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한 세금, 인정넘치던 나라 이야기

손유진2008.11.16
조회89

드문 글입니다.

좋다는 애기지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보관하고 싶어 퍼왔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땅"과 그 위에서 사는 "사람"들과 

토지세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다른 곳에 올린 후에,

이 긴 글을 차근히 읽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 궁금했습니다

스크롤 내리지 말고 읽어보세요.

 

고3떄 배운 국사가 오버랩되면서 "아!관대한 세금, 인정넘치던 나라 이야기" 하실 겁니다.  

여기서 또 역사 공부의 중요성이 나오는 군요.

쨋든,

종합 부동산세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단순히 빈부격차, 4글자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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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동떨어진 두 지역에서 똑같은 역사적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석기,청동기,철기 문명은 데칼코마니마냥 완벽한 복제형태는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됩니다.

세금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양 세금제도의 근본은 매우 유명한 ‘십일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 세금제도의 근본은 ‘정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전제는 우물井자의 가운데 밭이 공동경작지인 공전으로서 세금으로 납부했던 청동기시대의 유산입니다. 이 세금이 아마도 계산의 편리를 위해서겠지만 주공에 의해 ‘십분의 일’세금으로 바뀌고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동양세율의 합법적 근거로 작용해 왔습니다.

십일조이든 정전제이든 초기 세금은 소득세이면서 재산세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시대의 모든 소득은 토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지요. 즉, 토지소유자에게 세금이 부과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그 세율은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늘 토지가 비옥한가 아닌가에 따라 가혹하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을 건국한 후 사회정치적으로 안정된 세종임금시대에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바로 토지측량작업인 ‘양전’과 이에 기반을 둔 평등한 세금부과법인 ‘공법’의 제정이었습니다. 양전사업에는 국가 최고의 수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었고, 이후로도 조선왕조 내내 수학자들은 호조에 소속되어 세금과 관련된 계산을 주업무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율이 조선후기로 오면서 점차 줄어들어 1/20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지속적인 감세조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서양의 중세 직접세율도 1/20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동서양 양쪽에서 이 세율은 다른 이유에서 만들어졌고 이 감세에 대한 세수부족에 대한 대처도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한쪽에선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온 반면 다른 한쪽, 특히 조선에서는 한 왕조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2.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1/10세금은 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조교체를 단행한 이유자체가 토지가 지나치게 몇몇 소수 귀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세금제도의 공평성은 필연적으로 토지소유의 공평성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조선초기 훈구파라고 불리는 ‘법가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율을 1/5까지 높이면서까지 큰정부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이 세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인 지주들의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자들은 사림파였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해 ‘덕치주의’와 작은정부로 맞섰습니다. 중국의 한나라를 역할모델로 삼은 법가적 정치인들(이들을 경세주의자라고 하기도 합니다)에 대항하여 중국 송나라를 역할모델로 삼은 신유학적 정치인들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뒤 비로소 웃는다’는 범중엄의 고고한 슬로건을 들고 나타났습니다.(그들을 안민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의 으뜸은 당연히 세금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사림파가 등장하여 그들에 의해 권력을 잡은 선조시대 이후 감세는 꾸준히 진행됩니다.

물론, 세수 부족에 따른 국가적 재앙을 모른 채 하지 않았던 뛰어난 경세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율곡 이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감세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후예 일부에서 이 노력은 지속되었지만 김육에 의해 잠시 실현되었을 뿐 대부분은 실패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감세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 사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세의 무시무시한 복수는 왜란과 호란,양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겪고서도 대부분의 신유학적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노선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흔히들 십만양병설로 일컬어지는 율곡 이이의 개혁안의 핵심도 세금문제입니다. 그는 매우 정확하게 국제정세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정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철학에 기반한 유추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율곡 이이는 당시의 군대체계인 ‘제승방략체계’가 가장 저렴한 국가방위방법이라는데에 나라의 허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정규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 정규군을 육성할 세수의 확충이 기본이었고, 그 세수의 확충은 감세로 일관해오던 사림파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거부되었습니다. 특히 실업자들을 대거 정규군에 편성하여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공공성을 목적으로 한 공리주의는 충격적일정도입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조선시대의 가장 편리한 공격은 ‘왕안석주의자’였습니다. 율곡 이이는 다행히 그런 공격은 피했을지 모르지만 성리학자들은 율곡이 젊은 시절 한때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불교에 심취했었다는 이유로 꼬투리를 잡아 평생을,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그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불교적이라는 말도 레드콤플렉스와 맞먹을 만큼 치욕스럽게 여기던 것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었습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성리학자들이 감세로 인한 세수부족을, 불탄 경복궁을 새로 짓느니 그냥 이미 있는 창덕궁을 쓰게 한다거나 국가재정이 모자라 국가행사에 비단을 까느니 그냥 거적대기를 깔게 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모면하려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병자호란 이후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들로서는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정부는 크든지 작든지 운영비용이 필요하게 마련이었고, 그 필요분까지도 넘어선 감세의 이면에는 누군가가 피흘리며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조선후기 실학자들을 분노하게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3.

김육이 대동법을 실시하려한 이야기는 예전에 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직접세인 토지세에 대한 지속적 감세 때문에 발생하는 간접세인 인두세의 지독한 폐해를 보고 대동법의 실시에 인생을 걸었다는 것은 그가 율곡 이이의 계보를 잇고 있었던 점 때문일 것입니다.

매우 아이러니한 것은 인조반정과 더불어 조선의 조정을 손아귀에 쥔 서인정권은 율곡의 후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율곡에게서 감세와 관련된 그 부분만 쏙 빼고

‘그러므로 모든 성리학자는 숲속에 들어앉아 도만 닦을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로 달려가 향약을 실시하고, 서원과 향교를 통해 백성을 교육하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법제도의 운용과 개편에 참여해야한다’

는 실천주의만 취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율곡의 제자들로 출발한 서인들이 차츰 율곡은 잊고 주희에 빠진 것도 율곡을 더 이상 품을 능력이 안되어서였겠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율곡은 실패한 것을 김육은 해냈습니다. 이것에 대해 뉴라이트 사학자로 어떤 의미로든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영훈 교수의 영향력하에서 집필된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조선후기 토지에 대한 과세로 바꾸고 납부능력에 상응하는 부과가 되게 하였고, 조세부과 표준을 쌀로 통일하여 지역간 불균등을 조정하고 조세납부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대동법은 재분배경제를 실현하였다. 다만 그것은 비시장경제적이어서...후략....(이후 재분배정책에 대한 고집이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번영과정에 조선만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뉴라이트에게까지 인정받을만큼 김육이 전방위적인 재분배경제를 실현했을까요? 물론 당연하겠지만 ‘노’입니다.

아마 감세에 대해 가장 냉정한 눈을 가진 인물은 ‘이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는 감세가 가지는 논리적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신유학, 즉 주자학은 달리 ‘송학’이라고 할만큼 송나라의 경영이데올로기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송나라는 ‘문화제국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들의 주변국가 지배방식은 군대에 의한 무력진압이 아니라 문화에 의한 감화, 다른 말로 하면 ‘돈으로 산 평화’였습니다.

전세계는 송나라와의 무역을 희망하였고, 바다와 실크로드에는 배와 낙타의 행렬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나라의 세수는 ‘상업세’로부터 충분히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토지에 대한 감세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만큼....

이런 향수에 젖은 주희는 ‘작은정부’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취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감세주의자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이익은 주희를 절대화해서 공자,맹자의 반열에 넣어 ‘주자’로 격상시킨 사회적 분위기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대신 주희에 의해 폐기처분된 한나라의 동중서를 부활시키고,상앙과 관중을 부활시켜냅니다.

동중서는 한나라의 무제를 도와 중국 최초의 제국을 완성시킨 사람이고, 상앙은 춘추전국시대 북방의 소국이었던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격상, 훗날 통일국가 진나라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며, 관중은 아시다시피 포숙아의 친구로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사람입니다.

이들은 말그대로 큰정부주의자이고, 공리주의자입니다. 그들은 토지의 겸병,즉 독점을 반대했고, 감세에 반대함으로써 안정된 세수확보를 통해 공공사업을 일으켜 국가적 번영을 이루어낸 사람들입니다.

특히 동중서를 비롯한 중국 송나라이전의 개혁주의자들에게서 이익은 매우 놀라운 논리를 찾아냈는데요, 그것은 세금이 정전법에 있다면 백성의 복지도 바로 그 제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전법에서 세금에 해당하는 ‘공전’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나머지 8구획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공전이 기본적 권리라면 8구획을 백성 8명이 나눠갖는것도 기본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기본권을 ‘영업전’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공전이 그렇듯 매매와 증여와 상속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영업전을 제외한 모든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될 수 있었습니다.

세금제도로부터 유추해낸 이 독특한 토지제도를 한전제라고 하는데,그것은 고대 유학자들의 ‘균전론’에서 나온 것이니 소위말하는 ‘갑툭튀이론’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로 보이는 이 ‘한전제’가 왜 그토록 이익에겐 절실했던 것일까요?

4.

가끔 그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참으로 인정이 넘치는 사회...

하지만 조선시대 얘기를 듣고 나면 다시는 이런 얘기를 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세금제도를 뒤흔들었던 인정넘치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직접세인 토지세가 지속적인 감세화의 길로 접어든 이후 국가경영에 필요한 것들마저 줄이고 줄였지만 결코 줄일 수 없는 것이 ‘인건비’였습니다. 성리학자들이 ‘절약’을 미덕으로 설파하였지만 ‘인건비’마저 줄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물론 이순신같은 사람은 그마저도 아껴서 남겼다 국가에 반납했다고는 합니다만 국가의 중간간부급 이상의 관리들에겐 품위유지를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고 게다가 그 힘겨운 과거시험에 통과한 소수특권층의 보상심리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행정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동리 아전들은 무급직이라는 것이죠. 즉 자원봉사자들로 행정을 운영한다는 것입니다.작은정부를 지향하는 것도 좋지만 이쯤되면 너무하는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작은 정부는 감세의 혜택을 보는 이들에게나 의미있는 이야기일뿐 얼마나 기만적인 단어인가 하는 것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인정세’입니다.

아전들이 무급 자원봉사자들이다보니 그들이 불쌍하여 인정이나 베풀자는 의미로 제정된 간접세가 바로 ‘인정세’입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뇌물인 셈이죠. 그래서 이익은 차라리 급여를 현실화하고, 뇌물이나 부정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법 개정을 주장했습니다.

그 외에도 지금으로 보면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작지세’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금을 낼 때 그 세금을 수납하는 관청의 경비를 세금에 덧붙여 내는데 ‘장부책을 구입할 때 보태쓰십쇼’하고 내는 종이값입니다.

하지만 작지세는 세금보다 작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가령 특산물인 감귤을 제주도에서 한양의 서옹원에 낸다고 해보면,

먼저 동네 수령에게 수납(작지세첨부)+배에 선적(작지세 첨부)+배에서 하적(작지세첨부)+수레에 선적(작지세첨부)+수레에서 하적(작지세첨부)+사옹원수납(작지세첨부)+사옹원창고에서 수랏간으로 이동(작지세첨부).....

이러다보니 배보다 큰 배꼽을 미리 세금에 보태서 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분노한 것이 바로 김육이었고,그 작지세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그는 대동법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물론 대동법이 실시되었다고 작지세가 없어지지 않았지요. 관공서가 존재하는 한 존재할 세금이니까요 .왜? 당연히 작은정부였으니까...

조선을 결국 멸망으로 이끈 것은 ‘환곡’이었습니다. 관청은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익사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합법적 고리대금업인 ‘환곡’입니다.

이익은 환곡의 폐해를 자세히 적으면서 차라리 흉년에는 아껴쓰기라도 하는데 풍년에도 환곡을 주면 펑펑 쓰기 때문에 망하기 딱 좋다고까지 말했습니다.그러니까 환곡은 반강제적 고리대금업이었던 것입니다.

환곡이 얼마나 농촌사회를 파괴했는지는 그 운영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가령 10킬로그램의 환곡미를 봄에 꿔준다고 해볼까요? 먼저 1킬로그램은 뺍니다.이걸 작서미라고 하는데, 지난 겨울동안 저장했던 쌀이 쥐나 쌀벌레에 의해 상했을거 아닙니까? 이걸 손실분을 농민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운반비,작지세,인정미....이런저런 것을 다빼면 고작 6킬로그램남짓을 받아들고 오게됩니다. 물론 갚아야 할 것은 10킬로그램이지요.

만일 훙년이 들면 환곡쌀을 못갚게되겠지요.그러면 곤장 서른대를 맞고 약간의 말미를 줍니다.도리 있습니까?맞아죽으나 굶어죽으나 마찬가지...다시 곤장을 서른대맞기보다는 그냥 있는 토지를 팔아서 갚고 맙니다.물론,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빈털터리...도둑이 되어 산으로 가거나 거지가 되어 도시로 가거나....

이익은 이런 현실을 가장 첨예하게 볼 수 있는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경기도 사람들(남인)을 흔히 ‘근기남인’이라고 하는데 왜 그들에 의해 실학이 절실했는지,이익이 왜 한전제와 영업전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1798년 어름에 도시출신인 박제가는 포천의 작은 산골 현감으로 부임했습니다. 그곳에거 그가 본 것은 환곡쌀을 값지 못하자 솥단지와 놋숟가락까지 가져가버려 질그릇 하나와 나무젓가락 달랑 하나뿐인 농촌의 부엌이었지요.
경비와 관가의 경비에 쓰일 세금이 그 불쌍한 백성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박제가가 흘린 눈물...그것은 결국 덧없었던 것일까요?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인정넘치던 조선사회는 아시다시피 환곡과 관리와 아전들의 탐욕으로 망했습니다.

서양에서도 지속적인 감세를 주장하던 토지귀족들은 신흥상업계층인 시민계급에게 거래세와 소비세를 부과해서 세수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이 소비세는 더 많이 내는 법이지요.
프랑스 혁명이 어디로 칼끝을 겨눴을지는 짐작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