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시인

박명관200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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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을 기다리며

 

 

남쪽에 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기로 하자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눈을 기다리기로 하자
무엇인가를 간절히 믿어본지 오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려본지 참 오래다
나는 마당에 나가 벚나무와 함께 직립으로 서서
고립무원의 폭설을 기다린다
나에게서 출발했던 모든 길을 버리고
나에게로 돌아왔던 모든 길을 버리고
오직 하늘의 길을 기다린다, 돌아보면
내가 택했던 길들은 나를 버렸고
나를 택했던 길들은 내가 버렸다
나는 얽히고설킨 세상의 그 길을
하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운명으로 믿었던 손금 속의 길을 지우고
내 몸 속으로 퍼져있는 붉은 실핏줄의 길을 지우고
내 안과 밖의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을 때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려와 지도를 만들 것이니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는 순백의 지도 위에
발자국으로 이어지는 내 길을 만들 것이다
뜨거운 발자국만이 길을 만들 것이니
차가운 지도 위에 가장 뜨거운 길을 내며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고 싶은 것이니
남쪽에 내린 즐거운 폭설주의보를 믿으며
하늘주머니 터져 쏟아져 내릴 폭설을 기다린다

 

 

 

 

은현리 天文學校(천문학교)

 

 


내 사는 은현리 산골에 별을 보러 가는 천문학교가 있다.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나는 별반 담임 선생님. 가난한 우리 반 교실에는 천체망원경이나 천리경은 없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부터 칠판을 깨끗이 닦아놓는 착한 하늘이 있고, 일찍 등교해서 교실 유리창을 닦는 예쁜 초저녁별이 있다. 덜커덩 덜커덩 은하열차를 타고 제 별자리를 찾아오는 북두칠성 같은 덩치 큰 별들이 있고 먼 광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별도 있다.

 

오래 전 나도 별과 같은 학생이었다. 그 때의 우리들처럼 별들도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다. 내가 출석을 부르는 사이 슬쩍 자리를 바꾸어 앉는 개구쟁이별이 있고, 시간시간 붉은 옷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멋쟁이별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별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혹시 별이 울어 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은현리 천문학교에서는 누구도 별을 울려서는 안 된다. 별이 울어버리면 하늘 제자리에 손톱자국 같은 생채기를 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래, 아주 오래 별을 바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령 첨성대에 올라 별을 바라보았던 서라벌의 점성가들은 벌써 알고 있었을 비밀이다. 그 비밀을 말하자면, 모든 별들은 악기라는 것이다. 하늘의 눈물로 만들어진 하늘의 악기. 그래서 모든 별들은 쨍그랑 쨍그랑 수정유리 소리가 나고, 바람 부는 날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혹 당신이 듣지 못했다 해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믿지 않으면 별들의 연주를 영원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던가. 하얀 연미복을 입고 하얀 구두를 신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열광적으로 연주하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이 이뤄졌다.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카라얀 선생도 나보다 가슴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작은 산골에서 지휘봉을 들고 밤하늘에 뿌려져 있는 별들의 소리를 조율한다. 나의 지휘로 은현리 별들이 서서히 합주를 시작하면 미리내는 장중하게 흘러가고 밤하늘은 음악에 젖는다.

 

별은 자신을 때리며 소리를 낸다. 별은 소리를 낼 때 가장 빛난다. 작은 별은 맑은 소리로 웃고 큰 별은 우렁찬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물고기자리의 별들은 물고기가 되어 튀어 오르고 전갈자리의 별들은 전갈이 되어 달아난다. 개구쟁이 녀석들이라 1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내 지휘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편안하다. 연미복을 벗어 던지고 구두를 벗어 던지고 지휘봉을 던져버리고 풀밭에 눕는다.

 

하늘의 별들이 내게로 뛰어 내린다. 선생님하며 내 품으로 달려온다. 내가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선생님이었던 그 때처럼 내게로 달려와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천문학교 교실에서 한 몸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별들이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간 새벽 나는 악보를 그린다. 아주 옛날 은현리에 살았던 우시산국 사람들이 바위에 그 별자리를 새겼듯이 천상열차분야지도

같은 황홀한 하늘의 합창을 잊어버릴까 내 마음의 천문도에 또박또박 그려 넣는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에 있었던 고대국가
**우리 나라 옛 천문지도


 

_ 정일근 시인

 

 

출생 1958년 7월 28일 (경상남도 양산)

학력 경남대학교 국어교육학 학사

데뷔 1984년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수상 2003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경력 2004년 시힘 동인, 문화공간 다운재 운영
2001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