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게 쓰리고 아픈, 섭섭하고도 야속했던 일들이 내 기억이란 틀 속에 갇혀 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실타래 풀리듯 풀려 나온다. 그 사이 사이 기가 막힌 사건들도 곁들여서.
1992년 어느날 갑자기, "엄마! 나 있다가 방송 출연 해. 이유는 나중에 집에와서 설명해 줄께.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 근데 꼭 녹화 좀 해주라!"
그 말을 남긴채 재빠르게 뛰어 나가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은근한 나의 억울함이 묻어 나온다. 성재는 보통의 학생들과 같이 평범한 그리고 학교 생활에 별 불만이 없는 그런 애였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무엇인가 만드는데 남다른 소질과 예민함, 세밀함을 지닌 학생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밝은 성격을 지녔었다. 그런데 1988년에 일본에서 한국에 있는 상문고로 전학해 6개월 정도 다니면서 학교와 선생님을 싫어하는 학생으로 돌변해 버렸다.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해오던 애를 그토록 급변하게 할 수 있는 한국의 교육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되고 싶어했던 치과의사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엄마 지금 5분 전인데 정말로 방송에 나가나 봐. 알았지? 엄마 이따가 봐. 화면 오른쪽 뒤야. 본 소감 얘기해 줘야 돼. 엄마 사랑해."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난 한동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녹화 준비를 마치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두려움, 어색함, 떠림...등 정말 야릇한 느낌들의 어수선함에 둘러 싸였었다. 눈이 흐려져서 똑똑히 안보이는 것 같았었고 -9;어머, 어머머!-9; 하는 짧은 순간에 그 다음 팀이 나왔고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나왔었는지 춤을 잘 췄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딱 한가지 -9;정말 우리 아들이 나왔었네!-9; 하는 것 뿐이었다.
성재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 나갔다. 용돈을 버는 아르바이트 차원에서 현진영과 와와 댄스 그룹의 백댄서였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뛰는 성격처럼 열심히 했다. 자기 일이 있다는 자부심에 눈이 반짝거렸고 용돈이 들어오니까 즐거워 했다. 인기도 차츰 올라 갔고 그 해 연말에는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바쁜 스케줄로 점차 성공이란 단어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현진영의 마약 사건으로...성재는 누구보다 아파했고 그로 인해 실패감도 컸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모든 영광을 위해서 참고 견뎌 왔었는데, 그런 일로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니까 어린맘에...
"깨끗하게 얼른 모든걸 포기하고 난 공부를 해야 하나봐."라며 성재는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고 한양대학 관광학과에 응시를 했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왔다. 가수 제의가 성재에게 끈질기게 지속 되었다. 그러던 1992년 어느 날 밤에 "그래 하자"라고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 후로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룹 이름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멋있다고 환호성을 질러대던 그때, 현도와 둘이서 할꺼며 음악은 현도가 나는 안무를 맡아 똘똘 뭉쳐서 우린 해낼거라고 좋아라 했었다.
그렇게 해서 듀스란 그룹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창 뜨고 있을 때 -9;힙합-9;이란 새로운 음악을 우리나라에도 알려야 한다고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듀스만의 색깔과 멋을 창조해 나갔다. 성재는 싫증 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간간히 안무 바꾸는걸 즐겨 했고 언제나 하는 입장 보다는 보는 입장에서 헤어, 패션까지 세세한 신경을 썼고 그걸 즐겼다.
우리 나라보다 앞서가는 영국과 일본에서 살아 왔던 관계로 음악이나 의상에 있어서도 굉장히 앞서 가는 감각을 지닐 수 있었다는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2집 앨범을 내면서 부터 듀스는 걷잡을 수 없이 유명해졌고 인기는 날로 많아졌다. 2집 활동을 끝내면서 리믹스 앨범을 선보였는데 굉장한 반응을 얻었고 <여름안에서>,<떠나버려> 같은 곡은 그때로서는 어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획기적인 기획으로 뮤직 비디오도 찍었다.
그러나 모 레코드사와의 계약이 잘못되어 인세를 1원 한 장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허탈한 얼굴로 우린 왜 이러는건지 모르겠다며 정말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던 그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애들이 그렇게 애쓰고 먹지도 못하면서 스케줄에 얽매여서 살아가고 있는 게 어른들 눈에는 측은하지도 않은지...아직 애들이라서 그런지 며칠 있더니 스스로 마음을 달래서 다시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굴레를 벗어 버리고 싶은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낸 타이틀 제목 <굴레를 벗어나>가 들어 있는 3집 앨범을 만들어 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 속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갖고자 뭔가를 표출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두 애들이 한없이 측은했었다.
어쨌거나 마음껏 잘 수도 없었고, 그 좋아 하는 친구들과 흡족하게 놀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돈이 펑펑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신문과 방송에서 듀스가 아무리 인기 있다고 떠들어도 그건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해체 하기 싫어도 꼭두각시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각본대로 앵무새 같이 말을 해야한 했던 그런 위치였을 뿐이고, 그런 자리에 익숙하지 못했던 애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아주 어설프게 앉아 적당히 짧게 말하고 끝냈었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영원히 해체할 맘이 없이 끝까지 항상 같이 할 것으로만 꿈꿔왔던 그 애들이...팬들에게 약속했던 그 일을 자신들의 입으로 약속을 못 지키게 되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눈물을 감추고 분통을 삼키고 조용히 또박 또박 기자회견을 해야만 했다.
내 눈에 비친 DEUX는 오로지 젊음과 열기 하나만을 방패로 최고의 자리를 위해 모든 고통과 쓰라린 상처를 딛고 꾸준히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룹이었다. 난 바란다. DEUX의 자존심 건드리지 말고 그들이 추구해오던 음악과 춤을, 꾸밈없이 살아온 두 젊은 애들의 꿈을 짓밟는 기사들을 제멋대로 추측해서 쓰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DEUX는 살아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할 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겐 언젠가 우리만큼의 아픔이 되돌아 갈거라고 확신한다. 사건의 결말은 났지만, 재판에 대해서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다. 내가 아들을 팔아서 K양의 집으로부터 2억을 받고 풀어줬다고...이런 소문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는걸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일이다.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몇 백번이고 왜 재판을 못하겠는가? 가슴이 아려온다.
현도야, 건강하지? 너와 성재의 두 마음은 하나였고 언제나 같은 곳에서 똑같은 생각의 발상을 즐기면서, 힘들면 서로 부둥켜 울기도 했었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단단하게 다져지는 너희들의 우정을 보는 게 너무 좋았단다. 네 부모님과 나, 그리고 성욱이까지 챙기느라 어깨가 무거운 널 생각하면 안스럽기오도 하지만 너의 큰 손이 내 어깨에 놓일 때는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단다. 난 오늘도 DEUX의 정신을 곧은 눈과 마음으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그 날이,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그 날이 꼭 오기를 기원한단다.
김성재 어머니 육영애 여사가 되돌아본 듀스
듀스...
가만히 그리고 고요하게 그날들을 되감아본다!
서럽게 쓰리고 아픈, 섭섭하고도 야속했던 일들이 내 기억이란 틀 속에 갇혀 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실타래 풀리듯 풀려 나온다. 그 사이 사이 기가 막힌 사건들도 곁들여서.
1992년 어느날 갑자기, "엄마! 나 있다가 방송 출연 해. 이유는 나중에 집에와서 설명해 줄께. 지금 굉장히 바쁘거든. 근데 꼭 녹화 좀 해주라!"
그 말을 남긴채 재빠르게 뛰어 나가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은근한 나의 억울함이 묻어 나온다. 성재는 보통의 학생들과 같이 평범한 그리고 학교 생활에 별 불만이 없는 그런 애였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무엇인가 만드는데 남다른 소질과 예민함, 세밀함을 지닌 학생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밝은 성격을 지녔었다. 그런데 1988년에 일본에서 한국에 있는 상문고로 전학해 6개월 정도 다니면서 학교와 선생님을 싫어하는 학생으로 돌변해 버렸다.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해오던 애를 그토록 급변하게 할 수 있는 한국의 교육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되고 싶어했던 치과의사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엄마 지금 5분 전인데 정말로 방송에 나가나 봐. 알았지? 엄마 이따가 봐. 화면 오른쪽 뒤야. 본 소감 얘기해 줘야 돼. 엄마 사랑해."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난 한동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녹화 준비를 마치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두려움, 어색함, 떠림...등 정말 야릇한 느낌들의 어수선함에 둘러 싸였었다. 눈이 흐려져서 똑똑히 안보이는 것 같았었고 -9;어머, 어머머!-9; 하는 짧은 순간에 그 다음 팀이 나왔고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나왔었는지 춤을 잘 췄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딱 한가지 -9;정말 우리 아들이 나왔었네!-9; 하는 것 뿐이었다.
성재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 나갔다. 용돈을 버는 아르바이트 차원에서 현진영과 와와 댄스 그룹의 백댄서였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뛰는 성격처럼 열심히 했다. 자기 일이 있다는 자부심에 눈이 반짝거렸고 용돈이 들어오니까 즐거워 했다. 인기도 차츰 올라 갔고 그 해 연말에는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바쁜 스케줄로 점차 성공이란 단어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현진영의 마약 사건으로...성재는 누구보다 아파했고 그로 인해 실패감도 컸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모든 영광을 위해서 참고 견뎌 왔었는데, 그런 일로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니까 어린맘에...
"깨끗하게 얼른 모든걸 포기하고 난 공부를 해야 하나봐."라며 성재는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고 한양대학 관광학과에 응시를 했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왔다. 가수 제의가 성재에게 끈질기게 지속 되었다. 그러던 1992년 어느 날 밤에 "그래 하자"라고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 후로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룹 이름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멋있다고 환호성을 질러대던 그때, 현도와 둘이서 할꺼며 음악은 현도가 나는 안무를 맡아 똘똘 뭉쳐서 우린 해낼거라고 좋아라 했었다.
그렇게 해서 듀스란 그룹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창 뜨고 있을 때 -9;힙합-9;이란 새로운 음악을 우리나라에도 알려야 한다고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듀스만의 색깔과 멋을 창조해 나갔다. 성재는 싫증 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간간히 안무 바꾸는걸 즐겨 했고 언제나 하는 입장 보다는 보는 입장에서 헤어, 패션까지 세세한 신경을 썼고 그걸 즐겼다.
우리 나라보다 앞서가는 영국과 일본에서 살아 왔던 관계로 음악이나 의상에 있어서도 굉장히 앞서 가는 감각을 지닐 수 있었다는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2집 앨범을 내면서 부터 듀스는 걷잡을 수 없이 유명해졌고 인기는 날로 많아졌다. 2집 활동을 끝내면서 리믹스 앨범을 선보였는데 굉장한 반응을 얻었고 <여름안에서>,<떠나버려> 같은 곡은 그때로서는 어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획기적인 기획으로 뮤직 비디오도 찍었다.
그러나 모 레코드사와의 계약이 잘못되어 인세를 1원 한 장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허탈한 얼굴로 우린 왜 이러는건지 모르겠다며 정말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던 그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애들이 그렇게 애쓰고 먹지도 못하면서 스케줄에 얽매여서 살아가고 있는 게 어른들 눈에는 측은하지도 않은지...아직 애들이라서 그런지 며칠 있더니 스스로 마음을 달래서 다시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굴레를 벗어 버리고 싶은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낸 타이틀 제목 <굴레를 벗어나>가 들어 있는 3집 앨범을 만들어 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 속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갖고자 뭔가를 표출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두 애들이 한없이 측은했었다.
어쨌거나 마음껏 잘 수도 없었고, 그 좋아 하는 친구들과 흡족하게 놀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돈이 펑펑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신문과 방송에서 듀스가 아무리 인기 있다고 떠들어도 그건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해체 하기 싫어도 꼭두각시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각본대로 앵무새 같이 말을 해야한 했던 그런 위치였을 뿐이고, 그런 자리에 익숙하지 못했던 애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아주 어설프게 앉아 적당히 짧게 말하고 끝냈었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영원히 해체할 맘이 없이 끝까지 항상 같이 할 것으로만 꿈꿔왔던 그 애들이...팬들에게 약속했던 그 일을 자신들의 입으로 약속을 못 지키게 되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눈물을 감추고 분통을 삼키고 조용히 또박 또박 기자회견을 해야만 했다.
내 눈에 비친 DEUX는 오로지 젊음과 열기 하나만을 방패로 최고의 자리를 위해 모든 고통과 쓰라린 상처를 딛고 꾸준히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룹이었다. 난 바란다. DEUX의 자존심 건드리지 말고 그들이 추구해오던 음악과 춤을, 꾸밈없이 살아온 두 젊은 애들의 꿈을 짓밟는 기사들을 제멋대로 추측해서 쓰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DEUX는 살아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할 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겐 언젠가 우리만큼의 아픔이 되돌아 갈거라고 확신한다. 사건의 결말은 났지만, 재판에 대해서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다. 내가 아들을 팔아서 K양의 집으로부터 2억을 받고 풀어줬다고...이런 소문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는걸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일이다.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몇 백번이고 왜 재판을 못하겠는가? 가슴이 아려온다.
현도야, 건강하지? 너와 성재의 두 마음은 하나였고 언제나 같은 곳에서 똑같은 생각의 발상을 즐기면서, 힘들면 서로 부둥켜 울기도 했었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단단하게 다져지는 너희들의 우정을 보는 게 너무 좋았단다. 네 부모님과 나, 그리고 성욱이까지 챙기느라 어깨가 무거운 널 생각하면 안스럽기오도 하지만 너의 큰 손이 내 어깨에 놓일 때는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단다. 난 오늘도 DEUX의 정신을 곧은 눈과 마음으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그 날이,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그 날이 꼭 오기를 기원한단다.
잘 지내라...건강하게...
99년 7월 성재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