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대는 많은 부분 패역했다. 현대 기독교 또한 많은 부분 패역했다. 패역은 기준에 부합할 때 발생한다. 기독교에 대한 패역의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의되고 유래된다. 만일 행위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패역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에 근거해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구교에 반해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것도 당시의 천주교에 부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르네상스시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대인과 다르게 생각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따라서 우리 또한 현대 기독교의 패역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교회가 영성과 능력 그리고 신뢰를 잃어버림에 따라 동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만큼이나 떠나가는 사람도 많다.
좀 더 나아가기 전에 명확히 해둘 것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이유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더 정확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패역에 대해 비판하고 자기정화를 촉구하고픈 것이다. 현대 기독교가 자기정화에 대한 노력없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부차시 할 때 패역함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교회분열, 교회의 기업화, 단순 사교모임으로 전락, 개인적 삶의 목적성취를 위한 도구 등등. 요즈음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슬프고 통탄할 만하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교회가 시대를 바꾸는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시대의 영향력하에 있는 것 같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영성에 기인해야 한다. 능력있는 영성위에 세운 삶은 설령 그 주변부가 흔들린다 할찌라도 그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내린 그 뿌리는 믿음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영성있는 삶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삶을 허락한다. 이성과 지성도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중 하나이다.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고 찬양을 하는등 삶의 많은 부분은 이성과 지성에 영향을 받는다. 이성과 지성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중요한 삶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성과 지성이 영성위에 세워지지 못할 때 우리는 길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영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경험하고 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요즈음 많은 크리스챤의 믿음생활은 참 편해진 것 같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가끔 삶의 어려움이 있으면 기도를 한다. 이런 점에서 나 또한 내 삶이 아버지께 죄송스럽고 부끄럽다. 결국 현대 기독교인의 믿음생활의 정확한 동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기희생을 수반한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기만족의 행위로 변질돼 버렸다. 슬프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사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행위에서 자기만족을 철저히 배제하기란 힘들다. 결국 신에 대한 한 존재의 동기(motivation)가 신 앞으로 나아오겠끔 하기에 절대적인 자기부인은, 추구되어야 하지만, 아주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인간자신의 철저한 행복추구를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올때, 이는 과연 추구되어야 하는 행위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다 참수를 당해 죽었고, 지금도 많은 중국인들은 종교탄압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미국 선교사님들이 순교했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기 위해 인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있어 우선순위가 누구이며 크리스챤 각개인의 종교관이 과연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는지 자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라서 즐겁고 기쁘다. 그 것이 내 삶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내 삶의 여정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의식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재능, 능력, 시간, 자원, 모임등을 책임감있게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내 삶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단 한 명에게라도 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아버지는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껏 신뢰하고 사랑하기 위해 1분 1초를 고군분투 한다면, 그 모습을 아버지께서 기뻐 받아주시지 않을까 한다. 내 자신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 나가 믿음생활을 한다면,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받아주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추구하고 관계의 순수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모습을 아버지께서 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아직 내 삶도 진실하지 못하고 부정직한 부분이 있다. 삶이 완벽하다면 더 이상 진보할 이유도,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갈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내 삶이 불완전하기에 나는 늘 내 삶의 추구에 따라 고군분투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타협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협되지 않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분명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A struggle for uncompromised life. 타협되지 않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내 존재와의 투쟁. 그 것이 하나님을 향한 내 삶이다.
패역한 세대와 현대 기독교-A struggle for uncompromised life
현대 기독교의 패역함, 그리고 자기정화와 관계회복에 대한 추구
지금 세대는 많은 부분 패역했다. 현대 기독교 또한 많은 부분 패역했다. 패역은 기준에 부합할 때 발생한다. 기독교에 대한 패역의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의되고 유래된다. 만일 행위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패역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에 근거해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구교에 반해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것도 당시의 천주교에 부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르네상스시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대인과 다르게 생각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따라서 우리 또한 현대 기독교의 패역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교회가 영성과 능력 그리고 신뢰를 잃어버림에 따라 동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만큼이나 떠나가는 사람도 많다.
좀 더 나아가기 전에 명확히 해둘 것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이유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더 정확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패역에 대해 비판하고 자기정화를 촉구하고픈 것이다. 현대 기독교가 자기정화에 대한 노력없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부차시 할 때 패역함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교회분열, 교회의 기업화, 단순 사교모임으로 전락, 개인적 삶의 목적성취를 위한 도구 등등. 요즈음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슬프고 통탄할 만하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교회가 시대를 바꾸는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시대의 영향력하에 있는 것 같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영성에 기인해야 한다. 능력있는 영성위에 세운 삶은 설령 그 주변부가 흔들린다 할찌라도 그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내린 그 뿌리는 믿음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영성있는 삶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삶을 허락한다. 이성과 지성도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중 하나이다.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고 찬양을 하는등 삶의 많은 부분은 이성과 지성에 영향을 받는다. 이성과 지성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중요한 삶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성과 지성이 영성위에 세워지지 못할 때 우리는 길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영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경험하고 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요즈음 많은 크리스챤의 믿음생활은 참 편해진 것 같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가끔 삶의 어려움이 있으면 기도를 한다. 이런 점에서 나 또한 내 삶이 아버지께 죄송스럽고 부끄럽다. 결국 현대 기독교인의 믿음생활의 정확한 동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기희생을 수반한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기만족의 행위로 변질돼 버렸다. 슬프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사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행위에서 자기만족을 철저히 배제하기란 힘들다. 결국 신에 대한 한 존재의 동기(motivation)가 신 앞으로 나아오겠끔 하기에 절대적인 자기부인은, 추구되어야 하지만, 아주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인간자신의 철저한 행복추구를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올때, 이는 과연 추구되어야 하는 행위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다 참수를 당해 죽었고, 지금도 많은 중국인들은 종교탄압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미국 선교사님들이 순교했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기 위해 인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있어 우선순위가 누구이며 크리스챤 각개인의 종교관이 과연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는지 자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라서 즐겁고 기쁘다. 그 것이 내 삶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내 삶의 여정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의식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재능, 능력, 시간, 자원, 모임등을 책임감있게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내 삶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단 한 명에게라도 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아버지는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껏 신뢰하고 사랑하기 위해 1분 1초를 고군분투 한다면, 그 모습을 아버지께서 기뻐 받아주시지 않을까 한다. 내 자신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 나가 믿음생활을 한다면,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받아주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추구하고 관계의 순수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모습을 아버지께서 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아직 내 삶도 진실하지 못하고 부정직한 부분이 있다. 삶이 완벽하다면 더 이상 진보할 이유도,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갈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내 삶이 불완전하기에 나는 늘 내 삶의 추구에 따라 고군분투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타협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협되지 않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분명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A struggle for uncompromised life. 타협되지 않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내 존재와의 투쟁. 그 것이 하나님을 향한 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