종실록(成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의 문헌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于山島) 또는 삼봉도(三峯島)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어있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의 기록을 보면 이 섬 주변에 가제(강치)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1794년경부터 가지도(可支島)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자세히 말하자면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 말기인 1881년에야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Li ancourt)'이라 하고,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2,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근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품을 바치게 되었다.>


우산국은 지금의 강릉시에서 동쪽바다로 1백리 떨어져 있는 울릉도(鬱陵島)를 말하는데, 이사부(異斯夫)장군이 아슬라주(阿瑟羅州=강릉)의 군주로 임명받고,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異斯夫)는 우산국 사람들이 어리석으면서도 성질이 사나우므로, 그들을 복속시키기 위해서 목우사자(木偶獅子=나무로 깎은 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누어 싣고 가서,


[자! 우산국왕은 이제 순순히 항복하라! 만약에 항복하지 않고 산속으로 도망가서 숨어 버린다면, 이 사나운 짐승들을 풀어 모두 짓밟아 죽일 것이다.]


목우사자를 본 우산국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이 이야기는 꼬마들이 보는 역사만화책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실제로 삼국사기에 그대로 기록되어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군사를 실어 나르는 대형 선박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부적인 일인데, 아마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후세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이고, 또한 이 시기에 제주도와 울릉도가 비로소 우리나라의 땅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렇게 이사부장군이 독도를 정벌하여 신라 영토로 만들었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독도를 그네들의 소유라고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매우 허무맹랑한 주장인데, 이에 분함을 금치 못해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정광태’라는 가수가 있다. 이 노래는 후미에서 함께 불러보도록 한다.


3, 안용복(安龍福)의 활약


안용복은 조선조 숙종 때 동래부(지금의 부산 동래구)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다. 왜관이란 일본(주로 대마도)사람이 그쪽 물건을 가져와서 팔고 이쪽 물건을 사가는 오늘날의 무역거래처였다. 그 후 안용복은 수군에서 벗어난 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에, 이곳을 침범한 일본 어민들을 보고,


[이놈들아 여기는 우리나라 바다이니 썩 물러가지 못할까?]

[뭐라카노? 얘들아! 저 조센징이노 잡아서 끌고 가도록하자.]


일본으로 잡혀간 안용복은 을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4, 일본과 최초의 문제 발단


아무튼 서계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대마도(쓰시마)에 들렸는데, 대마도주가 막부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는,


[어허. 막부에서 그럴 리가 있겠소? 어디 내가 확인 좀 해야겠소. 어디 봅시다.]

[못 믿겠거든 여기 있으니 확인 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안용복의 눈을 속이고는,


[맞소이다. 독도는 조선의 것이라는 막부의 서계가 틀림없소이다. 밀봉해 드릴 터이니 조선의 임금에게 잘 전해 주시오.]


그런데 안용복은 그 서계를 조정에 전달하였는데, 어찌된 판인지 “독도가 일본영토이므로 조선인들이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라는 내용으로 위조가 되어있었다. 귀가 찰 노릇이었다. 이것이 일본과의 최초 문제 발단인 것이다.


5, 일본 막부의 공식 사과.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곧바로 울릉도는 조선의 땅임이 명백함을 밝히고, 1694년 일본의 무례함을 힐책하는 예조의 서계를 전달하였다. 그 이후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 박어둔(朴於屯)과 다시 울릉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는 송도(松島:일본에서는 그 당시에 송도라 했음)까지 추격하여 정박시킨 후, 조선의 바다에 침범해 들어와 고기를 잡은 사실을 문책한 다음,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道監稅官)이라고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伯耆州: 島根縣]에 가서 번주(藩主)에게 국경의 침범 사실을 항의하여,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자 이듬해인 1697년에 일본 막부(幕府)는 쓰시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일본인의 출어금지를 통보해 왔다.


그런데 안용복은 나라의 허락도 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국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지사 신여철(申汝哲) 등이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라고 상소하여, 사형은 피하고 귀양에 처해졌다. 이후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어졌는데, 과히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6, 조선의 공도정책


그 후 조선 조정이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치면서 울릉도 및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울릉도에 외적을 막으려고 하니 그 예산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차라리 섬 주민들을 모두 강제로 육지로 데리고 나와 살게 하고, 섬을 텅텅 비워놓은 것이다. 그러자 일본 어민들이 마음 놓고 활개를 치고 침범하는 등, 사실상 일본의 어업전진기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렇다면 육지로 이주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강제로 이주되어온 섬 주민들이 그동안 육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하나 둘씩 몰래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서 살았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게 된 조선의 조정에서는, 공도정책을 펼친 지 80여년만인 1881년부터, 종래의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지양하고 개척령(開拓令)을 발포하여, 강원·경상·전라·충청 도민을 이주시켜 다시 개발을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독도를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이주정책의 효율성도 없고, 일본인들이 개판을 치고 다니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주시킬 때보다. 더 많은 인구를 전국에서 차출하여 보내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일본 어민들이 조금이라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로 부려졌던 이름이 독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독도라는 명칭은 1906년 울릉군 군수 심흥택(沈興澤)이 그 보고서 중에 기록함으로써 최초로 문헌에 나타나게 된 것인데,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하고도 확고히 해주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초기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종래 그들이 다케시마섬[竹島]이라 부르던 울릉도를 마쓰시마섬[松島]으로, 마쓰시마섬이라 부르던 독도를 다케시마섬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일부 일본인들은 1894년까지도 여전히 울릉도를 다케시마섬이라 불렀다고 한다.

 

7, 일본이 언제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했나?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일본은, 1904년 8월 조·일협약을 체결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실시하게 되었고,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하여, 같은 해 2월 22일 자기들 마음대로 시마네현[島根縣] 고시(告示) 40호를 발하여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다. 이 당시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그 기개가 만장하였고, 우리나라 조선을 닭 모가지 비틀어 놓듯이, 옴싹 달싹 못하도록 꾹 억눌러 밟아 놓고, 왕실까지 떡 주무르듯이 하던 그런 시대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 등은, 일본이 영국, 미국과 맺은 조약으로 러일전쟁의 귀결로서, 영국역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인정해주는 계기가 되는 조약이었다


그 후 1910년에 일제가 강압으로 한국의 국권을 피탈한 뒤부터 독도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세계지도상에는 일본명 다케시마(Takeshima), 프랑스명 리앙쿠르암초, 영국명 호네스트암초(Hornest Rocks)로 기재되어왔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연합국인 미·영·중·소 수뇌회담인 포츠담 선언이 1945년 7월 26일에 있었는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였으며, 8월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하기로 통보하므로,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포츠담선언에 입각한 연합군의 지령(指令)도, 독도를 일본에 속한 섬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포츠담선언의 문구에는 일본의 섬이나 한국의 섬이라고 어떤 한마디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패전국가로서의 일본은, 다른 나라에서 빼앗은 모든 영토를 돌려줘야한다는 회담의 원칙상, 자연스럽게 독도는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8, 독도는 해방과 더불어 우리가 다시 소유했다.


1945년 우리나라의 광복과 함께 자연스럽게 독도는 우리의 영토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1952년 1월 18일에 포고된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선언'에서 우리 정부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하였다. 말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사각형 형식으로 영해의 영역을 그어서, 우리나라 바다의 경계를 확고히 했다는 그런 말이다

 

9, 일본이 독도를 자기영토라고 주장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문제가 다시 일어났다. 그런데 1952년 2월 27일 미국이 독도를 미군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한 뒤,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침탈 행위가 잦았다.


심지어 1952년 8월에는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독도에 세우는 등 계속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는데, 이런 말을 전해 듣고 울분을 터트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홍순칠이었다. 홍순칠은 울릉도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여했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특사로 전역한 분이었다.


10, 독도의용수비대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세운 것을 확인한 홍순칠은, 일본의 터무니없는 독도 소유권 주장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독도 근해에 나타나는 일본 사람들의 어로활동을 제지하여, 울릉도 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주민들을 설득시켜 호응을 얻어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단신으로 부산에 가서 독도를 지킬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다.


드디어 1953년 4월 20일 홍순칠은 울릉도 청년 45명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는데, 3명을 빼고는 모두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이었다. 대장은 홍순칠이 맡았고,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으로 짜여졌다. 그들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t 보트 1척 등이었는데, 나중에는 박격포 등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홍순칠은 의용대 조직과 동시에 2진에 걸쳐서 보트를 타고 독도에 도착해 경비를 시작하였다.


11, 독도 의용대 최초의 전투


의용대는 1953년 6월, 독도에 접근한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독도는 우리의 땅이고 근해는 우리의 바다이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위협을 가할 수 밖에 없다.” 라고 하여 되돌아가게 했는데, 곧바로 6월 27일에 일본의 순시선 2척이 상륙하고 6명 수비 대원을 섬으로부터 내쫓고는, 또 다시 일본령이라는 표목를 세우고 순시선은 그대로 철수했다.

  

그런데 보름 만인 7월 12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함이 접근을 해왔다. 의용수비대는 경기관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이 전투가 독도 의용대 최초의 전투이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장비의 보충이 시급함을 깨달은 홍순칠 대장은, 다시 육지로 나가 어렵게 M2 2정과 박격포 한 문을 구입하였고, 이승만 대통령도 경상북도 경찰에 지시해서, 박격포 1문과 총알 100발을 의용대에게 지급시켰다. 이어 8월 5일에는 동도(東島) 바위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새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12, 독도 의용대 두 번째 전투


그런지 1년 후 1954년 8월 23일에는,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이승만 정부에서는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가 접근해 왔다. 의용대는 다시 총격전을 벌여 역시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일본 쪽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갈 때까지, 수비대원 33명은 한국 영토인 독도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3, 말썽의 요인 한일협정


일본과 우리나라는 해방 후 단절된 한일관계를 정상화 하기위해 노력해왔는데, 제1차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년 10월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 15일부터 당시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 21일 중단되고 말았다.


제2차 회담은 1953년 4월 15일에 열렸으나, 평화선문제와 재일교포의 강제퇴거문제 등으로 7월 23일 다시 결렬, 10월 6일부터 재개된 제3차 회담도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강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일본의 36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10월 21일 또다시 결렬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제4차 회담은 1957년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 15일 시작되었는데, 재일교포의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60년 4·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장면 내각은 한일회담 재개를 추진하여 그해 10월 25일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4,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부는 한일회담의 타결에 역점을 두었고,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1962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은 도쿄[東京]에서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회담, 대일(對日)청구권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문제가 타협점에 도달하여 메모를 교환하였다.


그 후 한국 내에서는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에 이어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1965년 2월 20일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가 방한하였고, 6월 22일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李東元),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金東祚)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晉一] 사이에 기본조약의 가조인을 함으로써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러나 청구권문제·어업문제·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조약의 교섭(한일회담)은 14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두 나라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강력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한일협정이 독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조약이전에는 우리의 영해가 평화선(이승만 라인)이라 하여, 동해바다 거의 3분지2가 우리의 소유였다. 말하자면 영해선이 어떤 곳은 일본 땅의 코앞에 까지 그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독도가 일본 영해에 있다고 하고, 우리 측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하여, 결국 한일협정이 분란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이다. 어떤 이는 한일협정이란 헐값에 우리영해를 팔아먹었다고 까지 말한다. 만약 우리가 영해선을 지키지 못하면 울릉도민 뿐만 아니라 우리 어민들의 생존권이 엄청나게 침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15, 다시 불거진 망언


한일협정 이후에도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계속 점유하여 왔는데, 일본에서는 간간히 자기들의 영토를 피력하다가 ,급기야는 2005년 3월 16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서,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정하는 조례를 가결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반인에게도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는 등 실질적 지배를 강화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6,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속셈.


강대국 일본이 이지즈함을 앞세워 공격해 온다면, 순식간에 독도쯤이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도 있고, 지금 세상은 그렇게 쉽사리 무력도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일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독도를 분쟁화 시켜 세계의 이목을 끌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끌고 가려는 그런 계책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간간이 독도문제를 터뜨려 한국인들을 분노케하면, 한국인들이 발끈해서 들고 일어나 이슈화되면, 그땐 더욱더 감정을 상하게 하여 분란의 불씨를 키운 다음에,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간다는 그런 전략이란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쪽에 손을 들어준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끽소리도 못하고 고스란히 넘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은 한국인들이 발끈해 막 들고 일어나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독도가 영토분쟁지역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송을 걸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속셈을 모르고 있는 우리 일반 국민들은, 성질도 급하시게 감정적으로 핏대를 세우고 있으니, 안타깝게도 우리 스스로가 독도를 영토분쟁 지역이라고 오히려 알리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가 일본의 계략을 착실하게 돕고 있다는 그런 뜻이죠.


17,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다.


독도가 신라 때부터 우리의 영토였고, 지금 우리가 독도를 점유하고 있고, 주민등록도 옮기고, 호적도 거기다가 올리신 분도 있는데,  왜 국제 재판소에 가서 맞짱뛰면 안되느냐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