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의 식사 外 _ 황병승

김선미20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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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의 식사

황병승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제 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열심히 삼십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이에요

사람들과 방금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들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

-여왕의 오럴섹스 취미







나는 나의 백성들을 밑으로 데려갔다




절망과 불만을 구별하는 것이 오리앵무새의 과제였다

한번도 단어카드를 제대로 물어오는 법이 없었다

헤맸다, 왜일까




여왕은 안심이 되었다




태엽장치 돼지들은 성문城門 앞을 오가며 쓰다 달다 말이 많았고

뒤죽박죽이 좀 심한 녀석들은 단칼에 혀가 잘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밤이 되면

여왕의 숲에 이리저리 쓰러져 얌전히 코를 고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비둘기를 데려오는 시간)




이쪽으로 가면 석 달 열흘 춤만 추는 광대 원숭이가 나오고

저쪽에는 밤낮 겨울 봄 슬픔을 길어 올리는 울보 토끼가 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나무 등걸에 서서 체셔 고양이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었다









나는 너무 강해서 백성들의 혀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 리차드! 이 매정한 사람,

소설광인 앨리스 부인은 탁 소리 나게 책장을 덮었다




여왕이 보낸 수 백 장의 카드 앞에서 오리앵무새는 골머리를 앓았고




태엽장치 돼지들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가 큰 녀석들은 변을 당했고 대부분은

배가 고프면 고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여왕의 숲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죽은 비둘기를 확인하는 시간)




누군들 소리치고 싶지 않을까 그런 순간이 오면

이빨을 부딪쳐 박자를 만들어 봐요

으들들 으들들들 자신을 좀 곱씹어 봐요

궁정의 개구리 악사들이 숲 주위를 돌며 도토리를 두드렸다




한편, 앨리스 부인은 마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에 읽었던 본격러브로망 제24탄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으므로

크로켓 경기에 참석하라는 여왕의 전갈을 묵살했다




여왕은 앨리스 부인의 목을 치는 대신

숲 중앙에 펼쳐진 눈물 호수에 슬쩍 검은색을 엎질렀고




겨울이 왔다









결국 모든 것은 진력이 나게 마련이다 크로켓이든 카드놀이든




앨리스 부인은 창밖으로 펼쳐진 눈세계를 바라보다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메고 생쥐들과 함께

눈물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혹한이 휩쓸고 간 숲 속의 고요한 아침




태엽장치 돼지들의 함성도 오리앵무새의 구슬픈 노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술을 맞춰보는 시간)




이것 봐 올겨울엔 아무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

눈물 호수 앞에서 앨리스 부인이 말했다

칼자국하나 없는 이 빙판 좀 봐!




앨리스 부인은 생쥐들과 함께 빙판을 내달렸다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언제나 그렇듯

이쪽은 춤추고 저 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물이 엷게 베어 나왔고

나쁜 냄새가 났다






*이탤릭체-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Cheshire Cat's Psyco Boots_8th sauce

-앨리스 부인의 증세

황병승







나는 (당신)을 가지고 있어요 댁들처럼 (당신)이라는 가죽주머니를 나도 가지고 있지요 처음 그대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대를 (당신), 하고 불러봤겠죠 행복했겠죠 내가 (당신)(당신) 부르면 그대도 즐겁게 안녕, 하고 답했으니까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불렀을 거예요 (당신)(당신) 가죽주머니 가득한 소리들 그대는 머리가 아팠겠죠 왜 안 아팠겠어요 그대 떠나고 공처럼 부풀었던 가죽주머니가 삼 백 예순 날 (당신)(당신)을 연신 노래하는데 눈앞이 다 깜깜 했었지요

(당신)이 텅 비었을 때쯤 두 번째 그대가 왔어요 그러나 두 번째 그대는 너무 작아서 아니 가죽주머니가 대책 없이 늘어나 버려서 (당신), 하고 부르면 나? 못 알아들었지요 그대가 더 필요 했어요 댁들은 그걸 양다리라고 한다지요 그러나 좋아요 가죽주머니 속의 두 번째 그대들에게 (당신), 하고 부르면 듣기 좋은 소리로 안녕, 듀엣으로 답했으니까요 그리고 가죽주머니가 다시 빵빵해졌을 즈음 그대들은 알게되었어요 도대체 너는 (당신)이 몇이니?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대들은 듀엣으로 떠나갔겠죠 가죽주머니는 삼 백 예순 날 제곱으로 (당신)(당신) 울고 어느새 (당신)은 포대자루만큼 늘어졌겠지요 이제는 그대들 그대들이 더 많아야만해요 댁들은 그런 나를 잡년 화냥년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런 년이 아니에요 나는 오로지 (당신)뿐이니까요.






판타스틱 로맨틱 구름

황병승





변덕쟁이 여자는 늙도록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며 구름만큼이나 많은 남자들을 만났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나의 이름은 구름이다, 구름만큼이나 시시한 소개를 늘어놓으며 판타스틱 로맨틱 언덕에서 첫아이를 뚝떼어 만들고 이름 모를 호수와 굴뚝을 옮겨다니며 구름만큼이나 많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흩어졌다 구름만큼이나 가벼운 짓이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소녀들은 어느새 주먹만한 유방을 달고 어머니를 쏙 빼닮은 얼굴로 크고 작은 고민에 빠진다 아름다운 것 비극적인 것에 이끌려 진정한 로맨스란 무엇인가 만남과 이별 눈물과 후회 날마다 수다를 떨고 솜털의 소년들은 소녀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나의 이름은 구름이다, 구름만큼이나 낡아빠진 목소리로 위대한 것 웅장한 것을 노래하느라 정신이 없다 꿈속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짓다 허문 모래성이라는 것 이미 들통났는데 창밖의 판타스틱 로맨스 소년 소녀 들은 뭉쳤다 흩어지고 다시 뭉쳤다 흩어지며 오후 내내 구름만큼이나 시시한 짓들을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