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12회

손나라200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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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12회

1

'화이트 아웃' 현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모든 게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세상인 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상태.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가끔 이런 화이트 아웃 현상을 곳곳에서 만난다.

절대 예상치 못한 단 한 순간,

자신의 힘으로 피해 갈 수 없는 그 순간,

현실인 지 꿈인 지 절대 알 수 없는,

화이트 아웃 현상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한 날 동시에 찾아왔다.

 

 

2

그렇게 눈 앞이 하얘지는 화이트 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춰야한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춰야 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그가 틀렸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3

6년 전, 그와 헤어질 때는 솔직히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단지 날 설레게 하는 애인일 뿐이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웃고 싶고

그런 걸 못하는 건 힘은 들어도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젊은 연인들의 이별이란 게 다 그런거니까.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가는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욕조에 떨어지는 물보다 더 따뜻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다.

 

 

...그 때 그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들

그와 헤어진 게 너무도 당연한 몇 가지 이유들이 생각나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 가지 인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들은

왜 이렇게 셀 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 건가.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 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 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