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이영주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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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Sa-Kwa, 2008)
감독 : 강이관






그래, 지나고 보니 모두에게 미안해요...


1.

사실 어제 저녁에 보기로 했던 영화였다. 대략 시간 계산을 해보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동생들과 턱 하니 약속을 잡았는데 이놈의 일이 쉽사리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거다. 다음에 보자, 미안하다... 이러고 어제를 보냈다. 이런 식으로 놓치면 끝내 못 보고 넘어가는 수가 많은데... 내심 불안감이 밀려 왔다.
오늘 오전 충무로에 갈 일이 있어서 오전 시간을 다 비워뒀는데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다. 충무로엔 대한극장이 있고, 어제 못 본 사과가 자꾸 목에 턱턱 걸리는 거다. 곧장 극장으로 내달렸다. 오홋~~!! 15분 뒤에 가 있다. 덥썩 깨물었다.
덥썩 깨어 문 사과는 사각거리며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달콤한 열대과일들에 비하면 밍미하기 짝이 없는 맛이었다. 헌데 영화가 끝나고 아는 스텝 이름도 없으면서 엔딩크레딧을 모두 훑은 연후에야 밀어닥치는 허허로움은 뭔가. 극장을 나와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그냥 걸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바람 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

는 그런 영화였다. 내 평상시 영화 보는 습관에 따르면 영화를 보면서 이미 몇몇 문장이 떠올라야 옳았다. 보통 영화들에게는 대략 언어로 정리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을 사는 것처럼 무덤덤한 느낌. 현정과 민석, 상훈의 연애와 결혼이야기는 그만큼 일상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의 영화에 나오는 운명적인 사랑이나 이별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너랑 사귀면서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헤어지고, "결혼하니까 결혼 전 보다 더 좋아져서" 살았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았다.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도저도 지지부진해지고 이혼과 이별 이야기가 오가고, 그렇게 영화의 결말은 다가왔다.
영화의 종반부 현정은 놀이공원 대관람차에서 키스를 마치고 민석에게 말했다. "미안해..." 시끄러운 도로변에서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미안해..." 합의이혼서류를 들고온 남편 상훈을 등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그때부터였다. 머릿속에 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눈물이 나지 않는데 울고 있는 상태, 한마디로 먹먹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입 안에서는 계속 "미안해..." 이 말만 맴돌았다.
극장을 나와 걸으면서도 계속 "미안해..." 이 말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먹먹한 마음으로 남산 한옥마을을 터벅터벅 걸으면서도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난 누구에게 미안했던 것이었을까? 지나간 옛사랑에게 미안했을까? 가족들에게 미안했을까? 친구들에게 미안했을까? 아마도 현정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지나친 기대를 품고, 그렇게 기대만 품었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문에 이래저래 상처입혔던 많은 이들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사랑은 그토록 영화와 드라마와 가요에서 절절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하게도" 운명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렇게 상처를 주며 떠나갔어도 "한번도 잊은 날이 없는" 마음이 사랑이고, 그렇게 매일같이 꽃과 명함을 바치며 구애했어도 막상 결혼해서 살다 보면 자격지심과 억지스러운 집단화, 가족화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사랑인데 말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상훈이 기독교집안인 현정을 따라간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한 성경구절에서(이 구절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대략 이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면 이 영화가 이해된다.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 사랑은 그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실망하고 이별하는 게 또 사랑이다.
그래서였겠지. 단지 "바라는 것"일 뿐이었는데도 마치 "그래야만 하는" 진리인 양 기준을 세워놓고 헤어지자 말자 실랑이했던 나와 상대에 대해 그 때문에 또 상처입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던 것은.
이토록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영화가 몇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운명적 사랑을 하거나 "사랑과 전쟁"과 같은 너저분한 이별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살다 보니 사랑하게 되고 살다 보니 이별하게 되는 게 우리네 일상이다. 그 안에 숨은 "사랑"에 대한 "믿음" 혹은 "허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영화로, 이 영화는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문제는, 좀더 일찍 이 영화를 만났어야 했다는 거다. 지금은 사랑에 대한 관심도 옅어져서 이 영화의 먹먹함 또한 옅어졌을 테니 말이다. 내가 만약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더라면, 그도 아니면 막 이별을 경험한 시점이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한동안 깊은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텐데... 어찌 보면 다행인가? ㅋㅋ

3.

3년 동안 묵혀두었다 개봉한 영화라서 솔직히 걱정이 없던 것도 아니다.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의 3년 전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특히, 김태우는 환장할 지경으로 연기를 잘한다. "내가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 아냐?"고 묻는 현정에게 "넌 날 싫어하잖아"라는 말을 토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상훈, 합의이혼 서류를 들고 와서 곤히 잠자고 있는 현정을 바라보는 상훈을 지켜보는데, 스크린으로 다가가 와락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젠장할, 상훈은 절대 내가 좋아하는 성격의 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따위 연민을 일으키는 김태우의 연기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